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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8 ㅣ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8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평범한 사람들이 바꾼 역사’에 일생을 바친 아흔다섯 노학자가 자서전에 남긴 마지막 구절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포기해선 안 된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에릭 홉스봄 1917-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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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호르몬 결핍증을 앓던 13세의 메시를 세계적인 축구스타로 키운 것은 FC바르셀로나의 힘이었다.
“우리는 축구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동료애와 우정, 헌신 등 축구의 가치를 가르친다. 그것이 바르셀로나의 축구 철학이다.”-FC바르셀로나 유소년아카데미 이반 비뇰 코치
조합원들이 운영하는 클럽 이상의 클럽 FC바르셀로나
세계 유일의 협동조합 축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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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바르셀로나의 숙적은 레알 마드리드. 두 팀은 정치·역사·민족적 기반은 물론 선수 영입과 운영 방침에서도 대척. FC바르셀로나는 '칸테라’를 통해 선수를 수급. 스페인어로 ‘채석장’이라는 뜻의 칸테라는 유소년 팀을 운영하면서 유망한 선수를 발굴하여 팀의 주력으로 길러내는 제도. 어린 시절부터 호흡을 맞춘 선수들로 팀을 꾸리기 때문에 단단한 조직력을 구축하는 데 유리. 짧고 정확한 패스를 주고받으며 공을 점유하는 바르셀로나 특유의 플레이 ‘티키타카’의 동력. 2011년 현재 FC바르셀로나의 베스트11 가운데 리오넬 메시, 세스크 파브레가스,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등 절반 이상이 칸테라 출신. 반면 레알 마드리드는 ‘갈락티코’고수. 스페인어로 ‘은하수’라는 뜻의 갈락티코는 외부에서 스타플레이어 영입하는 제도. 2000년 루이스 피구를 시작으로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데이비드 베컴 등을 끌어오면서 ‘지구대표팀’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레알 마드리드는 2009년 역대 최고 이적료 9천만 유로를 지불하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입단시켰다. 2011년 현재 레알 마드리드의 베스트11은 이케르 카시야스를 제외하고 갈락티코 출신.- 32쪽
일찍이 무역과 산업으로 번성했던 카탈루냐는 국세가 기울면서 18세기 에스파냐 왕국에 복속되었다. 이후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꾸준히 분리·독립 운동을 전개하여 1932년 자치권을 획득하지만, 1936년 스페인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프랑코 정권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간다. 3년 동안 스페인 내전을 치르고 1939년 집권한 프랑코 정권은 반프랑코 전선의 선봉이었던 바르셀로나를 철저히 탄압했다. 카탈루냐의 자치권은 박탈되었고 고유의 언어와 관습, 문화는 전면 금지되었다. ‘카탈루냐의 심장’ FC바르셀로나도 수난을 겪었다. 조합원들이 선출한 클럽 회장은 친정부인사로 바뀌었고 로고에 박혀 있던 카탈루냐 국기도 삭제되었다. 카탈루냐어인 팀명은 스페인어로 교체되어, 1974년 프랑코 정권이 종식될 때까지 FC바르셀로나가 아닌 CF바르셀로나로 뛰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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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대결은 축구경기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카탈루냐의 수도이자 프랑코 파시즘 정권에 맞선 자유의 성지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수도이자 프랑코 정권의 근간이었던 마드리드, 이 두 지역을 연고로 하는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격돌은 사실상 카탈루냐와 스페인의 대리전과 다름없다. FC바르셀로나의 슬로건이 ‘MES QUE UN CLUB'(클럽 그 이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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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세계적인 기업(혹은 단체)은 FC바르셀로나, 썬키스트, AP통신 등이 있으며, 한국에서는 한 살림, 서울 우유, 성미산마을이 대표적이다. (...) 그러나 협동조합 운동가 김기섭은, 오늘날 한국의 협동조합이 과연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협동조합은 결사체이자 사업체로서 상생과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데, 한국의 협동조합은 결사체로서이 성격을 심각하게 이탈해서 경쟁력 강화, 소비자 주권 등의 시장자본주의 용어는 물론이고 주식회사의 성장·개발방식을 도입하고, 협동조합들끼리 바로 이웃에 매장을 여는 등 경쟁체제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서민들이 상부상조하는 신용조합으로 발전하던 신용협동조합은 1980년대 접어들어 ‘자본주의적 경영합리화’를 앞세우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인수합병을 통해 거대 금융기관으로 변모를 꾀했고, 그 결과 1997년 8월 조합원수 500만 명, 1,700개 지점까지 규모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거대화된 신용협동조합은 직후에 불어닥친 국제구제금융 아래 줄줄이 문을 닫았고 공적자금을 투입해 기사회생한 신용협동조합은 제2금융기관으로 제도화되었다.- 37쪽
과거 빅브라더는 시민을 규율에 포함하기 위해 통제를 시행했다. 감옥과 정신병원에 격리된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교정을 통한 ‘정상’에의 복귀가 전제되어 있었고, 노숙자와 범죄자는 산업예비군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빅 브라더는 소비하지 못하는 이들을 쓰레기로 취급하면서 생산적인 시민들로부터 격리한다. 시민들은 ‘잉여’가 자신의 공간으로 스며들지 모르는 위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배제를 위한 감시에 찬동한다. 우범지역보다 부유층 밀집지역에 더 많이 설치돼 있는 CCTV는 바우만의 분석에 무게를 싣는다.
