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로이드 전쟁 - 황색 언론을 탄생시킨 세기의 살인 사건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13년 4월
품절


호리호리한 헝가리 출신 이민자인 퓰리처는 남북전쟁 때 북군에 입대해, 셰리든 장군이 승리로 이끌었던 셰넌도어 계곡 전투에 기병으로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뉴욕으로 흘러들어왔다. 지금 신문사가 있는 이 자리에 원래는 프렌치 호텔이 있었는데, 무일푼 퇴역 군인이었던 퓰리처가 이 호텔에서 쫓겨난 일이 있었다. 20년 뒤 서부에서 부자가 되어 돌아온 퓰리처는 복수라도 하듯 호텔을 밀어 버리고 바로 그 자리에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세웠다. 퓰리처 소유의 건물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인쇄실을 떠받치는 데 들어간 연철 기둥이 3km가 넘었다. 퓰리처는 425t짜리 거대한 금색 돔지붕 아래 꼭대기 층 안에 사무실을 설치했다. 도금을 한 퓰리처의 건물 표면은 수km 떨어진 바다에서도 보였다. 그래서 미국으로 이민오는 사람들이 신대륙에서 처음으로 보는 광경은 자유의 여신상이 아니라 퓰리처의 금빛 건물이었다. 퓰리처는 집무실을 프레스코화와 가죽 벽판으로 장식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퓰리처의 집무실을 처음 들어온 손님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외칠 정도였다. "여기는 신을 모신 곳인가?"
-33쪽

퓰리처보다 한 세대 아래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퓰리처와 정반대 인물이었다. 허스트는 젊고, 미국 본토박이고,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이자 광산왕의 아들이었다. 허스트는 20달러짜리 순금 넥타이핀부터 해서 딱 보기에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하버드에 다닐 때 학문보다는 신문사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가 교수들한테 교수의 초상화가 새겨진 요강을 선물하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허스트는 타고난 신분에 걸맞지 않게, 새로 출범한 <월드>에 프리랜서 기자로 들어가서 신문사가 돌아가는 것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허스트는 퓰리처가 신문을 이용해 돈을 버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발명해 냈다고 생각했다.
-53쪽

언론가 사람들도 이런 변화에서 아이러니를 느꼈다. 퓰리처는 <선>의 옛 동료들을 ‘공룡’이라고 공격하면서 재산을 모았고, 그다음에 마찬가지로 명망 높은 신문인 제임스 고든 베넷의 <뉴욕 헤럴드>보다 낮은 가격으로 신문을 내놓아 <뉴욕 헤럴드>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런데 이제 <월드>에서 수련을 받은 허스트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89쪽

"남편이 보았어요." 여자가 계속 주장했다.
당연히 보았겠지. 마틴 손은 사방에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다. 아지랑이처럼. 벌써 마틴 손을 닮은 수상쩍은 사람이 둘이나 잡혀 왔다. 알고 보니 진짜 범죄자였다. 한 사람은 루이빌에서 횡령을 하고 도망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잠자는 제이크"라고 불리는 브루클린의 사기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둘 다 마틴 손은 아니었다. 저지시티 공동묘지에서 산을 삼키고 공통스러워하다 사망한 사람이 있었다. 그건 틀림없이 마틴 손일 거다. 하지만 노장 연극배우 조지 빈이 스태튼아일랜드에서 요트를 타다가 발견한 시신은? 가까이에서 총을 맞아 얼굴이 날아간 시체였다. 신문들은 이렇게 물었다. 이게 마틴 손인가?
-133쪽

"난 구경거리가 아니에요." 낵 부인이 여간수에게 쏘아붙였다. "날 구경할 수는 없다고 말해줘요. 난 전시물이 아니라고."
그러다가 낵 부인은 다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저널>과 에덴 박물관이 사건을 가지고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뭔가? 박물관에서 입장료로 50센트를 받는다니, 낵 부인은 시물감에서도 가격에서도 박물관을 누를 수 있었다.
"잠깐만요." 낵 부인은 자리를 뜨려는 여간수를 불렀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와서 구경하라고 해요. 한 사람당 25센트를 낸다면요."
오거스터 낵은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174쪽

정말 머리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양배추가 나왔다.
우드사이드에서 다른 아이는 총알구멍이 난 갈색 중산모를 발견했다.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수천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우드사이드 수풀을 뒤졌을 때 왜 이런 증거물들을 찾아내지 못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유물들을 만들어냈다는 혐의가 허스트와 퓰리처의 기자들에게 돌아갔다.
-177쪽

낵 부인은 금세 생존법을 터득했다. 낵 부인은 단순한 전략을 통해 감옥에서 여왕이 되었다. 호기심에 찾아온 사람들과 팬들에게 25센트씩을 받아 그 돈으로 커피와 빵을 사서 다른 죄수들에게 돌렸다. 좋은 변호사를 만나는 것을 제외하고 툼스 교도소의 여죄수들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은 오거스터 낵 가까이에 깃드는 것이었다.

