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의 하루 - 오늘, 일본 황궁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요네쿠보 아케미 지음, 정순분 옮김 / 김영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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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의 하루를 소재로 한 '왕의 하루'에 이어 이번엔 '천황의 하루'다. 그 중에서도 일본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메이지 천황의 하루를 통해서 전통과 규율을 존중하다 못해 거의 집착하는 이 '신성' 체제의 내부를 슬쩍 들여다보고 있다.

 

시작은 천황의 기상부터다. 평일 오전 8시, "오히~루(기상)"
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리면 방에서 방으로 기상 시간을 알리는 말전달이 이어지고 궁성의 하루가 열린다. 전통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천황은 8시보다 일찍 일어나서도 안 되고 늦게 일어나서도 안 된다. 천황이 일찍 일어나버리면 보필하는 이들의 스케줄도 모두 꼬이기 때문에 설령 아침 잠이 없어진 노년에 가서도 이 시간은 지켜져야만 했다. 잠에서 깬 천황은 시의의 진찰을 받고 화장을 한다. 이때의 '화장'이란 몸치장 전체를 가리키는 궁중 용어다. 이때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한 다음 따뜻한 물수건으로 상반신을 닦아낸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고 향수를 뿌리면 준비 끝! 메이지 천황은 외국의 향수 한 병을 이삼일 만에 다 썼을 정도로 향수 매니아였다고 한다. 어휴, 향수를 그렇게 뿌려댔으면 주변 사람들이 꽤 힘들었을 것 같다.

 

 

키 165cm정도의 메이지 천황. 당시 기준으로는 꽤 큰편이었다고 한다. 눈빛이 부리부리, 사진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황후 하루코다. 몹시 병약했다고 하는데, 아파보이는 건 둘째 치고 표정이 너무 없어서 종이 인형처럼 느껴진다. 부부가 모두 얼굴이 꽤 크다. 전통적 동양인의 체형이었을 테지. 지금이야 키도 커지고 얼굴도 작아진 모양새지만...

 

조식은 각자 먹고 천황의 하루 업무가 시작된다. 한시도 가만 있지 않는 성정의 천황은 심지어 모든 서류를 서서 검토했다고 한다. 천황이 서 있으니 결재 받으러 온 신하가 감히 앉아 있을 도리가 있나. 그런데 그런 천황 앞에서도 앉아서 볼일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황족이 알현을 왔을 때도 양쪽이 모두 기립한 상태에서 대화가 진행되었는데 예외적으로 의자에 앉은 인물들이 있었다. 아리스가와 다케히토 친왕과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다. 보조가 특히 이토는 “어전에 나갈 때는 보통 검을 빼고 들어가는데 그 사람만은 찬 채로 들어갔습니다” “팔꿈치를 의자에 기대고 편안한 자세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메이지 대제의 일상을 추억하다》)라고 하는 것처럼 별격이었던 듯하다. -69쪽

 

이토의 파워가 이정도였구나. 굉장히 씁쓸해진다. 심지어 황태자는 아버지를 어려워해서 천황의 기분을 먼저 확인한 후에야 알현을 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메이지 천황은 꽤 세밀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배려심도 꽤 돋보인다. 잠시도 앉지 않고 서서 일을 보는 것도 사실 아랫 사람들을 고려한 습관이었다. 자신의 행동 반경에 따라서 뒤따르는 이들의 업무 양이 폭발학 때문에 산책도 삼가는 사람이었다. 사실 비합리적이거나 비상식적인 전통이 있다면 그걸 바꾸는 게 더 나은 법이건만,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던 메이지 천황은 자신이 불편을 감수하고 주변 사람들을 좀 더 편하게 만드는 차선책을 고집했다.

 

신하들에게 승마를 시켜 건강을 관리하게 하였지만 정작 자신은 운동 부족이었다. 운동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역시 그에 따라오는 번다한 규칙과 주변인들의 불편을 덜기 위함이었다. 여관들이 무거운 물건을 놓아다가 둘 일이 많은데 자신이 자리에 있으면 일일이 인사를 하고 무릎걸음으로 지나가야 하니, 이때도 자리를 비켜주는 것으로 그들의 불편함을 덜어내었다. 최선의 방법은 취하지 않아도 차선까지는 해내는 인물이었다. 전근대 사회와 근대 사회의 경계에 선 사람으로 보인다.

 