- 50쪽
줄리어스 시저 사망 이틀 후
원로원 회의의 판결
암살자
마커스 브루투스
무죄
amnestia!
잊어버리자!
“로마의 정의를 위해서
브루투스의 행위를 잊어버리고
문제 삼지 말자!“
Amnesty 사면
‘잊어버린다’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
전쟁이 끊이지 않은 로마제국시대
권력에 물들어간 사면제도
황제가 전쟁영웅에게
하루 동안 부여했던 특별한 권력
‘사면권’
“전쟁포로들을 죽이거나 사면할 수 있도록 허한다.”
- 64쪽
일반사면이 민심수습용으로 수행된다면 특정 범죄인을 지목하는 특별사면은 정치적 목적성을 띤다. 이승만 정권은 15차례, 박정희 정권은 24차례에 걸쳐 특별사면과 특별감형을 남발하며 사면권을 정권유지수단으로 활용했다. 문민정부에 들어서면서 사면권은 ‘정치적 거래’라는 더욱 왜곡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여론의 강력한 반대에도 김영삼 정부는 ‘율곡비리사건’ ‘동화은행사건’에 연루된 청와대 고위관계자 등 부패사범들을 특별사면했다. 김대중 정부는 ‘12·12와 5·18사건’ ‘전두환·노태우 비자금사건’ 관련자들을 ‘지역과 국민대화합’을 이유로 특별사면했다. 노무현 정부는 대기업총수들을 ‘경제살리기’라는 명분으로 특별사면했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비슷한 사면은 계속되었다. 반면 정치적·종교적 교의, 생존권 투쟁 등으로 감옥에 갇힌 양심수는 사면대상에서 철저히 제외되었다. 1993년 9월 23일 이후 민가협이 매주 목요집회를 여는 이유다.
- 70쪽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는 1961년 영국 런던에서 출범한 비정부 인권기구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한 술집에서 ‘자유를 위해 건배’했다는 이유로 학생 두 명이 7년형을 선고받자, 노동변호사 피터 베넨슨은 권력에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저항연대를 결성했다. 목표는 세계 각국의 양심수들을 사면하는 것으로 기금마련과 편지보내기 운동을 통해 구체화했다. 개인에게서 시작된 활동은 곧 27개 이상 국가, 18개 지부, 850개의 그룹으로 확산되었다. ‘양심수’라는 말은 국제통용어가 되었고 엠네스티의 상징 ‘철조망에 둘러싸인 촛불’은 희망과 자유를 대변했다. 1962년부터 10년 동안 앰네스티가 사면운동을 펼친 4,000명의 양심수 가운데 2,000명이 석방되었다.
