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 - 물리학자 이승헌의 사건 리포트
이승헌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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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조단이 과학의 이름으로 천안함사건의 결론을 내렸다고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평범하게 물리학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살고 있던 이승헌 교수가 이렇게 사건에 뛰어들어 보고서를 쓰는 일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국내에 있지 않았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연구를 하던 이승헌 교수는 한발자국 먼저 이 사건에 뛰어들게 된 존스홉킨스대학 서재정 교수에게 격려 이메일을 보내게 되었다. 혹시라도 물리학자의 의견이 필요하면 말해달라며. 그렇게 시작된 한걸음은 그가 예기치 못했던 깊이만큼 더 빠져들게 되었다. 과학자의 양심이 이끈 길이었다.

 

'1번 어뢰'를 기억할 것이다.

 

후부 추진체에 300도의 열만 가해졌더라도 잉크는 완전히 타 없어졌을 것이다. 비등점이 이보다 높은 유성잉크나 페인트를 사용했더라도 어뢰 외부의 페인트가 타버릴 정도였다면 내부의 유성잉크나 페인트도 함께 탔을 것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외부 페인트가 탔다면 “1번”도 타야 했고, “1번”이 남아 있다면 외부 페인트도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고열에 견딜 수 있는 외부 페인트는 타버렸고, 저온에도 타는 내부 잉크는 남아 있다. -서재정·이승헌 – 47쪽 

 

외부 페인트는 타버렸는데, 폭발이 있었다면 응당 따라올 고열에도 당당하게 살아남은 파란 잉크의 1번 어뢰 글자. 그러니까 북한 소행이라고 합조단은 발표했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모의실험을 했고, 그 결과에 문제가 있다고 과학자가 지적을 했다. 정당한 지적을 수긍하던가, 아니라면 재차 실험을 통해서 반박을 하면 된다. 그러나 합조단 측은 거절했고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을 종북으로 몰아가며 색깔론을 펼쳤다. 너무 익숙해서 놀랍지도 않지만 여전히 참 창피하고 뻔뻔한 수순이다.

 

이교수는 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국제 과학 학술지나 언론사에 알리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마다 관련 자료들을 보내주고 인터뷰를 하고 필요하다면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국내 기자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공계 소양을 갖춘 기자가 많지 않아서 그 부분에 대해서 무척 답답해하는 인상을 받았다. 동감한다. 과학의 결과물들이 사회 곳곳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사회이므로 젊은 이공계 출신들이 의원 보좌관과 기자로도 많이 진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대학의 현실을 생각하면 참 까마득해 보인다. 이공계뿐인가. 국문학과가 속속 폐지되고 있는 시점이니, 대한민국의 앞날이 참으로 갑갑하다.

 

수개월에 걸쳐 이 문제에 힘을 쏟으면서 이교수는 여러모로 난처한 입장에 처할 때가 있었다. 본인은 과학적  신념과 지식인의 사명을 가지고 이 일에 뛰어들었지만, 자신 때문에 일본인 친구가 화를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사직을 청할 생각까지도 했는데, 오히려 일본의 J교수는 이교수를 만류한다.

 

"토오꾜오대가 외부의 압력에 굴할 정도로 만만한 데가 아닙니다. 토오꾜오대 교수들이 전문가 입장에서 이교수의 주장이 맞다고 판단하면, 이교수가 기자회견을 하는 것에 대해 과학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인정해줄 것입니다. 이교수의 일본인 친구가 그 일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건강한 자세가 아닌가. 사실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로서는 놀라는 쪽 반응이 더 당연하다는 게 슬프다. 실제로 일본의 대학은 J교수가 장담한 대로 움직였다.

