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구판절판


죽은 자들을 묻는 것은 산 자들의 몫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언 땅을 파는 것으로 죽은 자의 마지막 주먹밥을 챙겨먹은 값을 치렀다. 얼어붙은 손으로 삽질을 하며 그들은 생각했다. 내일이면 자신들이 파고 있는 무덤 옆에 자신도 나란히 묻힐지도 모른다고.

-72쪽

전쟁은 아이들을 군인으로 만들었고, 응석받이들을 천덕꾸러기로 만들어 버렸다. 아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과묵해졌고, 완고하던 어른들은 더욱 냉정해졌다. 소년들은 지성을 갖추기도 전에 지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인간의 존엄을 깨닫기도 전에 인간의 존엄을 몽둥이로 망가뜨리는 법을 배웠다. 얼굴에 젖살이 빠지기도 전에 그들의 마음은 주름투성이 노인이 되어 버렸다.

-75쪽

내가 기댈 유일한 것은 책이었다. 책은 내가 믿는 단 하나였고 모든 것이었다. 모르는 것을 알려 주는 스승이었고 슬픔을 달래 주는 주술사였고 아픔을 치유해 주는 의사였다. 나는 곤궁할 때마다 책 속에서 길을 찾았고,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책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하지만 이 출구 없는 미궁 속 같은 형무소에서 수수께끼를 풀 책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서재에서, 하숙방에서, 은신처에서 압수한 책들이 진실을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해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책은 허술하고 미덥지 않을지 모르지만 허무맹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84쪽

공습은 점점 자주, 오래 이어졌다. 일본은 거대한 병영이었고, 후쿠오카는 미 공군의 앞마당이었다. 음산한 경계경보와 다급한 공습경보는 죽음과 파괴의 전조였다. 경보음에 이끌려 따라온 것 같은 B29 편대는 한순간에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뒤늦은 사이렌 소리는 잿더미가 된 도시와 잿더미에 깔린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이었다. 양동이를 든 여자와 불 끄는 빗자루를 치켜 든 아이들이 전선으로 간 남자들 대신 잿더미가 된 거리를 달렸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 벌 떼 같은 비행기 소리, 폭음과 비명 속에서 사람들은 한때 그 거리를 가득 메웠던 다른 소리들을 떠올렸다. 찌그러진 깡통 하나가 굴러도 까르르 터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빵빵대던 자동차 경적 소리, 레코드 상점에서 흘러나오던 재즈음악, 여자들의 반짝이던 웃음소리. 하지만 전쟁은 거리의 풍경을 잿빛으로 바꾸어 놓았다. 쥐들과 어깨뼈가 드러나 고양이들 사이로 무거운 군홧발 소리가 떠도는 거리, 문을 닫은 상점들, 무섭게 내달리는 군용 트럭. 트럭 뒤에 웅크린, 겁에 질린 젊은이들. 그들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115쪽

죽음은 일상처럼 무감각했고, 사람들은 공포라는 등짐을 지고 살았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목적인 시대였다.
-115쪽

심문실로 들어서는 동주는 얼굴에 재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하지만 심문이 시작되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는 존재하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것들과, 보이지 않지만 유추할 수 있는 것들, 사라졌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지지 못하지만 원할 수 있는 것들, 다다르지 못하지만 소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부러진 뼈와 뱉어 낸 이가 뒹구는 심문실에 마주 앉아 우리는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그를 마주볼 때 나는 더 이상 그를 감시하는 간수가 아니었으며 그 또한 죄수가 아니었다. 우리는 문장을 꿈꾸는 공모자, 사라진 작가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쫓는 추적자였다.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 철학자와 화가, 작품 속 주인공들이 우리와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133쪽

하지만 그것은 그가 마음대로 가지라 마라 할 수 없는 압수물이었다. 한때 그것은 나만의 책이었지만 이제는 나의 책도, 그의 책도 아닌 빼앗긴 책이 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책이 아니라 릴케의 영혼이라면? 누구도 영혼을 소유할 수는 없고 당연히 그 영혼을 빼앗을 권리를 가진 자도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겼다. 한때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나의 것이었던, 한 젊은 시인의 손에 이르렀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온 책. 릴케의 영혼은 그렇게 정처 없이 세상을 유랑하며 상처 입은 마음들을 보듬고 치유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아주 조금 더 성장한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143쪽

