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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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병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25쪽

광장

빛 하나 들여보내는 창(窓)이면 좋았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37쪽

지금은 우리가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40쪽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어뜨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워 있다- 41쪽

유월의 독서

그림자가
먼저 달려드는
산자락 아래 집에는

대낮에도
불을 끄지 못하는
여자가 살고

여자의 눈 밑에 난
작고 새카만 점에서
나도 한 일 년은 살았다- 42쪽

호우주의보

발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꼭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44쪽

환절기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틀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49쪽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55쪽

옷보다 못이 많았다

그해 윤달에도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았다 주말에는 파주까지 가서 이삿짐을 날랐다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57쪽

천마총 놀이터

놀이를 놀이이게 하고 겨울을 겨울이게 하는 놀이터에 봄이 와도 너는 오지 않았으니 나는 풀어놓은 아픈 말들을 한데 몰아 노트에 적는 놀이를 시작했다 흙이 흙을 낳고 말이 새 말을 하는 놀이, 그 말을 자작나무 껍질에 옮겨 적지 않아도 되는 놀이, 흙에 종이를 묻는 놀이- 72쪽

낙서

봄의 왼편은 겨울 같고
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76쪽

저녁-금강

해를 등지고
다음 생의 이름을
점쳐보는 저녁

당신의 슬픈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빛이 주저앉은 길 위에는
물도 하릴없이 괴어들고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78쪽

문병-남한강

아무 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수면(水面)은
새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래된 물길들이
산허리를 베는 저녁

강 건너 마을에
불빛이 마른 몸을 기댄다- 80쪽

눈을 감고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82쪽

입속에서 넘어지는 하루

길눈이 어두운 겨울이나
사람을 잃은 사람이
며칠을 머물다 떠나는 길

떠난 그 자리로
가난한 밤이 숨어드는 길

시래기처럼 마냥 늘어진 길

바람이 손을 털고 불어드는 길

사람의 이름으로
지어지지 못하는 글자들을
내가 오래 생각해보는 길

골목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림자로 남고

좁고 긴 골목의 끝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다 지새워지는 길

달이 크고
밝은 날이면
별들도 잠시 내려와

인가(人家)의
불빛 앞에서
서성거리다 가는 길

다 헐어버린 내 입속처럼
당신이 자주 넘어져 있는 길-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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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4-29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는 '지금은 우리가' 참 마음에 듭니다.
즐겁고 행복한 한 주 되세요.^^

마노아 2013-04-29 12:23   좋아요 0 | URL
좋은 시가 많았어요. 밑줄긋기에 사진 넣기가 되니까 이런 부분은 편해졌어요.
글이 많을 때는 찍어서 올리는 거죠. 하하핫.^^
후애님도 한주 즐겁게 시작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