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의 하루 - 오늘, 일본 황궁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요네쿠보 아케미 지음, 정순분 옮김 / 김영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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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기》에 의하면 천황의 신장은 5척 5촌 4부였다고 한다. 약 165cm이니 당시로는 체격이 좋은 편에 속했다.
-37쪽

나이기는 천황의 기상인 '오히루‘를 신호로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오히루‘ 전달이 없으면 궁전의 하루 일과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즉 메이지 천황은 그 존재 자체로 궁전의 시계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천황이라는 궁전의 시계에 그 누구보다도 구속을 받던 존재는 다름 아닌 메이지 천황 자신이었다.

-38쪽

흔히 일본 남성은 가부장적이어서 상대방을 위한 자상한 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습관이 없다고들 한다. 그것이 과연 일본 전통의 모습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헤이안 시대의 문학 작품을 보면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여성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당시 남성에게는 기본적인 미의식이었다. 메이지 천황도 주위의 여성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항상 잊지 않았다.

(...)

천황이 가장 좋아한 것은 도코노마(일본 건축에서 객실인 다다미방의 정면에 바닥을 한 층 높여 만들어놓은 곳으로, 액자나 꽃을 놓아두고 신성한 곳으로 여긴다)에 장식되어 있는 각종 검들이었다. 개중에는 천황 스스로 사 모은 것도 있었지만 신하들이 천황의 취미를 알고 헌상한 것들도 있었다.


-52쪽

이 시기 상류 계급에선 의외로 여성 끽연가가 많았다. 현재 우리가 전통적인 풍습으로 생각하는 것 중의 대부분은 중하급 무사의 생활습관을 기본으로 하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여자가 담배를 피우다니"하고 눈살을 찡그리는 것도 그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생활풍습은 신분이나 계급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57쪽

황족이 알현을 왔을 때도 양쪽이 모두 기립한 상태에서 대화가 진행되었는데 예외적으로 의자에 앉은 인물들이 있었다. 아리스가와 다케히토 친왕과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다. 보조가 특히 이토는 "어전에 나갈 때는 보통 검을 빼고 들어가는데 그 사람만은 찬 채로 들어갔습니다" "팔꿈치를 의자에 기대고 편안한 자세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메이지 대제의 일상을 추억하다》)라고 하는 것처럼 별격이었던 듯하다.

-69쪽

여관이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하는 것은 식사 당번 때만이 아니었다. 하반신은 인간의 몸에서도 대표적인 ‘차’의 장소이기 때문에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관은 자신의 양말이나 버선도 아랫사람의 손을 빌려 신었다고 한다. 다다미에 앉아서 엎드려 인사를 할 때도 발로 밟는 다다미 때문에 자신의 손바닥이 더럽혀질까봐 한 손은 손등을 바닥으로 향하게 하고 그 위에 다른 한 손을 포개놓는 식으로 했다. 만에 하나 손이 더럽혀지면 청정의 과정을 다시 되풀이해야 했다.

-104쪽

천황의 몸을 씻는 데도 청인 상반신은 권전시, 장시, 권장시가 씻고, 차에 해당하는 하반신은 명부, 권명부가 씻어야 했다. 천황은 신성한 존재이기 때문에 전신을 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욕조는 물을 허리 정도까지만 채워서 하반신만 물속에 담그도록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반신욕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욕조 가득 물을 부으면 상반신까지 물속에 들어가 차인 하반신의 더러움으로 청인 상반신까지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176쪽

몸에서 가장 더러운 발이 이불에 직접 닿으면 이불을 타고 더러움이 온몸에 퍼진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이기의 잠옷에는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었다. "옷의 끝자락을 길게 해서 발을 감쌌다"고 하므로 발이 이불에 닿지 않도록 하얀 비단 잠옷으로 크레이프처럼 온몸을 싸도록 만든 것이다. 천황 부처와 여관들 모두 그런 잠옷을 사용했다고 한다.

-218쪽

다이쇼 시대의 나이기는 메이지 시대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일부일처제가 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메이지 시대와 마찬가지로 궁정에 황후 사다코의 ‘대리인’인 공가의 미혼의 딸들의 재적하고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비妃(후궁)’로서의 역할은 없었다.

-231쪽

저녁 식사 때는 메이지 천황 부처가 각각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한 것과 달리 다이쇼 천황 부처는 하나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식사를 했다.