 

“우리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이 주간지 기사가 이승헌 교수님의 소속을 밝혔으니 학교 본부에서 교수님과 가족을 보호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토오꾜오 경찰과 일본 경찰청에 이교수님의 개인정보를 주어야 하는데 동의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처음에 귀를 의심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의 신변보호를 위해 경찰에 협조를 요청한다니.
“토오꾜오대는 이교수님의 보호를 위해 경찰이 필요하면 경찰이 캠퍼스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른 도시로 가는 것은 가급적 삼가시고, 꼭 갈 일이 있으면 며칠 전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일본 경찰청이 그 도시에 교수님의 행적을 미리 알려 보호대책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놀랍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일본사회의 저력이랄까 하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사회가 이 정도로 개인의 학문적 소신을 지키는 일을 지원해주다니 더할 나위 없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 152쪽

 

세상에,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너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입을 지 모르니 나가!가 아니라, 보호해 주고 협조해주고 대책을 세우겠다고 하지 않나.

 

이런 식의 비교될 일은 무척 많았다.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이 낙향 후에 직접 설계한 버지니아 대학 건축 이야기도 부러운 부분 중의 하나였다. 퇴직한 대통령이 이렇게 재능을 발휘해서 조용히 지낼 수도 있구나... 싶어서. 이교수님은 그리스계 아내와 살고 있는데, 두 부부가 어린 아이들을 함께 돌보며 가사 일도 같이 돕는 것 등도 무척 부러워보였다. 책의 말미에는 이필렬 교수와의 대담도 실려 있는데, 거기에서 일본 토오꾜오대 연구소에는 내부 승진이 없다고 하자 독일도 그렇다고 대답해서 역시 마구마구 부러웠다. 천안함 사건의 과정에서 정부 측 손을 든 노교수의 잘못된 발언에 대해 비판을 하자 버릇없다고 호통치는 이런 서열식 한국 문화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과학이 바로 서지 못할 것이다. 매해 노래부르는 노벨상도 소원할 것이고.

 

이 책은 일기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이승헌 교수가 천안함 사건에 어떻게 발을 담그게 되었나부터 이 한권의 책으로 어떻게 마무리를 짓는가의 여정이 시간 순으로 쭉 배열되어 있다. 자신의 전공 분야인 물리학에 기대어 합조단의 실험 결과가 왜 문제가 있는지, 그들의 주장에 어떤 모순이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에 주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해외 언론사들과 국내 언론사들, 그리고 과학 관련자들의 움직임과 입장에 대해서 많이 소개했다. 그가 안타까워 했듯이, 우리나라 풍토에서 개인이 실명을 걸고 이 문제를 짚고 나오기에는 개인이 치러야 할 대가가 많이 크다. 여차하면 연구비가 다 끊길 판이니. 그래서 조직과 연대의 이름으로 단체가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아마 그 조직도 그렇게 큰 덩어리가 아닐 것이니 이해는 가지만, 역시 지성의 이름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옛날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서 북한이 금강산 댐을 만들고 있다며 우리는 평화의 댐으로 응수하자고 전국적 모금운동을 벌이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 시뮬레이션을 보여주던 교수님, 안 부끄러우셨습니까? 사사오입 개헌 때 2/3를 채우지 못한 걸 반올림 해서 통과되었다고 우긴 어용수학자, 얼굴 화끈거리지 않았습니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십여 년 전 황우석 사건 때 국제적으로 얼마나 망신스러웠던가.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 진실을 감추는 것도 당연히 안 될 일이지만, 21세기에 과학적 진실이 얼마나 오래 덮어둘 수 있다고 이토록 용을 쓰는지... 그만큼 국민이 우습거나 그만큼 감춰야 할 것들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지 않은가. 모든 게 밝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숨겼던 것들, 왜곡했던 것들 모두 말이다. 그리하여서 희생된 장병들의 억울함이 조금은 가실 수 있기를,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기를, 대한민국의 언론도, 과학계도, 집단 지성도 모두 한뼘씩 성장하고 자정되기를!

 

 

이필렬 교수와의 대담에 등장한 사진이다. 오, 멋지다. 지성미가 돋보인다! 사진이 조금 잘렸지만 사과 마크 노트북도 아주 새끈함!

 

 

덧글) 오타가 있다.

257쪽

과학의 존엄성와 엄밀성에 >>> 존엄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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