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부 추진체에 300도의 열만 가해졌더라도 잉크는 완전히 타 없어졌을 것이다. 비등점이 이보다 높은 유성잉크나 페인트를 사용했더라도 어뢰 외부의 페인트가 타버릴 정도였다면 내부의 유성잉크나 페인트도 함께 탔을 것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외부 페인트가 탔다면 "1번"도 타야 했고, "1번"이 남아 있다면 외부 페인트도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고열에 견딜 수 있는 외부 페인트는 타버렸고, 저온에도 타는 내부 잉크는 남아 있다. -서재정·이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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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경 노종면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정희 의원실에서 합조단에 흡착물질을 요구했더니 천안함 선체의 흡착물질(AM-1)과 어뢰추진체의 흡착물질(AM-II)은 주겠다고 했는데 모의 폭발실험에서 나온 흡착물질(AM-III)에 대해서는 아직 확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뭔가 확실히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다음날 노기자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웃으며 "모의 폭발실험 흡착물질의 EDS데이터가 조작되었군요."라고 말해주었다.
-100쪽
저녁에 서재정 교수와 인터넷전화로 통화를 하다 참여연대 보고서 이야기가 나왔다. 오늘 참여연대가 지난달 발간한 『천안함 이슈 리포트』의 영문판을 유엔 안보리에 보낸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나라당과 정부를 위시한 보수진영으로부터 맹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국가적 이적행위"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는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우익단체 회원들이 참여연대 사무실 앞으로 몰려가 물리적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경찰은 팔짱을 끼고 방관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101쪽
백낙청 교수가 젊었을 때 어떤 분이었는지는 잘 몰랐는데 리영희 선생의 『대화』에 의하면 60년대초 돈과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다 군대를 빠질 때, 하버드 박사과정 재학중 귀국하여 입대하고 군복무를 마친 분이라 한다.l 또한 스물여덟의 나이에, 그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계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분이 아닌가. (...) 현정부와 한나라당의 고위직 중에서 군 복무를 회피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어찌 백낙청 교수 같은 분과 비교가 되지 않겠는가. 군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전쟁 불사’를 부르짖고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은 ‘전쟁 불가’를 외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119쪽
정간사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얼마 전에 현 태국정부로부터 국외추방을 당한 탁신 전 수상의 변호사라는 사람이 여기서 기자회견을 했다고 한다. 그때 태국정부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기자회견 사실이 알려진 후, 한국 정부로부터 왜 이런 일을 하느냐는 항의전화가 여러 번 걸려왔다고 한다. 언론의 자유에 대한 한국정부의 이해 부족에 기자클럽에 있는 동료들에게 참으로 부끄러웠다고 하셨다.
-142쪽
"우리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이 주간지 기사가 이승헌 교수님의 소속을 밝혔으니 학교 본부에서 교수님과 가족을 보호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토오꾜오 경찰과 일본 경찰청에 이교수님의 개인정보를 주어야 하는데 동의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처음에 귀를 의심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의 신변보호를 위해 경찰에 협조를 요청한다니. "토오꾜오대는 이교수님의 보호를 위해 경찰이 필요하면 경찰이 캠퍼스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른 도시로 가는 것은 가급적 삼가시고, 꼭 갈 일이 있으면 며칠 전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일본 경찰청이 그 도시에 교수님의 행적을 미리 알려 보호대책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놀랍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일본사회의 저력이랄까 하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사회가 이 정도로 개인의 학문적 소신을 지키는 일을 지원해주다니 더할 나위 없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152쪽
