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병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25쪽
광장
빛 하나 들여보내는 창(窓)이면 좋았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37쪽
지금은 우리가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40쪽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어뜨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워 있다- 41쪽
유월의 독서
그림자가
먼저 달려드는
산자락 아래 집에는
대낮에도
불을 끄지 못하는
여자가 살고
여자의 눈 밑에 난
작고 새카만 점에서
나도 한 일 년은 살았다- 42쪽
호우주의보
발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꼭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44쪽
환절기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틀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49쪽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55쪽
옷보다 못이 많았다
그해 윤달에도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았다 주말에는 파주까지 가서 이삿짐을 날랐다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57쪽
천마총 놀이터
놀이를 놀이이게 하고 겨울을 겨울이게 하는 놀이터에 봄이 와도 너는 오지 않았으니 나는 풀어놓은 아픈 말들을 한데 몰아 노트에 적는 놀이를 시작했다 흙이 흙을 낳고 말이 새 말을 하는 놀이, 그 말을 자작나무 껍질에 옮겨 적지 않아도 되는 놀이, 흙에 종이를 묻는 놀이- 72쪽
낙서
봄의 왼편은 겨울 같고
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76쪽
저녁-금강
해를 등지고
다음 생의 이름을
점쳐보는 저녁
당신의 슬픈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빛이 주저앉은 길 위에는
물도 하릴없이 괴어들고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78쪽
문병-남한강
아무 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수면(水面)은
새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래된 물길들이
산허리를 베는 저녁
강 건너 마을에
불빛이 마른 몸을 기댄다- 80쪽
눈을 감고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82쪽
입속에서 넘어지는 하루
길눈이 어두운 겨울이나
사람을 잃은 사람이
며칠을 머물다 떠나는 길
떠난 그 자리로
가난한 밤이 숨어드는 길
시래기처럼 마냥 늘어진 길
바람이 손을 털고 불어드는 길
사람의 이름으로
지어지지 못하는 글자들을
내가 오래 생각해보는 길
골목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림자로 남고
좁고 긴 골목의 끝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다 지새워지는 길
달이 크고
밝은 날이면
별들도 잠시 내려와
인가(人家)의
불빛 앞에서
서성거리다 가는 길
다 헐어버린 내 입속처럼
당신이 자주 넘어져 있는 길- 1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