"겨울이면 흰 눈이 마을을 뒤덮고, 먹이를 찾는 노루와 멧돼지들이 손님처럼 마을로 내려왔어. 아이들은 하늘 한가득 연을 날리고, 어른들은 매사냥을 나갔지. 우리 집은 학교 정문 쪽의 큰 기와집이었어. 마당에는 자두나무가 있고, 뒤에는 살구나무 과수원이 있고, 동문 밖에는 커다란 오디나무와 깊은 우물이 있었지. 뽕나무에 열린 오디는 다디달았어.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소리를 지르다 고개를 들면 햇살이 교회당 종탑의 까마득한 십자가를 비추었지. 나는 마을길을 산책하길 좋아했어.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이는 그 길……."

-146쪽

"고흐 화집이 들어오면 연락해 주게."
나는 그 일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지 않았다. 어두운 서가 틈에서 몰래 고흐의 화집을 펼칠 때마다 가책이 책갈피를 뛰쳐나왔다. 입영 영장을 받은 날 나는 모서리가 닳은 그의 명함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고 희미하게 닳은 주소를 찾아가 그에게 내 영혼의 일부를 건네주었다. 그날 밤 나는 밀거래 식료품들로 차린 밥상을 앞에 두고 울었다. 잃어버린 내 영혼의 조각이 슬퍼서였다. 기름진 밥을 넘기지 못하고 자꾸만 내 그릇에 덜어 주시던 어머니.
"고흐는 별의 화가였어. 별을 사랑했고 별을 즐겨 그렸지.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별에 대해 썼어. 들어 봐!"
-149쪽

그는 웃었지만 나는 슬펐다. 하얀 입김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감쌌다. 숨을 쉴 때마다 그의 내부에서 차가운 영혼이 빠져 나오는 것 같았다. 먼 곳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항구의 배에서 굵고 낮은 무적이 울렸다. 풀벌레가 우는 것처럼 작은 알전구가 찌르르 울었다.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자신의 시를 외웠다. 문장들과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리기 전에.

-151쪽

간수장은 눈빛으로 내 멱살을 잡아끌고 책 무더기 앞에 팽개쳤다. 고개를 들자 죽음을 기다리는 책들의 거대한 무덤이 보였다. 고뇌하는 햄릿과, 떠도는 랭보와, 모험하는 톰 소여와,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와, 릴케와, 키르케고르……. 문장 속에서 살았고 책갈피 속에 은거했던 사람들. 나의 손에 그들을 살해할 불씨가 들려 있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 더러운 금서들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증명해야 했다. 그것만이 내가 한때 연루되었던 위험한 음모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160쪽

한 권의 책은 누군가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낱말과 조사와 구두점이 모인 문장은 누군가에게 읽히는 순간 삶을 시작한다. 책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고, 헌책방과 도서관으로 긴 여행을 한다. 누군가의 가슴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우듬지를 이루는 동안 책장은 찢어지고 표지는 낡고 글자들은 바랜다. 그리고 어느 날 먼지와 어둠 속에서 숨을 거두지만 그 영혼은 우리 가슴속에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책은 죽지 않는다.

-172쪽

방공호는 깊고 견고했지만 부끄러움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들을 죽음의 한가운데에 내버려두었다는 사실,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며 방공호로 달려와 숨었다는 사실. 비겁하다고 하기에는 부끄러웠고, 양심의 가책을 말하기에는 염치없었다. 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은 부당했다. 나의 목숨이 소중한 만큼 그들의 목숨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나는 보호받고 그들은 내팽개쳐졌을까? 그들이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에겐 죄가 없을까?