기사에 의하면 러시아 조사단의 결론은 천안함이 먼저 수심이 얕은 해역에서 좌초했고 깊은 물로 가려다가 무언가 사고가 일어나 천안함이 세 동강났다는 것이다. 좌초의 증거들 중 하나는 스크루 날개의 변형상태였다. 이 ‘초기 좌초설’은 이미 『서프라이즈』대표 신상철씨와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 이종인씨가 처음부터 주장했던 건데, 어뢰 공격 이외의 모든 가설은 철저히 무시하는 전략에 의해 조명받지 못했다. 더구나 그들이 박사학위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러시아 전문가들 또한 똑같은 결론을 냈으니, ‘초기 좌초설’의 신빙성이 더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61쪽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신문지상에서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이 문제는 정권과 보수세력 전체의 존립이 걸린 문제라, 정부의 주장을 계속 되풀이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믿게끔 해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을 했을 것이다.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과학이라는 권위를 빌리면 국민들로서는 믿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 한국 과학계의 나약한 침묵이 또 하나의 이유다. 이 정도로 문제가 제기되었으면,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한국물리학회 같은 공인된 과학단체에서 진실규명을 요구하거나, 직접 실험을 통해서 진실규명을 하겠다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폭발 초기 버블 팽창과정이 가역적인지 비가역적인지는, 아주 기초적인 물리문제이어서 실험을 할 필요도 없는데, 개개인이 익명으로는 발언을 해도 실명으로는 하지 않는 이유는, 현 정부에 밉보이면 연구비가 끊길 것 같아 몸을 사리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이렇게 개인이 하기 어렵다면 공인된 단체가 나서야 하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187쪽
버지니아대학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이 낙향 후에 직접 교정과 건물을 설계하고 세운 학교로 유명하다. 건축에도 일가견이 있던 제퍼슨은 교정에 유럽풍의 건물과 파도 같은 담장들을 세웠고 곳곳에 아기자기한 정원들을 만들어놓았다.
-235쪽
하나 재미있는 것은 합조단이 발표한 최종보고서에는 실제로는 합조단의 결론을 뒤집는 씨뮬레이션 결과나 EDS데이터 등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합조단 실무과학자들은 양심적으로 모든 자료들을 다 주었고 합조단 고위관계자들은 이를 종합하는 단계에서 자기들에게 불리한 자료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모두 다 보고서에 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여겨졌다.
-240쪽
이과대 학생들의 발표에서 전두환정권 시절의 금강산댐 에피쏘드를 듣고는 새삼스러운 감회가 일었다. 한 학생은 당시 어울대 모 교수가 TV에 나와 금강산댐이 열리면 여의도 63빌딩이 40층까지 물에 잠긴다고 주장했던 예를 들며, 과학이 정치에 부역했던 사례라고 지적했다. 과학자가 자신의 발언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지인으로부터, 10월 28일 합조단 단장을 지낸 윤덕용 교수가 포항공대에서 학부생을 상대로 천안함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강연을 들으면 이수학점을 받을 수 있어서 많은 학부생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교수들도 몇몇 오고 학교 행정관계자들도 왔다고 하며, 또한 포항가속기연구소의 연구원들, 포항공대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 등 소장 과학·공학자들도 다수 참여하였다 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윤교수의 강연 후 토로시간이 매우 격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245쪽
특히 박병규 박사라는 분은 자신의 인터넷 필명이 Gaia라고 소개한 뒤, 데이터 조작이라는 말도 꺼내며 윤교수를 몰아세워 그가 당황해하자, 몇몇 교수들이 원로이신 윤교수께 무례하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과학적 진실을 추구하는 데 쓸데없는 권위에 기대어, 진실을 추구하는 그 노력을 묵살하려 하는가. 미국에서 학위를 하면 나이에 전혀 상관 없이 지도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존칭 없이 그저 "철수야" 식으로 이름으로 부른다. 이는 단지 우리와 그들의 언어적 차이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고 학문에 있어서 서로간의 평등한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히고 학회나 쎄미나 등 발표 후 토론은 오직 무엇이 과학적 진실인지만을 따질 뿐이다. 이렇게 연령·직책에 대한 권위의식이 전혀 없는 미국 등지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왔을 한국 교수들 중 일부가 권위의식을 갖게 되는 것을 보면 참 우스울 따름이다.
