시간 가게 - 제13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53
이나영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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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작스럽게 하게 된 교실 대청소 때문에 학원에 늦게 되었어요. 셔틀 버스를 놓쳤거든요. 부랴부랴 학원으로 향하는 찰나에 시간 가게 전단지를 보게 되었어요.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시간이 부족한 분께 시간을 드립니다.

-시간 가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호기심이 일었어요. 나는 그때 정말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전학 온 새 학교에서 수영이를 꺾고 1등을 하는 게 엄마의 꿈이었잖아요. 시간 가게 할아버지는 하루에 한 차례, 10분의 시간을 살 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시간을 사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것은 행복한 기억이라고 했죠. 세상에, 단지 기억 뿐이래요. 큰 돈을 요구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행복한 기억 한자락 내주고 살 수 있는 시간이라니, 이건 분명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그랬잖아요.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고. 


처음으로 시간을 사게 된 건 학원까지 가는 길이었어요. 지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거죠. 내 몸속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게 뭔지 어떻게 확인하겠어요. 일단 수업에 늦지 않는 게 중요했거든요. 지각에 단어 시험까지 겹쳐서 숙제가 배로 늘어났어요. 엄마한테 잔소리 듣기 싫어서 몰래 하느라고 애먹었어요. 내가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는지, 초단위로 쪼개서 살고 있는지 엄마는 아세요? 엄마가 짜준 계획표는 30분 단위로 꽉 차 있죠. 나 그거 엄청 숨막혔는데, 엄마도 그거 알고 계세요?


수학 시험 때였어요. 문제 하나가 막히자 나머지도 줄줄이 안 풀리는 거예요. 수영이는 쓱쓱 문제를 풀고 있는데 말이지요. 난 초조했어요. 또 다시 수영이를 이기지 못하면 엄마는 얼마나 실망할까요? 20등도 아닌 2등인데도 엄마는 나를 낙오자 취급 했잖아요. 엄마에게는 1등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거죠. 나는 시간을 사기로 했어요. 10분, 10분이면 충분했거든요. 교실 안의 모든 것이 멈췄어요. 내가 산 10분이 흘러가는 동안 움직일 수 있는 건 나뿐이거든요. 난 수영이의 시험지를 베꼈어요. 그 덕분에 올백을 맞았죠. 당연히 전교 1등이에요. 수영이는 다른 과목에서 한문제를 틀렸대요. 난 정말 기뻤어요. 내 힘으로 얻은 성적이 아니었지만 크게 문제 삼지도 않았어요. 이건 나만 아는 비밀이니까요. 1등하면 전학 오기 전 내 단짝 친구인 다현이를 생일날 초대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다현이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나만큼이나 기뻐해 주었어요. 역시 내 베프답죠. 


1등을 했지만 행복한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어요. 시험이 한번 뿐인 게 아니잖아요. 단지 중간고사가 끝났을 뿐이니까요. 엄마는 영어 인증 시험도 잘 봐야 한다고 했고,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 스포츠 클럽을 다니는 건 어떠냐고도 하셨죠. 난 사실 싫었어요. 내겐 그저 체육 학원일 뿐 스트레스 해소는커녕 스트레스 추가용일 뿐이거든요. 


난 자꾸자꾸 시간을 샀어요. 준비물을 깜박했을 때 친구들 것을 몰래 가져오는 용으로 쓰기도 했고, 밉살맞은 친구를 골탕 먹일 때도 10분의 시간을 샀어요. 근데 이상해요. 시간을 사면 살수록 점점 더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게 힘들어졌어요. 하필 그날은 수학경시대회였죠. 행복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서 애먹다가 지난 중간고사 때 전교 1등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어요.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일까요. 시간 가게에서 받아온 시계의 버튼을 눌렀는데도 시간이 멈추지 않는 거예요. 난 시계가 고장난 줄 알았어요. 덕분에 시험은 망쳤죠. 또 다시 1등은 수영이 차지. 