- 72쪽
1973년 피노체트가 군사정변으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후 군사독재 정부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76년 3월 24일 육군사령관 호르헤 비델라는 아르헨티나가 페론 대통령 사망 후 경제위기, 정파 간 내분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비델라 정권은 군사평의회를 구성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부와 정당, 노동조합 활동을 중지했다. 또한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남미 군사독재정부들과 연합하여 ‘콘도르 작전’을 수행했다. 콘도르 작전은 표면적으로 ‘사회주의 무장세력 축출’을 내세웠으나 실제목적은 반정부세력 제거에 있었다. 이에 따라 비델라는 ‘더러운 전쟁’을 전개하여 아르헨티나 군부세력에 반대하는 좌파운동가, 지식인, 예술가, 페론주의자들을 무차별 납치하고 살해했다. 끌려간 사람들은 전국 600여 개 비밀수용소에 수감되어 강간, 폭행, 고문당했고 사망자는 바다에 버려졌다. 더러운 전쟁으로 살해·실종된 사람은 공식적으로 1만 3,000명이지만 인권단체는 3만여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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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독재가 끝나고 1983년 들어선 라울 알폰신 민간정부는 비델라를 비롯한 군부인사 370여 명에게 반인도주의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1989년 라울 정부를 이어받은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국민화합’을 명분으로 이들을 모두 특별사면하고 군부정권 부역인사들에 대한 사면법을 제정했다.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좌파정부가 사면법을 폐기하면서 군부지도자들을 다시 법정에 올랐고, 2010년 아르헨티나 법원은 비델라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 82쪽
1995년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면서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인사들을 불구속기소했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1996년 1월 내란과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함께 제5공화국 비리수사를 진행했따. 199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은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12월 22일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대화합’의 명분으로 특별사면되었다. 납부한 추징금은 532억 원이고 나머지 1,673억 원은 “통장에 29만 원밖에 없어서” 미납했다. 2007년 1월 경남 합천군은 황강변 ‘새천년 생명의 숲’의 이름을 일해공원으로 바꾸었다. 일해는 전두환 대통령의 아호다. 2012년 2월 서울 상암동에 박정희기념관이 개관했다. 총 220억 원의 공사비 중 200억 원이 국고보조금이다.
- 84쪽
고급 피아노 한 대가 12만 원이던 시절, 18만 3,600원짜리 백과사전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한창기의 ‘세일즈 전사’ 중 한 명이자 훗날 웅진그룹을 창설한 윤석금 회장은 “그는 세일즈맨들에게 단순히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교육사업 종사자이자 교육사절이라는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회고했다. 브리태니커 한국 지사는 2년 만에 판매원을 250명으로 늘렸고, 전성기 그 수는 1,500명까지 불어났다.
- 92쪽
여섯 글자 한글 제호를 쓰고, 최초로 한글 전용 가로쓰기를 시도한 『뿌리깊은 나무』는 모든 금기를 위배했다. 창간호 표지에는 농부의 얼룩진 손톱이 클로즈업 되어 있었고, 180쪽짜리 얇은 책자는 한국 최초의 아트디렉터 이상철이 설계한 타이포와 이미지로 가득했다. 부록도 없고 특집도 없었다. 순한글 맛을 살려야 한다면서 모든 필자의 글을 교정하는 바람에 종종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본문 디자인에는 예민하게 굴면서도 정작 차례는 한 가지 서체로 무뚝뚝하게 편집했고, 국판 일색인 판형 속에서 홀로 사륙배판을 고집했다. ‘인텔리’를 대상으로 한 다른 잡지와 달리 『뿌리깊은 나무』의 독자는 민중이었고, 민중이 읽는 잡지는 편안하고 친숙한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구의 것을 팔아 만든 가장 ‘한국적인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정기구독자는 6만 5,000명을 헤아렸다. 『신동아』 정기구독자가 2만 명이던 때였다.
- 94쪽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을 선결목표로 내세우고 사회적 역량을 집중했다. 빠르게 진행되는 근대화 속에서 한국적인 것은 곧 ‘배척해야 할 ’ ‘시대착오적인’ ‘추한 것’으로 격하되어 사라졌다. 한국인들은 달라지는 살림살이에 뿌듯해하면서도 “나/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의문을 품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민족문화’와 ‘민족주체성’을 내세워 이순신, 세종대왕을 찬양하는 일을 국책사업으로 추진, 출판과 방송에서 외래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대대적인 우리말 정화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강준만 교수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군사작전’식으로 추진된 ‘우리 것 사랑하기’는 실은 ‘우리 것’에 대한 모독이었다. 박정희식 히스테리만 계속되었더라면 ‘우리 것’은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절하한다. 그러면서 “한창기의 ‘우리 것 사랑하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박정희의 방식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강요할 힘도 없었지만, 강요할 꿈조차 꾸지 않았다. 계몽도 아니었고 설교도 아니었다. 그는 세련된 포장과 알멩이로 ‘우리 것’의 값어치를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고 분석했다.
