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운 날 보리 어린이 25
오승강 지음, 장경혜 그림 / 보리 / 2012년 10월
장바구니담기


재운이 소풍날

누나가 아파
병원 가느라
도시락도 못 가져가는 소풍날.

먹을 것이라도
많이 사 먹으라고
어머니가 주신 돈 오천 원.

가만히 계산해 보자.
백 원짜리 과자는 오십 개
이백 원짜리 과자는 스물다섯 개
배가 터질 것 같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재운이 산 것
백 원짜리 공책 스무 권
천 원짜리 연필 두 다스
오십 원짜리 지우개 스무 개.

모두 제 먹을 것만
가방에 가득 싸
어깨에 메고 줄지어 선
아이들 사이에

먹고 싶은 것 참고
우리 반 아이들에게 줄 학용품을 들고
기쁜 얼굴로 서 있는
도움반 아이
재운이 소풍날.-22쪽

다시 옮긴 교실

다 낡아
바람 숭숭 들어오는
슬레이트 교실.

겨울날
우리 교실에
어느 어른 다녀가신 뒤
교무실 옆
새로 지은 교실로 이사 갔다가

봄이 오자
비워 둔 옛날 교실
다시 옮겨 왔어요.

새로운 동무 두 명
함께 왔어요.

새로 지을
새 교실에
들어가기 위해

이곳에 다시 왔다
선생님은 말했어요.

말하는 선생님 얼굴
슬퍼 보였어요.

그러나 우리는 만세를 불렀어요.
유치원과 우리 교실만 있는
외딴 교실.

마음대로 놀 수 있어 좋았어요.
눈치 보지 않고
소리 지르며
뛰어놀 수 있어 좋았어요.-25쪽

내가 미운 날

내가 술래일 때
아이들은 재미있게 놀다가도
저희들이 술래 되면
나를 바보라고 놀리며
술래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정말 바보처럼
히히 웃고 말지만
참지 못하고 울고 달려들 땐
되레 저희들이 울며 집에 갑니다.

내가 더 많이 맞었어도
바보 자식이 남의 아들 때렸다고
아주머니들은 우리 집에 달려와서
우리 엄마까지 울려 놓고 갑니다.

그런 날 엄마는
내 등 어루만지며 섧게 웁니다.
너는 아무 죄 없다며
다 내 죄라시며 섧게 웁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우리 엄마 정말 죄 없습니다.
놀려도 끝까지 참지 못한 내가 죄 있습니다.
끝까지 참지 못한 내가 밉습니다.-46쪽

걱정

아침에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낯선 사람이 너희에게
과자 사 준다고 따라오라면
어떻게 할래?"

모두가 안 따라가겠다 하는데
수정이는 따라간다 합니다.
과자 먹고 싶어 따라간다 합니다.

"수정아, 따라가면 집에 못 온다.
엄마 아빠 못 본다."
따라가면 안 된다고
선생님과 우리들이 아무리 말려도

"그래도 간다. 그래도 간다."
가겠다고 울면서
수정이는 말합니다.
악을 써 가며 말합니다.

우리는 걱정이 되어
정말 걱정이 되어
공부가 끝난 뒤
줄을 지어 집에 갔습니다.
수정이 앞세워 함께 갔습니다.-51쪽

수정이 저만 아는 말

수정이 학교에서 하는 말은
네 가지밖에 없다.
네 가지 말
하지 않고 아껴 둔다.

동무가 울고 있을 때
동무가 저를 귀찮게 할 때

수정이 저만 아는 말
아껴 둔 말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다.

메타비타 주세요
치이토오스
죽도시장
태엑시.

수정이 아껴 둔 네 가지 말
무슨 암호와도 같은
저만 아는 말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온다.-74쪽

아무도 쓰지 못한 이름

아침 자습 시간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름을
적어 내도록 하셨다.

그러나 나는 쓰지 못했다,
할아버지 이름도
할머니 이름도.

옆을 둘러보니
경식이도 아름이도
연필을 쥐고
겸연쩍게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외국 가수들 이름은
노래만 들어도
척척 알아맞힐 수 있는데

야구 선수들 생일도
이름만 대면
척척 대답할 수 있는데

우리들은 아무도 몰랐다.
자기 할아버지 이름은
자기 할머니 이름은.

시험지를 모아 쥔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씁쓸한 얼굴로
우리들 얼굴을 바라보셨다.

무슨 말씀이라도 하실 듯한
선생님 얼굴을 보며
우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꾸만 얼굴을 감추고 싶었다.-10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