난 시간 가게 할아버지에게 따져 물었죠. 할아버지는 머리로 만들어 낸 행복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기억을 하는 진짜 행복으로만 시간을 살 수 있다고 했어요. 이게 뭔 소린지... 하여간 나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시계를 고쳐달라고 했죠. 할아버지는 그 대신 행복한 기억을 두 개씩 팔아야 한다고 했어요. 난 거래를 했어요. 2개 아니라 3개를 팔아서라도 난 시계가 필요했어요. 그렇지 않고는 시험을 잘 볼 자신도 없고, 엄마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도 없거든요. 


엄마가 날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 알아요. 아빠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엄마가 나만 보고 산 것두요. 근데, 그것 알아요? 그 기대가 무겁다는 것. 기대가 곧 사랑이라는 것 알지만, 사랑이 아프기도 하다는 것 말이에요. 엄마를 만족시키는 일이 나의 최대 과제였어요. 엄마가 늘 강조하신 미래를 위해 난 오늘을 포기하며 살았어요. 오늘 행복하지 않은데 미래의 행복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난 많은 시간을 샀고, 그 바람에 많은 행복했던 기억을 팔았어요. 그리고 혹독한 대가를 치렀어요.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이 깡그리 사라진 거예요. 그들과 함께 나눴던 추억의 물건을 보아도 그 물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했어요. 외할머니가 오셨을 때도 그랬죠. 하물며 아빠와의 기억까지... 난 어떡하죠? 내가 도대체 무엇을 팔아서 무얼 산 걸까요? 시간만 사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1등만 하면 충분히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난 여전히 쫓기고 있고 불안하고 무섭기까지 해요. 내 안의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텅 빈 껍데기만 남은 나는 대체 뭐가 되는 걸까요? 공부하는 기계? 엄맘는 정말 내가 그리 사는 걸 바란 건가요?


난 거래를 되돌리려고 했어요. 내가 팔았던 내 기억을 되사고 싶었거든요. 그 바람에 내 시간을 내주어야 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되찾고 싶었어요. 그래야만 했어요.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정말인가봐요. 난, 시간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알아차렸어요. 사실 그 깨달음은 시간만이 줄 수 있는 것들이기도 했어요. 시간가게의 경험은 무서운 대가를 치렀지만 나에게 다른 세상도 보여주었거든요. 


엄마, 사랑하는 엄마.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세요. 엄마 딸 윤아는 공부를 잘하기도 하지만 때로 잘 안 될 때도 있어요. 시험 문제 하나 틀렸다고 내 인생이 틀어진 것처럼 호들갑 떨지 말아주세요. 가기 싫은 학원을 억지로 가지 않을래요. 꿈을 향해 다가가는 친구를 위해서 시간도 내주고 축하도 해주고, 나의 꿈은 무엇인가 고민도 해볼래요. 지금은 그런 과정이 더 필요한 때 같아요. 


나는 조금 천천히 갈래요. 뒤도 안 돌아보고 앞만 보고 달렸더니 내가 몽땅 사라져버렸어요. 나는 조금 천천히 가는 대신 나와 내 주변을 더 살필래요. 그러니까 엄마도, 내 공부에만 올인하지 말고 엄마 인생을 살아요. 지금처럼 피곤이 덕지덕지 쌓여서 짜증도 같이 쌓인 모습 말고요, 휴식도 취하고 여유도 가지면서 엄마의 시간을 갖도록 해요.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시간도 같이 만들구요. 난 그 시간을 다시는 팔지 않을 생각이에요. 차곡차곡 내 가슴에 새길 거예요. 공부만 강요하고 압박 주는 그런 엄마로만 기억하는 건 싫어요. 넘어졌을 때 왜 빨리 안 일어나냐고 화내는 엄마가 아니라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엄마를 보고 싶어요. 그런 엄마로, 돌아와 주세요. 


어쩌면 엄마도 시간 가게의 유혹을 받을 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절대로 흔들리지 마세요. 이건 경험자가 주는 충고예요. 네버, 네버! 10분의 시간을 사기 위해서 지불해도 될 만큼 값싼 행복은 없어요. 우리의 소중한 행복,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아름다운 행복, 앞으로도 많이 만들어 가요. 엄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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