- 96쪽
‘다양하고 복합적인 내용을 싣는 정기간행물’로서 잡지는 1731년 영국의 “Gentleman's magazine"에 기원한다. 이후 잡지는 주관적인 관점으로 문학, 정치, 전기, 비평 등을 다루면서 객관성을 견지하는 신문과 차별화하며 세를 불렸다. 잡지가 18세기 유럽에서 성행한 데는 정치적인 문제가 자리한다. 왕정국가의 절대권력이 신문을 통제하자 그 반발과 대안으로 잡지가 호명된 것이다. 문화의 첨병이었던 잡지는 당대의 첨예한 이슈를 아우르며 정치적 해방구이자 무기로서 역할을 자임했다.(magazine은 ‘무기(화약)고’를 뜻하기도 한다.)
- 98쪽
정책에 대한 목표와 실현방법, 실현에 필요한 기한과 재정조달 방법 등을 명시하는 매니페스토는 무책임한 공약 남발을 원천봉쇄하고 구체적인 정책을 유권자에게 약속하여 책임감 있는 선거문화 정착을 목적으로 한다. 선거 전에는 국민이 정당이나 정치가를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당선 후에는 정치가나 정당이 공약을 확실히 지키고 있는가를 평가하고 검증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일반 선거공약과 다르다.
- 142쪽
한국의 매니페스토는 고질적인 병폐로 지목돼왔던 돈봉투선거, 연고선거, 중상모략·허위비방 선거, 이미지·바람몰이 선거, 선전·선동 선거의 대안으로서 2006년 5·31 지방선거에 도입되었다. 이후 수차례 선거에서 활용되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매니페스토가 10여 장에 불과해 완성도가 떨어지는데다, 수많은 후보들의 출마로 인해서 한 명 한 명의 매니페스토를 읽어볼 여력이 없었다는 분석이다. 참공약을 알리고 유권자들의 정치참여를 유도하려는 의지가 박약한 것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일례로, 2006년 국회 예·결산특별위원회는 2007년 매니페스토 지원예산 20억 원 가운데 19억 원을 삭감하고 1억 원만을 편성해 구설에 올랐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공약실천율도 낮다. 2012년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는 18대 국회의원의 공약완료율이 35.1%에 불과하고, 국회의원 중 18.3%는 공약이행에 대한 정보공개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 145쪽
탐사보도는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라는 명제 하에 사건의 이면을 적극적으로 파헤치는 언론보도 방식으로, 19세기 미국에서 유행한 폭로기사muckraking 정신을 계승한다. ‘배설물’이라는 뜻의 muck, '갈퀴질‘이라는 의미의 raking이 결합한 영어단어가 암시하듯이, 권력과 자본의 부정, 부패, 비리, 위선을 파헤쳐 폭로, 고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154쪽
프로퍼블리카는 미국 뉴욕의 비영리 탐사전문 온라인 언론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40여 년간 운영해오던 투자회사 골든웨스트파이낸셜을 매각해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게 된 샌들러 부부는 2007년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월스트리트저널을 인수하자 사표를 제출한 월스트리트저널 편집국장 폴 스타이거에게 자본과 권력에 독점적인 언론사를 제안한다. 해마다 1,000만 달러(약 110억 원)를 제공하되 어떤 논조의 무슨 기사를 쓰든 관여하지 않겠다는 전제였다. 이에 폴 스타이거는 전·현직기자 30여 명과 함께 프로퍼블리카를 설립했다. 프로퍼블리카가 ‘비영리 탐사전문’ 매체로 존립할 수 있는 배경이다.
- 155쪽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계통 없이 국토를 파헤치던 시절 고국을 떠났지만, 수십 년이 흐른 후에도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는 여전히 ‘재개발’ ‘재건축’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지우고, 약자를 밀어내고, 삶을 갈아 엎는 방식으로 개발되었다. 정기용은 이러한 논리로 추인된 한국의 근대사를 ‘죽음과 학살의 시간’으로 규정했다. “건축과 도시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삶을 조직하고 사회를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에 공학이 아니라 인문학·철학으로 분류되어야”하며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정기용은 1986년 건축사무소 ‘기용건축’을 세우고 올바른 집짓기, 올바른 공간을 구성하는 일에 매진했다.
- 167쪽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는 대장암으로 죽음을 앞둔 정기용의 일상에 밀착하면서 평생에 걸친 건축철학과 고민을 탐색한다. 이에 따르면 계원조형예술대학교, 효자동 사랑방, 서울 동숭동 무애빌딩 등 흙에 기반한 여러 건축물들을 세우면서 그가 가장 염두에 둔 것은 ‘공공성’이다. “사유지 안에 세워지는 건축은 동시에 지구 위에 구축되는 건축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건축은 그 태생이 공공적”이기 때문이다. 정기용에게 건축은 하나의 독립된 대상이라기보다는 환경과 어우러져 풍경의 일부를 이루며 그곳의 역사, 문화, 사용자의 편의와 정서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하는 구체적 사물이다. 여기서 건축가의 역할은 다양한 현대적 삶을 이해하고, 조절하고 판단하고, 공간이 주는 상상력을 구체화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과 노동을 조율하여 “원래 거기 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해내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정기용이 말하는 ‘감응의 건축’이다.