-246쪽
침몰의 원인에 대한 이러한 진상규명과 함께 병행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데이터 조작 혐의에 대한 조사다. 이 ‘조작혐의’의 진상은 과학의 재현성 때문에 언젠가는 꼭 밝혀질 것이다. 이것은 이명박정권이 한국사회에 준 ‘과학적’ 선물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간단히 모의 폭발실험을 다시 하면 된다.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현정부에 감사한다. 그날이 오면 한국사회는 명실공히 참된 민주사회라 불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48쪽
과학적데이터의 조작이 국제무대에서 이용된 적도 있는데, 그 결과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한 예가, 잘 알다시피,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 직전에 당시 미 국무장관 콜린 파월이 유엔에서 이라크에 대량살상용 생화학무기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죠. 당시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유사시 45분 내에 상화학무기를 배치, 발사할 능력을 갖췄다는 식의 보도가 줄을 이었는데요, 이는 뒤에 모두 조작된 정보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7년여 간의 전쟁을 통해 희생된 무고한 인명들에 대한 책임은, 당시 미국과 영국 등에서 무기 자문역을 했던 과학자들에게도 상당 부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제 외교장에서는 이라크전쟁처럼 무언가 결정되고 실행되면, 무수한 인명피해 같은 매우 불행한 결과들을 피할 수 없죠.
-253쪽
이렇게 미국의 경우는 과학자들이 실명을 걸고 과학적 문제 제기를 하는데요, 아마 미국 과학계가 훨씬 크고 다양하다는 점, 그리고 한국에 만연된 인정주의보다는 과학의 존엄성과 엄밀성에 더욱 가치를 두는 미국 과학계의 분위기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에서는 실명을 걸고 남을 비판하면 학계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자신의 연구비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연구비를 따는 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심한 것 같습니다.
-257쪽
이번 국정감사에서 보니 한나라당이 이종인 알파잠수기술 공사대표를 추궁하는 방식은 세가지더군요. 하나는 ‘어느 당이냐?’며 소속을 묻는 사상검증입니다. 둘째는 ‘전문가인가?’라고 묻는 식의 권위주의에 기대기, 셋째는 ‘직접 폭발실험을 해보고 하는 소리냐?’는 식의 태도였습니다. 첫 번째 태도는 거론할 필요도 없는 반인권적 발언이고, 두 번째는 이종인씨는 이 문제에 있어 누구 못지 않은 과학적 탐구정신을 보여주지 않았냐고 되묻고 싶네요. 세 번째는 물리학의 정성적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국회의원과 이를 반복해서 재생하는 언론사들의 무교양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러다보니 국민들은 이를 진실게임인 양 결론이 나지 않는 어려운 문제로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265쪽
(이필렬)2차대전이 끝난 뒤 일본의 과학자들은 군사주의에 동참했던 과거사를 반성하며 민주과학자연맹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활동 또한 그들의 독립성이라는 전통에 기여했을 것입니다.
-273쪽
(이승헌)제가 머물던 토오꾜오대 연구소에는 내부 승진이 없습니다. 즉 조교수가 부교수로 올라가려면 다른 대학으로 자리릉 롬겨 그곳에서 부교수가 되어 활동하다, 잘하면 부교수나 정교수로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토오꾜오대에는 쿄또오대 출신이 많습니다. 이러다 보니 교수 집단 내의 패거리정치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속된 말로 동종 교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실력은 없어도 내 후배니까 끌어줄게라는 식의 문화는 한국보다 훨씬 적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든, 공대를 나왔든 다른 전공을 했든 실력이 있다면 인정한다는 거지요. 이런 것들이 연구의 자율성에서 중요한 토대가 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274쪽
(이필렬) 교수의 승진 씨스템은 독일과 마찬가지군요. 한국의 경우는 요즘 들어 연구실적을 따지면서 점점 개선되어간다고는 하지만, 오래전부터 내부승진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집단의식이란 것이 생기고 남을 비판하는 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생겨나지요. 더구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 예컨대 천안함사건 등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입장을 드러내기가 그리 수비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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