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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와, 일단 감탄부터 해보자. 이 작품, 대단하다. 아직 1권밖에 읽질 못해서 단언하긴 이르지만, 현재로서는 무척 좋다. 이정명 작가의 이전 소설들도 재밌었다. 뿌리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악의 추억까지 모두 재미있었다. 그런데 뒷심이 늘 부족했다. 무척 반짝이는 창의력을 가졌고, 흥미롭게 전개되었지만, 마지막 마무리에서 매번 아쉬움이 남곤 했다. 재미와 감동의 경계에서 조금 주저한 느낌. 그래서 이 작품을 시작할 때도 그렇게 기대는 하지 않고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1권만 읽은 시점에서 기대치가 무척 높아져 있다. 지금, 감동 받았다는 얘기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났다. 후쿠오카 형무소에는 전쟁 기간 동안 갇혀 있던 사람이 풀려났고, 그들을 감시했던 간수가 대신 갇혀 있다. 포로 학대로 기소된 하급 전범 와타나베가 이 책의 화자다. 그는 두 사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 사람은 시인, 한 사람은 그 시인을 감시했던 검열관이다. 그는 이곳 형무소에서 악마를 보았고, 동시에 희망도 보았다. 바로 저 두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
추리 소설을 자주 쓰곤 했던 그 실력을 십분 발휘해, 이 작품 역시 미스테리하게 시작했다. 작품 첫머리에서 벌써 시체가 하나 나왔던 것이다. 이 책의 화자는 고작 열일곱 살의 간수다. 우리 기준에 열일곱은 소년에 가깝지만, 전시에 열일곱은 군인의 나이다. 그는 근무하던 형무소를 옮긴지 한달 만에 살인 사건을 파헤치라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을 만난다. 하나는 이미 죽은 검열관 스기야마이고, 하나는 그의 죽음에 몹시 관계가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조선인 시인 히라누마, 조선명 윤동주다.
와타나베가 추적한 스기야마는 인간 백정이었다. 조선인은 물론이요, 일본인 간수들조차 그의 죽음을 가여워하기는커녕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에게 따라붙는 소문들은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인간이었는지, 악마에 가까웠는지를 증명했다. 그런데 그의 삶을 추적해 따라가 보니, 또 다른 평가가 따라온다. 피아노를 조율했던 그를 향해 한 간호사는 스기야마 도잔이 섬세한 남자라고 했다. 그를 죽인 건 미친 시대였다고. 더 많은 피를 원하는 시대. 더 많은 증오와 더 많은 죽음을 원하는 이 시대 말이다. 그는 전쟁이라는 철창 속에서 군복이라는 독방에 갇혀 죽었다고 했다. 과연 그는 섬세한 사람이었던가? 작가는 스기야마의 과거로 돌아가 그의 영혼이 섬세한 음률 위에서 춤을 추었던 시절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그가 상처받기 쉬운 가여운 영혼이었다는 것을, 그 섬세함으로 인해 더 힘들었다는 것을, 독자도 공감한다.
이제 와타나베는 또 다른 증언자를 찾는다. 윤동주. 창씨명 히라누마라는 이름을 가진 시인. 죽은 스기야마는 호주머니에 시가 적힌 종이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의 유품에도 윤동주의 시가 있었다. 바로 그 시를 지은 시인이 고백했다. 스기야마는 시인이었다고.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시인이었다고...
'인간 백정' 소리를 듣던 잔인한 검열관이 섬세한 사람이었다고, 게다가 시인이었다는 이 불합리한 고백. 여기서 독자는 심장이 떨렸다. '시인'이라는 말을 아무에게나 못붙일 것 같다. 도대체 윤동주와 이 검열관 사이에 어떤 공감이 있었던 것일까. 그 죽음에 밝혀진 사연 말고도 또 다른 게 있었던 건 아닐까, 몹시 궁금해졌다.
스기야마는 '시'의 힘을 믿지 않았다. 아니 '언어' 따위 믿지 않았다. 문맹이었던 그는 모두가 회피하는 검열관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딱 필요한 만큼만 글을 깨우쳤다. 형무소 안에서 조선어는 쓸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일본어로 전달되는 편지와 책들을 검열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어의 힘을, 시의 무서운 힘을 깨달았다.
스기야마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분명히 인식했다.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다시는 변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변해 버린 자신이 두려웠다. 어떤 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읽기 전의 사람이 아니다. 문장은 한 인간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불치의 병이다. 단어와 구두점들은 몸 여기저기에 세균과 바이러스처럼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문장들은 뼈에 새겨지고 세포 속에 스며들고 자음과 모음은 혈관을 타고 흐른다. 수많은 상징과 비유는 뇌세포를 물들이고 영혼을 재구성한다. 그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가서도 안 된다. -220쪽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시의 세계에 푹 빠져버린 스기야마는 돌이갈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병약한 시인을 지켜야 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후 시인과 검열관 사이에서 오고 간 말들과 온정은 무척 뜨거웠다. 그의 애정이 몽둥이 찜질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가 살리고자 했던 순수한 시와 그 시가 해낼 희망의 역할들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사이사이 소개되는 시들과, 이들에게 상징처럼 등장한 '연'의 역할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모국어가 금지된 형무소의 갇힌 시간. 식민지 조국의 서러움을 온 몸에 품고 살았을 윤동주를 떠올려 본다. 창씨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선택과 그로 인해 치렀을 마음의 감옥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 비참한 죽음도 기억해 본다. 그 조국에 현재 어떤 역사의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비참하게 되새겨 본다. 마음이 아프다.
시인과 시를 다루는 만큼 소제목도 예쁘다.
1부
방랑자로 왔으니 다시 방랑자로 떠나네 · 15
가슴에 맺혔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들 · 39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 · 52
심문 · 68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 79
소년은 어떻게 군인이 되는가 · 90
음모 · 102
죽음의 재구성 · 115
한 대의 피아노와 그 적들 · 136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159
문장은 어떻게 영혼을 구원하는가 · 186
고통이여! 너는 사랑하는 여인보다 다정하다 · 206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 224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 244
별 헤는 밤 · 279
특히나 1부의 마무리를 '별 헤는 밤'으로 끝냈는데, 정말 이 시가 쓰여졌을 것 같은 언덕 위에서 꼭 같은 그리움을 품은 채 시를 읊게 하니, 이 시를 읽으며 가슴 떨려 했던 여고 시절로 어느새 돌아가고 말았다. 설레고, 먹먹하고, 그리웠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만난 듯하다. 2권을 같이 사지 않은 게 내 실수다. 얼른 장만해서 마저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