- 168쪽
2007년 9월 유력 일간지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고향 김해에 호화저택을 지었다고 보도했다. “노무현 랜드” “노무현 타운” “아방궁” 등의 수식어가 붙은 제목과 함께 기사는 몇 주에 걸쳐 반복 게재되었다. 김해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를 설계한 건축가는 정기용이다.
- 169쪽
한국어 명칭이 붙은 최초의 소행성은 ‘관륵’(소행성번호4963). 관륵은 일본에 달력과 천문학, 지질학 등 선진문물을 전달한 백제의 고승이자 천문학자로, 1993년 도쿄천문대학 교수 후루카와 기이치로가 “과거 일제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사과하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 1997년 천문학자 와타나베 가즈오는 기이치로 박사의 자문을 받아 7365 소행성을 ‘세종’이라고 명명. 이밖에 일본에서 발견하여 한국어 이름을 붙인 소행성은 조경철(4976), 서현섭(6210), 나일성(8895), 전상운(9871), 광주(12252) 등. 한국에서 발견한 소행성에 최초의 승인이 떨어진 때는 2001년. 아마추어 천문가 이태형이 1998년 휴전선 부근에서 발견한 소행성은 2001년 ‘통일’(23880)이라는 이름으로 승인. 2000년 보현산천문대에서 발견한 다섯 개의 소행성 최무선(63145), 이천(63156), 장영실(68719), 이순지(72021), 허준(72059)도 2004년에 승인을 받았고, 홍대용은 2001년 보현산천문대에서 발견하여 2005년 최종 승인. 소행성 이름은 한국과학사에서 ‘명예의 전당’에 오른 과학자 14명을 출생연도 순으로 붙였으며, 김정호(95016), 이원철(99503), 유방택(106817)도 등록되어 있다.- 180쪽
1949년 5월 이문원 등 반민특위위원 세 명이 남로당 연루혐의로 체포되었다. 6월 6일에는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의 지휘하에 50여 명의 경찰이 특위를 습격했다. 6월 중순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노일환, 서용길이 구속되었고, 26일 백범 김구가 피살당했다. 일련의 사건 속에서 급격히 위축된 반민특위는 10월 해체했다. 이후 40여 년 동안 거론조차 되지 못했던 친일청산 문제는 2005년 1월 27일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안’ 공포와 함께 재점화되었다. 특별법을 근거로 2005년 5월 31일 ‘제2의 반민특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고,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발족해 친일파의 재산환수를 시도했으나 여러 반대와 한계에 부딪혔다.
- 188쪽
특별법 제정 당시 김주현 행정부차관은 “조사대상의 후손들이 반발해 국민적 갈등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면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내일신문 편집국장 박태견은 ”‘국민적 갈등’은 친일인맥이 지난 50년간 줄기차게 주장해온 반대논리였다. 하지만 김차관도 시인했듯 진짜 반대이유는 ‘후손들의 반발’이다. 친일후손들은 양의 개념으로 보면 한줌밖에 안 된다. 그러나 기득권이라는 권력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친일연구자 임종국에 따르면, 제1공화국 각료의 34.5%, 제2공화국 각료의 60%가 친일전력자였고, 제3공화국도 비슷한 추세를 보였다.
- 189쪽
당시 한국이 해외입양을 통해서 벌어들인 돈은 매해 2,000~4,000만 달러로 추정된다. 기업이 100만 달러 수출만 해도 훈장을 받던 시절, 정부는 소외계층 자녀를 해외입양 보냄으로써 사회복지 비용을 줄이고, 벌어들인 돈은 경제에 재투자하며 경기르 f부양했다. 한국에 ‘고아수출국’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이유다.
