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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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갖기 위한 질주를 이제는 멈춰야할 때- 20쪽

가자 지구에 그려진 그림 울타리 너머 평화의 세상을 꿈꾼다.- 29쪽

창조, 그리고 저항!
창조경제가 아니라......- 39쪽

세계인권선언- 42쪽

철조망을 꼭 쥔 손. 울컥 치미게 하는 사진이다.- 51쪽

마땅히 분노하라. 분노해야할 것에...- 88쪽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1948년 세계 인권 선언이 구체적으로 실천방안까지 명시한 이 권리는 보편적인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누구라도 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 15쪽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 22쪽

하마스가 이스라엘 스데로트 시에 로켓포를 발사하면 효과가 있는가? ‘없다’가 답이다. 그런 행동은 포를 쏜 쪽의 대의명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자 지구 주민들의 이런 몸짓을 보고 격분에 의한 행동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다.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를 ‘격분’이라고 한다면, 폭력이란 도저히 용납 못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내린 유감스러운 결론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이해한다면, 테러리즘이 격분을 표출하는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격분은 부정적 표현이다.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 되며, 어쨌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희망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우에, 격분 탓으로 그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 30쪽

사르트르는 1947년에 이렇게 썼다.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이든, 폭력이란 일단 실패라는 사실을 나는 수긍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실패다. 왜냐하면 우리는 폭력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에 의거하는 행위 자체가 자칫 폭력을 영속화할 수 있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폭력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나는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 더 확실한 수단이라고.

- 32쪽

서양인들의 ‘생산 위주의 사고방식’은 세계를 위기로 이끌었으며, 그 위기로부터 탈출하려면 ‘항상 더 많이’ 라고 외치며 앞으로만 질주하는 태도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이러한 질주는 비단 금융 분야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윤리, 정의, 지속가능한 균형의 문제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때다. 더없이 심각한 위험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위험으로 말미암아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려, 인류가 시도하는 모든 일들이 영영 종말을 고할 수도 있다.

- 35쪽

그러나 1948년부터 중요한 발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식민지의 독립, 인종차별 철폐, 소비에트 제국의 궤멸,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이 바로 그런 예다. 반면 21세기 첫 10년은 퇴보의 시기였다. 나는 이 퇴보의 원인 중 일정 부분은 조지 부시가 미국 대통령이 된 것, 9.11사태, 그 결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 같은 재앙들이 발생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었으면서도 새로운 발전정책을 도입하지 못했다. 또한 지구온난화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열린 코펜하겐 정상회의는 진정으로 지구를 지키는 정책을 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 첫 10년의 끔찍한 공포와 앞으로 다가올 10년의 가능성 사이, 그 문턱에 서 있는 셈이다. 그래도 어쨌든 희망은 간직할 일이다. 1990년대는 이런 면에서 대단한 진보의 원천이었다. - 37쪽

유엔은 리우 환경회의(1992), 베이징 여성회의(1995) 등을 소집했고, 2000년 9월에는 코피 아난 사무총장의 주도하에 191개 회원국이 ‘발전을 위한 새천년(21세기) 8개 목표’를 채택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191개 회원국들은 특히 앞으로 2015년까지 전 세계의 빈곤을 절반으로 줄이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 38쪽

8. 비폭력 원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 작은 책의 내용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비폭력에 대한 호소’입니다. ‘저항해야 한다’는 말은 내 마음속 생각을 100%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는 혁명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혁명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고, 그 혁명들은 대개 안 좋은 방향으로 귀결되곤 했습니다. 나는 호소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개혁하자고. 폭력은 거부해야 합니다. 우선,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래야 합니다. 폭력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증오만이 더욱 깊이 뿌리내리며 복수심이 더욱 불타오를 뿐입니다. 폭력은 폭력의 악순환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미래로, 희망으로 향한 문을 닫아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책에도 썼듯이 제가 보기엔, 혹시 폭력적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희망뿐입니다. 이 책에 제가 좋아하는 시인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했지요.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라고.
- 64쪽

하지만 꼭 알아두십시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참 어려운 구축 작업입니다.
- 65쪽

(조국) 분노는 삭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삶의 지혜가 널리 퍼져 있는 한국 사회에서 “분노하라!”라는 직설적·선동적 메시지는 생경하게 들릴 수 있다. ‘마음공부’를 통하여 수시로 심화(心火)를 직시하고 가라앉히는 것의 중요함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음공부’가 공분‘과 ’의분‘의 불씨를 마음속에서 꺼버리는 것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화의 뿌리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일 때는 그 공적인 원인을 해결할 때만 화는 사라진다. 사실 세상의 진보는 불의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하지 않았던가. 시민이 세상일에 관심을 끓거나 냉소를 보내면서 각자도생의 길을 걸을 때 세상의 불의는 승승장구하며 확대 재생산되기 마련이다.
- 71쪽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오만가 횡포, 불법과 탈법을 감시하고 비판하자. 단호하게 그리고 발랄하게. 또한 무조건 투표하자. 투표하지 않는 자는 “암묵적인 찬동자”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현재의 상태를 묵인, 방조하겠다는 의사의 다른 표현이다.
어떤 이는 ‘중용’과 ‘중도’를 조언한다. 자신의 사유와 행동을 성찰하고 반대편과 소통하고 그 입장을 존중하고 공유점을 확보하는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과 직결되는 가치와 정책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기계적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은 말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존F. 케네디 역시 단테의 신곡을 재해석하며 말한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현실에 대한 냉소, 무관심, 거리두기만으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 바꾸기에 나서자.
- 79쪽

(옮긴이의 말)
‘스펙’ 쌓기에 여념 없는 젊은이들아, 결코 제 앞가림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당장 자기 집 앞길만 쓸어놓고 만족하거나 길 넓히는 데만 골몰하는 동안 울타리 바로 너머에 어떠한 재앙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그 재앙의 화근에 분노하라는 것이다.
- 81쪽

레지스탕스 정신은 먼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그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레지스탕스’는 동사 ‘저항하다’의 명사형이다. 분노할 실마리를 잡아서 분노할 줄 알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저항할 줄 알되, 마음속에는 비폭력의 심지를 곧게 세우고 참여하여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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