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 3번 안석뽕 - 제17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 수상작(고학년) 창비아동문고 271
진형민 지음, 한지선 그림 / 창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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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떡집이 싫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석뽕이가 싫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건 아버지 엄마 탓이 아니라 전부 다 한석봉 어머니 탓이다. 따지고 보면 떡과 석봉이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처음 만든 건 바로 그 아줌마 아닌가. 바느질이나 다림질이나 암튼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떡을 썰겠다고 고집을 피울 건 뭔가. 거기다 불까지 다 꺼 놓고 칼질을 하다니, 어린애 앞에서 공포 영화 찍을 일 있나? 하여간 지금이나 옛날이나 엄마들은 애들 공부시키려고 별짓을 다 한다.-28쪽

시장통 아이들은 학교 끝나고 가게에 들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돈이 필요할 때만 가고 보통은 곧장 학원에 가거나 집 근처로 가서 논다. 어릴 때는 멋모르고 시장을 들락대지만 4학년만 되면 저절로 안 그러게 된다. 학교에서 부모님 직업을 써내라 할 때도 그냥 '사업'이라고만 쓴다. 그 사업이란 것이 문덕시장 '옛날족발집'이거나 '남해수산물매장'이거나 '사철과일도소매'라는 사실을 꼬치꼬치 다 밝히는 애는 없다.-33쪽

한 가지 좀 신기했던 건 공부 지긋지긋하다던 애들이 입만 열면 공부 얘기를 꺼낸다는 사실이었다. 성적 나쁜 게 창피해서 공부 까짓것 너나 하라고 오기를 부렸을 뿐, 속으로는 이렇게나 공부 걱정을 하고 있었나 보다.
-57쪽

여자애들은 얼굴이 잘생기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춤을 잘 추거나 최소한 축구 할 때 골이라도 몇 번 넣어 줘야 알은척을 하고 말도 걸어온다. 이도 저도 아닌 남자애들은 교실 구석에 세워 놓은 대걸레랑 똑같은 신세다. 대걸레한테 관심을 갖거나 말을 붙이는 사람은 없다. 대걸레는 그냥 청소 시간에 청소만 잘하면 된다. -58쪽

드디어 내게도 곰이 필요한 때가 찾아왔다. 나는 거봉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입이 무거운 곰 두 마리를 불러다 내 양옆에 한 마리씩 앉혀 두고 곰곰이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125쪽

고경태와 방민규가 연설을 하는 동안 나는 단상 위 후보자석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 자리는 언제나 강당 저 아래쪽 나란히 맞춰 서 있는 수십 개의 줄 어디쯤이었다. 거기서 누군가의 구령에 맞춰 똑바로 줄을 서거나 누군가의 지휘에 맞춰 애국가를 부르거나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몸을 비트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런데 단상 위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아주 달랐다. 작은 퍼즐 조각들이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가 어느 순간 큰 그림으로 완성되는 걸 내려다보는 느낌이랄까. 조각조각인 우리들이 다 모이면 이런 그림이 되는구나, 하는 걸 나는 난생처음 깨달았다.-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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