- 231쪽
OECD 회원국으로 ‘격상’된 오늘날까지 한국의 해외입양은 계속 된다. 미국 국무부 통계에 따르면, 2011년 한국은 736명을 미국으로 입양 보내 중국(2,589명), 에티오피아(1,726명), 러시아(970명)에 이어 4위(누적 통계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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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외세의 침략이 계속되면서 조선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살 길을 찾아 떠나는 유민의 수는 점차 증가했다. 땅을 버리고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국경을 넘어 중국 동북 지방(만주)과 러시아, 시베리아 등지로 나아갔다. 수량이 적을 때의 두만강은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만큼 얕았고, 그나마도 겨울철에는 얼어붙는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만주로 향하는 국경경비도 상대적으로 허술했고, 특히 강 건너에는 농사짓기에 적합한 토질의 땅과, 경작에 충분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할 수 있는 평원과 계곡이 위치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 268쪽
방문취업제가 외국인노동자의 가족 동반을 불허하는 상황에서 부모가 한국행을 택한 가정의 이혼율은 25%에 육박한다. ‘한 자녀 갖기 풍조’가 만연하여 신생아수는 10년 전에 비해 1/4로 줄었다. 연변 조선족의 둘째자녀 출생수는 연 900명을 밑돈다. 아이가 없으니 민족학교가 문을 닫고, 민족학교가 없으니 아이를 한족학교에 보내는 악순환 속에서 역사와 언어에 대한 교육도 부실해지고 있다. 2009년 길림성 조선족 언어사용 실태조사를 보면, 초등학생 62.5%, 중고등학생 48%가 한글을 전혀 모른다. 여기에 중국에서 살려면 중국말을 잘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조선족사회 학부모들 사이에 큰 호응을 얻으면서 민족학교와 한글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전망이다.
- 271쪽
김봉섭 재외동포재단 조사연구팀장은 조선족들이 생활터전에서도 돈벌이를 할 수 있도록 산업 인프라를 확충하고, 한국 기업이 동북3성으로 거점을 옮기는 것을 적극 검토하자고 제안한다. 특히 청소년을 위해 언어와 학교교육을 지원하고, 해외체류중인 조선족들이 한인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는 정책을 계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인하대학 정치외교학과 이진경 교수의 말마따나 조선족 대다수가 자신을 ‘중국인’으로 인식하고 있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시도도 잘 먹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전략은 한계를 보인다. 조선족교회 담임목사 서경석은 “이스라엘에서는 피가 1/4만 섞여도 자국인으로 간주하는데 우리는 부모 중 한 명이라도 국적자가 아니면 법적으로 이방인”이라면서 “한족 며느리나 사위에게도 법적·제도적 혜택을 줘 이들을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밖에도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정치적·문화적 해법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상황과 여성과 아이가 없는 현실에서 그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 271쪽
2011년 3월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제조업 생산·기능직의 경우 조선족 근로자가 1% 증가할 때 내국인의 실업전환확률(취업자가 일자리를 잃을 확률)은 0.003%에 불과하다. 삼성경제연구소 최홍 수석연구원은 “조선족 근로자들이 다른 외국인 근로자보다 국내 고용시장을 잠식할 가능성은 높지만 그렇다고 조선족이 점유하던 일자리를 내국인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조선족에 대해 단순히 노동시장 잠식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동포의 법적지위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하는 작업이 선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 273쪽
자살생존자는 미국 자살예방협회가 발간한 『자살유가족을 위한 핸드북』에서 자살한 유가족을 지칭한 것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받는 정신적 충격이 강제수용소 경험과 맞먹는다고 판단하여 붙인 이름이다.
- 280쪽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감내해야 하는 슬픔에 대해 죽음을 방치했다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원망, 혐오감은 자살생존자들을 괴롭힌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자살생존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발화하지 못한다. 서울시 자살예방센터 박재영 사무관은 “유가족 스스로가 도움을 청하고 뭔가 요구하는 게 필요한데 사회적으로 자기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말한다.
- 281쪽
자살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 차는 크다. 태평양전쟁 당시 ‘천황을 위해’ 적함에 돌진하던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 “노동자도 인간”이라고 외치며 산화한 한국의 전태일처럼, 동양에서 자살은 종종 대의명분을 위한 ‘숭고한 자기희생’으로 상찬되었다. 반면 서양은 씻을 수 없는 죄악이자 절대적 금기로 자살을 취급했다. 기독교 사상은 가롯 유다의 죄목 중 예수를 판 것보다 자살에 더 무게를 두었다. 독일의 저술가 게르트 미슐러가 언급했듯 “자살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건만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는 ‘국민 만들기’에 혈안이 된 국가는 이를 금기시했다.”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된 사람을 지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탓이다.
