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절염 2 -콩밭 김
아직 멀었지 한 방울의 이슬을 얻기 위해 달팽이는 온 우주를 등에 지고 새벽을 향해 밤새 배밀이를 하는데
앉았다가 섰다가 두 발이다가 세 발이다가 끊어진 지렁이처럼 뒹굴며 기는 네 발의 이 무릎걸음은
아직 멀었지 해는 신음처럼 달아올라 팔 다리 어깨 허리, 붙잡힌 육신은 이미 너의 것 뜨거운 고통만이 차라리 희열인 채 밭둑은 저 멀리 천 리도 더 남았어 -20쪽
꼭 한 번은
꼭 한 번은 콩밭에서 하고 싶어 칠칠이 우거진 콩밭 고랑 아내와 내가 김을 매다가 꼭 한 번은 콩밭에서 하고 싶어 나는 장난스레 옆구리를 찔렀네 우리 한번 하고 하자 응? 아내는 뚱한 표정 뭔 소린지 처음에는 몰랐나 봐 보는 사람 없을 때 한 번만 응? 그제사 내 등을 꼬집으며 이 사람 미쳤어 미쳤어 한마디 하지만 나 어릴 적 어머니 저 밭뚝 감나무 그늘 밑 콩밭 매다 땀 들이실 때 아버지 옆에 앉아 다정하게 구셨다네 그래서 내가 생겼는지도 몰라 아마 그런 건지도 몰라 콩들도 낯 붉히며 우리도 어서 익자 어서 익자 지들끼리 속삭였는지도 몰라 -28쪽
함성
콩 한 말이 땀 한 말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콩밭 고랑 태울 듯한 햇빛 속에 김을 매면 뚝뚝뚝 떨어지는 땀과 눈물
콩 한 말이 눈물 한 말이다 우리 아버지의 그 아버지 또 그 할머니의 할머니까지 콩 한 말이 한숨 한 말이다
콩 한 알의 땀! 콩 한 알의 눈물! 콩 한 알의 한숨이
수천수만 알의 아우성으로 한 말이다
-33쪽
쌀
쌀을 팔아다 쌀독에 부어주는 일은 뭔가 항상 가슴 벅찬 일이다 사십 킬로그램 한 가마면 팔만 이천 원 우리 식구 달포 먹을 양이다 논농사는 지어온 지 이제 십 년이 되지만 상환료 갚느라 쌀은 다 돈사야 하고 일 년 열두 달 다시 빚일 수밖에 없는 돈으로 이렇게 한 가마씩 팔아먹어야 되는 일 아랫니 빼서 윗니 박는 꼴이다 그 희디흰 쌀이 방앗간에서 다 팔려 나갈 때 나는 기껏 손으로 한 줌을 쥐어 본다 일 년의 수고가 주마등처럼 손안에 잡혔다가 스르르 스르르 힘없이 빠져나가면 나는 또 기껏 자투리 쌀이나 몇 킬로 혹은 몇십 킬로 집으로 가져와 쌀독에 붓지 않고 "농사지은 것잉게 밥인 한 끼 하소." 아내에게 쌀을 건낼 땐 눈물이 난다 쌀 한 톨 줄 수 없는 형제들 얼굴이 스친다 이번에도 설을 앞두고 쌀은 떨어졌다 며칠을 두고 눈은 쌀밥처럼 내리지만 어찌할꺼나 헤치고 나갈 수 없는 이 안타까움을 어찌어찌 겨우 한 포 구해다 부려놓고 쏟지 않고 부러 한 됫박씩 빈 쌀독에 부어 보는데 그 흰쌀이 더없이 곱다 내 비록 빚 중에 들어도 이 밥해서 상에 받쳐 어머니 살아계시면 얼머나 좋으냐마는 방 안에선 설이라고 내려온 새끼들 소리만 우당탕 -54쪽
이팝
부러진 가지 하나 갈라진 속살 틈에서도
저 소스라치는 환희와 몸 떨리는 푸른 각오
피워 올리는구나 나무여 이 깜깜한 세상 향해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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