-180쪽

구출작전은 합법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허스트는 언제나 한계를 넘어섰다. 뉴스를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는데 왜 그냥 보도만 하고 있겠는가?

-213쪽

이제 뉴욕 신문들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범죄와 사건 사고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저널>에는 유혈이 낭자한 기사와 여성들의 관심사, 만화들 때문에 경제, 노동, 종교 기사는 아예 발 들여 놓을 틈이 없었다. 허스트는 독자들을 알았고, 독자들이 무얼 좋아하는지 알았다.

-280쪽

6월 어느 더운 날 이 사건의 문을 연 것도 이스트 강가에서 놀던 아이들이었다. 다섯 달이 지난 겨울날 어두운 법정 안에서, 다른 아이가 그 문을 닫아 버렸다.

-313쪽

<이브닝 저널> 삽화가는 옆에 서서 그 장면을 부지런히 펜과 잉크로 스케치했다.
"안 들어가." 동료 한 사람이 일러주었다. "그렇게 큰 종이는 새가 못 날라." 삽화가는 자기 실수를 깨닫고 얼른 종이 한가운데를 반으로 잘랐다. 비둘기 두 마리에 반쪽씩을 실어 강 건너편으로 보냈다.
-315쪽

"법으로 사후에 시신을 해부하게 되어 있다. 사실 그게 형벌의 일부다. 시신 해부로 사인을 밝히는 것도 아니고 과학 발전에 도움이 되라고 하는 것도 아니니, 해부의 목적이 처형을 완결하기 위한 것임이 명백하다." 오닐 박사는 이렇게 썼다.

-359쪽

"이미 한 여자가 감당하기에 넘치는 고통을 받았어요." 낵 부인은 흐느끼며 가방을 든 채로 복도에 주저앉았다. "대체 지난 과거에서 뭘 얻으려고 그러는 거지요?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나요?"
하지만 바로 다음날, 오거스터 낵은 과거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를 팔겠어요." 오거스터 낵이 <뉴욕 타임스> 사무실에 당당하게 걸어 들어와 말했다. "당신네 신문사에서 얼마를 줄 수 있나요?"
유감스럽게도 <타임스>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고 낵 부인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물론 <저널>은 그런 식으로 일했다.
-377쪽

<저널> 초기에는 전쟁 개전 정도 되는 소식이라야 이런 거대한 활자를 조판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세기에는 날마다 전쟁이고 날마다 충격이었다. 이번 주 어떤 신문은 이렇게 소리를 높였다. 건물 붕괴 : 40명 사망. 이런 것도 있었다. 유니언 광장에서 여자가 남자를 죽이다.
-378쪽

그래도 <월드>는 자발적으로 선정주의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조지프 퓰리처로서는 허스트의 공격적 마케팅에 허덕허덕 끌려다니는 게 늘 못마땅했었다. 말년에 퓰리처는 <뉴욕 타임스>의 냉철한 신뢰성 쪽으로 끌렸다. 1911년 사망한 뒤에 퓰리처는 역사적 기억 속에서 새롭게 탄생했다. 황색 언론 전쟁은 잊히고, 컬럼비아 대학에 재산을 기부하고 작가와 기자들에게 주는, 그의 이름이 들어간 상이 제정되어 장밋빛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허스트는 반성할 줄 몰랐다.
-390쪽

그렇지만 허스트가 정신적 대부인 퓰리처에 도전했고, 퓰리처는 <헤럴드>의 제임스 베넷을 배신했던 것과 똑같이, 이번에는 허스트가 뒤통수를 맞았다. 그 주인공은 허스트가 중국 통신원으로 고용했던 시카고 청년 조지프 패터슨이었다. 패터슨은 1919년 <뉴욕 데일리 뉴스>를 창간하여 신문 저널리즘의 판돈을 또 한차례 올렸다.
-391쪽

언론왕의 자산이 수십 종의 신문으로 확장되며 허스트는 신화적 인물로 자라났다. 영화 <시민 케인>이 바로 허스트를 모델로 한 것이다.
-391쪽

"제 책을 갖다 주세요." 마틴이 철창 너머 간수에게 호소했다. 그날 오전 마틴이 불안한 기색을 보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간수가 책 무더기를 새 감방으로 옮겨 주자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제 친구예요."-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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