내가 폭탄 아래에 방치했던 사람들. 나는 그들을 죽음의 먹잇감으로 던졌고, 그들의 목숨을 요행의 주사위판에 걸었다. 나는 그들의 운명을 상상할 순 있었지만 그들의 고통을 내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들의 두려움에 연대하지 않았고, 그들의 운명을 동정조차 하지 않았다. 해제 경보가 울리면 간수들은 살아남아 행복하다는 듯 시시덕대며 우르르 방공호를 빠져나갔다. 짦은 숨바꼭질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처럼.
-177쪽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모든 존재는 심연의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위악은 억압된 선이 스스로를 지키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위악은 선의를 가진 자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악한 자들은 악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위선을 행할 뿐이다. 하지만 선의를 강변하는 가장 극단적인 그 방식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자신 또한 파멸시키고 만다. 그렇다면 스기야마는 선한 사람이었을까? 그에게 선의가 있었을까? 있었다면 어떤 선의였을까?

-191쪽

전쟁은 기진맥진한 채 계속되었다. 더 많은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갔고 더 많은 청년들이 죽어서 돌아왔다. 훨씬 더 많은 청년들은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남은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굶주리고 헐벗었으며 두려움에 질식당했지만 후쿠오카 형무소에는 알 수 없는 설렘이 넘실댔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음악회는 모두를 들뜨게 하는 후쿠오카 형무소 최대의 행사였다.

-193쪽

어두컴컴한 무대 뒤에 나는 있었다. 견고한 목소리는 약간의 슬픔을 담고 있었다. 소리들은 일제히 나의 어깨를 밀치며 달려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향기로, 움직임으로, 떨림으로 눈과 귀와 코와 모든 감각기관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이 꽃이라면 나는 그 향기에 숨이 막혔을 것이고, 술이었다면 엉망으로 취했을 것이고, 마약이었다면 파멸해도 좋았을 것이다. 음악은 아름답고도 슬펐다. 내가 그것을 향유할 자격이 있는지 망설여질 만큼. 모든 선의가 빛을 잃고 강렬한 사랑에도 냉담해질 만큼. 그 순간 나는 인간이라는 아름다움, 삶이라는 기쁨을 발견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 나의 삶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의 심장은 풀무처럼 헐떡거렸다. 나는 나를 달래야 했다.

-200쪽

나는 그를 잃어야 하는 것이 분했다. 그를 잃어야 할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였다. 나는 친구를 잃어야 하겠지만 조선인 죄수들은 현명한 동료를, 간수장은 용서를 빌 대상을, 간수들은 온화한 모범수를 잃을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조선인들은 위대한 스승을 잃을 것이고, 태어나지 않은 일본인들은 부끄러운 과거를 증언할 지식인을 잃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가지지 못할 순결한 시인을 잃어야 할 것이다.

-240쪽

나는 얼어붙은 형무소 뜰을 갇힌 짐승처럼 돌아다니며 시간을 견뎠다. 열흘이 지난 후 전보를 받은 그의 아버지와 숙부가 도착했다. 그들은 먼 타국에서 숨을 거둔 아들의 시신을 메고 바람 속으로 떠나갔다. 나는 형무소를 나서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의 한조각, 마지막 한마디 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한참 후에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 동주가 죽었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마지막 순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외마디 소리를 질렀어요."
나는 돌아서 걸었다. 나의 눈물이 그들에게 죄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245쪽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할 정도로 비겁하지 않지만 죽음을 무릅쓸 만큼 용감하지도 못했다. 나는 살고 싶었다. 최치수의 말처럼, 윤동주의 부탁처럼 살아남고 싶었다. 살아남는다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살아남고 싶었다.

-281쪽

나는 달아나듯 원장실을 뛰쳐나왔다. 그는 왜 내게 연구동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말했을까? 더 이상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생각대로 된 것이다. 엄청난 비밀에 압도당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비밀을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사람이 없었다. 말한다 해도 믿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믿는다 해도 분노할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설사 분노한다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에 지나지 않을까?
-282쪽

왜 아무도 말하지 않고, 드러나길 원하지 않는 일에 대해 집필했습니까?
누군가는 그것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절대 망각 속에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무, 심지어는 거짓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과거의 잘못을 다시 곱씹을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새 출발 하자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돌이켜 볼 수 있고, 돌이켜 보아야 과오를 찾을 수 있고, 과오를 찾아야 잘못을 인정할 수 있고,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를 빌 수 있으며, 용서를 빌어야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아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8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