- 282쪽
오랫동안 폭력문제를 연구해온 미국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은 통계를 분석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1900~2007년까지 미국 정부가 발표한 자료를 들여다보았더니 살인과 자살 등 ‘폭력치사’는 늘 함께 증가하거나 감소했으며, 급증하는 시기와 급감하는 시기도 번갈아 나타났다. 폭력치사가 급증한 세 번은 모두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와 겹치며 급감하는 세 번은 모두 민주당 대통령 집권기다. 이 같은 결과는 각 당의 정책에서 기인한다. 공화당이 추구하는 정책은 사람들을 강력한 수치심과 모욕감에 노출시킨다. 열등감과 패배감을 조장하고, 타인을 경멸하도록 부추기며, 불평등을 찬미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상실했을 때, 특히 해고를 당했을 때 극도의 수치와 모멸감을 느끼고, 수치와 모멸감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폭력치사 발생확률이 높아진다. 길리건은 폭력치사의 주요인으로 실업, 불황, 불평등을 꼽으면서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를 일러준다.
- 283쪽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한국의 자살사망자 수는 1만 5,566명이다. 2006년 대비 50% 늘었다.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1.2명으로 OECD 평균자살률(11.3명)의 세 배다. 20대 사망원인의 44.9%가 자살이며 비율은 고령일수록 높아진다. 2009년 노인 자살사망자는 5,051명이고, 75세 이상은 OECD 국가의 약 8.3배다.
- 284쪽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의 핵심은 ‘죽음각인’, 즉 죽음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데에 있다. 살아서 죽음에 이르렀던 자로서 PTSD 환자들은 일상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하다. PTSD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다. 하여 와락의 최우선과제는 ‘일상의 복원’이고, 그 중심에는 ‘밥’이 있다. “엄마가 따뜻한 밥을 해주듯이 기본적인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이 와락의 생각이다.
- 284쪽
18대 대선이 끝나고 이틀 후인 2012년 12월 21일,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 현대중공업 노동자 이운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2일에는 서울인권센터 청년활동가 최경남이, 25일에는 한국외대노조지부장 이호일이 자살했다.
- 285쪽
불안정한 노동은 빈곤을, 빈곤은 해체를, 해체는 고독을, 고독은 다시 가난을 낳는다. 고독사는 결국 가난의 문제이다. ‘고독한 빈곤’은 나이가 많을수록, 남성보다는 여성에게서 더욱 첨예해진다. 노인 1인 가구의 상대빈곤율(중위소득 대비 50% 이하 비율)은 76.6%로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다.
- 295쪽
죽음이 일상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위생관념’이 보편화한 근대 이후였다. 인류는 문명화과정에서 ‘활기찬 삶’의 대척점에 있던 ‘부패하고 냄새나는 죽음’을 위생학적으로 격리하고 제거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죽음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 생활의 배후로 밀려나 악취 없이 신속하게, 죽음의 병상에서 무덤으로 너무도 완벽하게 기술적으로 처리되기에 이르렀다.” 죽음의 고독이다.
- 295쪽
PHS(Pioneer Human Services)의 모토는 패자부활이다. 택배 직원의 평균학력은 초등학교 6학년이고, 영어가 서툴거나 알코올중독에 빠진 사람이 90%다. 이렇게 PHS에서 일하며 기술과 영어를 배우는 이들이 연간 1만 2,000여 명이다. 워싱턴주립대학 연구 결과, PHS를 거친 사람들의 2년 이내 재범률은 6.4%다. 정부의 교정사업 참가자들의 재범률은 23%다. 2006년 PHS 직원을 대상으로 알코올·약물테스트를 한 결과 1.1%가 양성반응이 나왔다. 미국 내 보통 사업장은 4.3%다. PHS의 경영철학은 팀 하로 수석 부회장의 말로 요약된다. “길거리에 나앉은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불균형한 구조의 산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균형을 되찾으려 합니다.”
- 319쪽
2010년 기업의 윤리적 책임을 연구·조사하는 국제적 싱크탱크 그룹 에티스피어 연구소는 윤리적 책임을 가장 잘 이행하고 있는 세계 100대 기업을 선정해 발표했다. 연구소는 연간수익 5,000만 달러 이상, 종업원 100명 이상의 300여 개 기업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20%) △기업 지배구조(10%) △기업 혁신능력 및 시민사회에 대한 공헌도(15%) △법률 준수여부 및 범죄기록 유무(20%) △윤리경영 프로그램 실시여부(15%)등 총 일곱 개 항목의 평가기준을 적용했다. 한국 기업은 단 한 곳도 선정되지 못했다.