검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던 천황. 식민지배의 묵은 업이 있는 이나라의 독자로서 잠시 눈썹이 꿈틀대는 순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든 생각인데, 메이지 천황은 한 사람의 개인으로 보면 무척 괜찮은 인물로 보였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주변에도 규칙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지만, 나름의 유머도 있고 섬세한 배려도 자주 보인 인물이었다. 병약한 아내는 물론이요, 보좌하는 신하들, 그리고 궁에서 어려서부터 생활한 소년들에게도 그랬다. 제 몸이 불편할지언정 신하들의 불편함은 최대한 덜어주려고도 애썼다. 그런데 그 메이지 천황이 집권한 시기에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고 어마어마하게 수탈을 당하다가 끝내 강제 병합되었다. 문득, 청문회를 요란하게 했던 흡사마가 떠오른다. 그 사람도 자기 집에서는 따뜻하고 섬세한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린 행적을 보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공직에 어울리냐고 묻는다면 어휴, 말을 말아야지.... 일본 사람들에게 메이지 천황은 존경의 대상일지 모르겠으나 대한민국 독자로서 나는 어디 감정이 그래지는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로까지 범위를 넓혀도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최대한 담담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사실 책도 천황의 하루를 따라가면서 그 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줄 뿐, 심각한 정치적 역사적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크게 웃기지는 않지만 나름 유머도 섞어가면서 애를 쓰는 게 보인다. 이를테면 천황이 아꼈던 개가 오히려 신하들을 아랫 사람으로 대하듯 심통 부리는 장면 등이 그랬다.

 

 

 

깨끗하고 신성한 것은 '청', 지저분하고 터부의 대상이 되는 '차'의 구분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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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이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하는 것은 식사 당번 때만이 아니었다. 하반신은 인간의 몸에서도 대표적인 ‘차’의 장소이기 때문에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관은 자신의 양말이나 버선도 아랫사람의 손을 빌려 신었다고 한다. 다다미에 앉아서 엎드려 인사를 할 때도 발로 밟는 다다미 때문에 자신의 손바닥이 더럽혀질까봐 한 손은 손등을 바닥으로 향하게 하고 그 위에 다른 한 손을 포개놓는 식으로 했다. 만에 하나 손이 더럽혀지면 청정의 과정을 다시 되풀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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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의 몸을 씻는 데도 청인 상반신은 권전시, 장시, 권장시가 씻고, 차에 해당하는 하반신은 명부, 권명부가 씻어야 했다. 천황은 신성한 존재이기 때문에 전신을 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욕조는 물을 허리 정도까지만 채워서 하반신만 물속에 담그도록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반신욕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욕조 가득 물을 부으면 상반신까지 물속에 들어가 차인 하반신의 더러움으로 청인 상반신까지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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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서 가장 더러운 발이 이불에 직접 닿으면 이불을 타고 더러움이 온몸에 퍼진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이기의 잠옷에는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었다. “옷의 끝자락을 길게 해서 발을 감쌌다”고 하므로 발이 이불에 닿지 않도록 하얀 비단 잠옷으로 크레이프처럼 온몸을 싸도록 만든 것이다. 천황 부처와 여관들 모두 그런 잠옷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거의 강박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전통이라니, 그래서 지켜야 한다니 어쩌겠는가. 설마 요즘도 저러지는 않겠지? 답답해서 사람이 어디 살겠는가 싶다. 패기 있고 발랄해 보이던 마사코 황태자비가 칩거 중이라는 소식도 이런 숨막히는 규율 탓이 크지 않을까. 아, 갑자기 김진명의 '황태자비 납치 사건'이 궁금해지는군... ^^

 

책의 본문보다 맨 뒤 부록처럼 실린 신명호 교수의 해설이 더 흥미로웠다. 메이지 유신 때에 어떻게 그렇게 단번에 천황에게로 모든 권력이 옮겨졌을까 궁금했는데 이 부분을 적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타이밍이 잘 맞기도 했지만, 단번에 권력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도 좋은 수확이다. 또 조선의 궁녀와는 신분 차이가 큰 천황의 후궁들에 대한 얘기도 무척 재밌었다. 확실히 일본은 동아시아에 위치해 있지만 유럽과 닮은 점이 많은 듯하다. 지방분권적 정치 스타일도 그랬고, 왕비를 모시는 시녀들이 귀족이었던 것과도 통하니 말이다.

 

앞의 시리즈 '왕의 하루'는 읽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는데 이 책은 무척 빨리 읽혔다. 글밥이 더 적기도 하지만 구성 자체가 보다 간결하고 '하루'라는 타이틀에 맞게 시간 흐름도 정방향이어서 읽는 게 더 수월했다. 혹시 다음 시리즈는 중국 황제의 하루가 되려나? 지배자 말고 또 다른 여러 인물들에게까지 관심을 확대해서 '하루' 시리즈가 더 나왔으면 좋겠다.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되면 무척 재밌을 듯하다.

 

덧글) 오타 하나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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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를 수행하는 >>>천황을 수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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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3-01-24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어 보이네요.
눈썹과 콧수염과 눈빛이 참 인상적인 사진이네요. 그에 비하면 고종이 비슷한 예복 입고 찍은 사진은 얼마나 인자하고 자그마한 조선의 할아버지인가요.

마노아 2013-01-24 20:3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인상부터가 차이가 확 나네요. 한쪽은 순딩이 인상인데 말이지요.^^;;;;

노이에자이트 2013-01-24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후를 모시는 시녀가 귀족인 것 같은데요...왕비도 귀족이 모셨나요? 일황은 천황 한 명이지만 일왕은 여러 명이라 구분이 명확하더라고요.

마노아 2013-01-24 20:33   좋아요 0 | URL
왕비를 모시는 시녀들이 귀족이었다는 말은 유럽 얘기한 거였는데 좀 혼동이 되게 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