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밭에서 - 가난한 농사꾼의 노래
박형진 지음 / 보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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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절염 2
-콩밭 김

아직 멀었지
한 방울의 이슬을 얻기 위해
달팽이는 온 우주를 등에 지고
새벽을 향해 밤새
배밀이를 하는데

앉았다가 섰다가
두 발이다가 세 발이다가
끊어진 지렁이처럼 뒹굴며 기는
네 발의 이 무릎걸음은

아직 멀었지
해는 신음처럼 달아올라
팔 다리 어깨 허리, 붙잡힌 육신은
이미 너의 것
뜨거운 고통만이 차라리 희열인 채
밭둑은 저 멀리
천 리도 더 남았어
-20쪽

꼭 한 번은

꼭 한 번은 콩밭에서 하고 싶어
칠칠이 우거진 콩밭 고랑
아내와 내가 김을 매다가
꼭 한 번은 콩밭에서 하고 싶어
나는 장난스레 옆구리를 찔렀네
우리 한번 하고 하자 응?
아내는 뚱한 표정
뭔 소린지 처음에는 몰랐나 봐
보는 사람 없을 때 한 번만 응?
그제사 내 등을 꼬집으며 이 사람
미쳤어 미쳤어 한마디
하지만 나 어릴 적 어머니
저 밭뚝 감나무 그늘 밑 콩밭 매다 땀 들이실 때
아버지 옆에 앉아 다정하게 구셨다네
그래서 내가 생겼는지도 몰라
아마 그런 건지도 몰라
콩들도 낯 붉히며
우리도 어서 익자 어서 익자
지들끼리 속삭였는지도 몰라
-28쪽

함성

콩 한 말이 땀 한 말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콩밭 고랑
태울 듯한 햇빛 속에 김을 매면
뚝뚝뚝 떨어지는 땀과 눈물

콩 한 말이 눈물 한 말이다
우리 아버지의 그 아버지
또 그 할머니의 할머니까지
콩 한 말이 한숨 한 말이다

콩 한 알의 땀!
콩 한 알의 눈물!
콩 한 알의 한숨이

수천수만 알의 아우성으로 한 말이다

-33쪽



쌀을 팔아다 쌀독에 부어주는 일은
뭔가 항상 가슴 벅찬 일이다
사십 킬로그램 한 가마면 팔만 이천 원
우리 식구 달포 먹을 양이다
논농사는 지어온 지 이제 십 년이 되지만
상환료 갚느라 쌀은 다 돈사야 하고
일 년 열두 달
다시 빚일 수밖에 없는 돈으로
이렇게 한 가마씩 팔아먹어야 되는 일
아랫니 빼서 윗니 박는 꼴이다
그 희디흰 쌀이 방앗간에서 다
팔려 나갈 때
나는 기껏 손으로 한 줌을 쥐어 본다
일 년의 수고가 주마등처럼 손안에 잡혔다가
스르르 스르르 힘없이 빠져나가면
나는 또 기껏 자투리 쌀이나 몇 킬로 혹은 몇십 킬로
집으로 가져와 쌀독에 붓지 않고
"농사지은 것잉게 밥인 한 끼 하소."
아내에게 쌀을 건낼 땐 눈물이 난다
쌀 한 톨 줄 수 없는 형제들 얼굴이 스친다
이번에도 설을 앞두고 쌀은 떨어졌다
며칠을 두고 눈은 쌀밥처럼 내리지만
어찌할꺼나 헤치고 나갈 수 없는 이 안타까움을
어찌어찌 겨우 한 포 구해다 부려놓고
쏟지 않고 부러 한 됫박씩 빈 쌀독에 부어 보는데
그 흰쌀이 더없이 곱다
내 비록 빚 중에 들어도 이 밥해서 상에 받쳐
어머니 살아계시면 얼머나 좋으냐마는 방 안에선
설이라고 내려온 새끼들 소리만 우당탕
-54쪽

이팝

부러진 가지 하나
갈라진 속살 틈에서도

저 소스라치는 환희와
몸 떨리는 푸른 각오

피워 올리는구나 나무여
이 깜깜한 세상 향해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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