- 323쪽
프랑스혁명은 정치혁명이자 교육혁명이었다. 1792년 철학자 콩도르세가 작성한 새로운 교육에 대한 보고서는 “진정한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 정치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교육”을 명시하는 한편, 헌법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개선하고 내면화할 수 있는 시민교육을 장려했다. 축제와 모임을 교육의 장으로 이용하고, 연대와 참여, 권리를 강조한 ‘평생시민교육’의 개념도 이때 고안되었다. 혁명정부의 교육제도는 당대에 이렇다 할 효과를 보지 못했다.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여 헌법을 제정하면서 역사는 퇴보하는 듯했다. 하지만 시민으로서 활동할 권리와, 그런 활동에 대한 기대를 내용으로 하는 시민권이라는 혁명적 원칙은 프랑스 정치와 문화에 흡수되었다. 정치와 교육의 상관관계에 대한 인식도 공고해졌다. 이러한 성취는 제3공화국 교육개혁의 근간이 되어, 19세기 말 시민교육은 프랑스 학교의 항구적인 현실로 뿌리내렸다.
- 331쪽
프랑스혁명 정신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오늘날 국가와 권력, 민주주의와 시민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시민교육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청소년 탈선과 극심한 인종차별 문제에 시달렸던 영국은, 곰인형 테디베어를 이용한 ‘서클타임’을 학교수업으로 채택하여 배려와 민주적 의사소통 방식을 가르치고 있다. 재야에서는 누구나 토론과 학습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식인과 학자들이 장을 만든 ‘천막대학’을 운영한다. 스웨덴의 시민들은 평균 2~3개의 크고 작은 소모임에서 활동하며 가장 작은 단위에서의 민주주의를 직접 실천한다. 독일은 ‘나치 전체주의’를 거울삼아 어릴 때부터 자신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수용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다원적 민주주의를 교육하고 있다. 10대 정치인과 20대 학생의원은 독일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 332쪽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정권은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다. 철학자 박종홍이 기틀을 잡았고 ‘반공’과 ‘민족중흥’을 키워드로 하여,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를 양 날개로 삼은 박정희 정권의 이념과 직렬 연결했다. 국민교육헌장은 전국의 학교에 배포되어 교무실과 교실 앞에 내걸렸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서 학교는 국민교육헌장에 따라 학생들에게 멸사봉공의 자세로 국가에 충성할 것을 강요했다. 식민지시대교육시스템으로 획일주의의 상징이었던 교복과 교모, 삭발은 체제순응을 규율하는 기본수단이 되었다. (...) 발표 직후부터 “천황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고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강요했던 일제의 ‘교육칙어’를 그대로 본떴다”는 비판이 거셌던 국민교육헌장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폐기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수월성과 능률’에 초점을 맞춰 교육을 시장논리로 풀겠다는 내용의 ‘5·31 교육개혁’을 선언했다.
- 333쪽
다니엘 파울 슈레버가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으로 무너져가는 편집증자의 내면을 가시화한 것처럼, 『어느 자폐인 이야기』에서 그랜딘은 보통사람들과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독해하는 자폐인의 내면을 기술한다. 교회 가기 전 머리감기가 쇠골무로 문지르는 것처럼 싫었던 기억, 속옷 봉제선이 핀처럼 살갗을 찔렀던 느낌,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제트기 이륙하는 소리처럼 귀청을 뚫고, 전화벨 소리가 생각을 토막내고, 두 사람 이상이 하는 말은 이해할 수 없기에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이 짜증스럽던 심경. 자폐인의 언어, 사고, 감각체계를 설명하는 그랜딘의 덤덤한 자기고백은, ‘제멋대로 구는, 소통불능의,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자폐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다른’ 것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 342쪽
어린 시절 훈데르트바서의 운명을 이끈 건 ‘유대인’이라는 혈통이었다. 1929년 아버지가 전쟁중 사망한 후 유대인 어머니와 유년기를 보낸 훈데르트바서는,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면서 오베르 도나우스트라세에 있는 외가로 강제이주된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정책에 따라 외할머니와 친척 69명이 몰살당했다. 훈데르트바서 모자는 게토에 격리되었다. 게토를 둘러싼,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무채색 수직건물, 그 틈새를 기어이 비집고 자라는 푸르른 식물에서 훈데르트바서는 자연과 생명의 경이로움을 보았다. 직선에 반대한 건축가, 순환의 나선형을 사랑한 미술가, 자연보호에 앞장선 생태주의자 훈데르트바서의 철학적 출밤점이다.
- 3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