-235쪽

해설
메이지 천황과 근대 천황제 (신명호)
1867년 12월에 이른바 ‘대정봉환’이 있었다. 에도 막부의 쇼군이 메이지 천황에게 권력을 되돌린 것이 대정봉환이었다. 이는 일본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부터 에도 막부 시대까지 8백 년 가까이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천황이 갑자기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다. 대정봉환 이후 메이지 천황은 종교적 권위는 물론 세속적 권력까지 장악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대정봉환이 이루어지기까지 일본은 10여 년 이상 격심한 혼란을 겪었다. 1853년 6월 3일, 미국의 페리 제독이 네 척의 함선을 이끌고 도쿄 앞바다에 입항했다. 페리 제독은 일본과 수호통상을 요구하는 미국 대통령의 국서를 휴대하고 있었다. 페리 제독의 출현은 에도 막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에도 막부는 전쟁을 해서라도 페리 제독의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는 쇄국파와, 전쟁을 해봐야 이길 수 없으니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개항파로 갈렸다.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에도 막부는 전국의 영주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영주들 역시 개항파와 쇄국파로 갈렸다.

-260쪽

결국 에도 막부는 고메이 천황에게까지 의견을 구했다. 천황의 권위를 빌리려는 생각이었다. 고메이 천황은 개항에 절대 반대였다. 개항으로 서양의 문화가 들어오면 신국神國 일본이 더럽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페리 함대에 이어 8월에는 러시아 함대 네 척이 나가사키에 입항했다. 에도 막부의 입장에서는 쇄국을 고집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졌다. 쇄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 러시아 등과 전쟁을 각오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었다. 1854년 3월, 에도 막부는 고메이 천황과 논의도 없이 미국과 가나가와에서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일본은 서구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에도 막부의 개항 결정은 격심한 저항을 불러왔다. 당장 고메이 천황이 강력한 거부감을 표명했다. 하급 무사들은 에도 막부가 신국 일본을 서양 오랑캐에 팔아버렸다며 막부 타도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천황을 중심으로 뭉쳐 에도 막부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쓰마 번, 조슈 번 등 거대 번들이 동조하면서 이른바 ‘존왕양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졌다. 막부파와 천황파 사이에서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261쪽

결국 에도 막부의 쇼군은 권력을 천황에게 되돌려서 궁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867년 10월 14일에 에도 막부의 쇼군은 상서를 올려 대정봉환을 요청했다.. 다음 날 에도 막부의 쇼군은 입궁하여 메이지 천황의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12월 9일에 왕정복고가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메이지 유신의 시작이었다. 형식적으로 볼 때 메이지 천황은 1867년 12월의 대정봉환으로 세속적 권력까지 장악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이었다. 일본은 여전히 수백 개의 번으로 나뉘어 있었고, 세속적 권력은 번 지사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 반면 메이지 천황에게는 직속된 토지나 인민이 없었다. 군대도 없었고 자금도 없었다. 이런 상태로는 천황 주도의 유신이 성공할 수 없었다. 전국의 토지와 인민을 천황이 직접 장악해야 군대와 자금을 직접 장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폐번, 즉 번을 폐지함으로써만 가능했다. 가마쿠라 막부 이래로 8백여 년간 일본 사람들은 번주를 주인으로 알고 살아왔다. 비록 쇼군이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세금을 걷고 군대를 징발하는 권한은 번주에게 있었다. 번은 곧 일본 사람들에게 나라였다.

-262쪽

1870년 12월, 메이지 천황의 핵심 측근인 이와쿠라 도모미는 당시의 대표적인 웅번인 사쓰마 번, 조 슈 번, 고지 번을 방문하여 폐번치현의 협력을 약속받았다. 이로부터 폐번치현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마침내 1871년 7월 14일, 메이지 천황은 폐번치현의 조칙을 선포했다. 폐번치현은 8백여 년간 지속되던 막부체제의 종말이자 지방분권체제의 종말이었다. 일본은 군현제에 의해 명실상부한 중앙집권체제로 탈바꿈했다. 그 체제의 정점에 메이지 천황과 하루코 황후가 있었다.

-263쪽

하루코 황후는 곧바로 황후에 책봉된 것이 아니었다. 일단 후궁인 여어어방에 책봉되었다가, 혼례식을 치른 후 황후에 책봉되었다. 천황의 황후가 애초부터 황후에 책봉되는 것이 아니라 후궁에 책봉된 다음에야 책봉된다는 사실은 황후나 후궁이 신분적인 면에서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았음을 뜻했다. 천황의 배우자는 황후이든 후궁이든 기본적으로 5섭가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황후는 어느 후궁이나 승진해서 올라갈 수 있는 자리에 불과했다. 사실 대부분의 천황은 아예 황후를 책봉하지 않기도 했다. 메이지 천황의 부친인 고메이 천황도 그랬다. 고메이 천황의 정실부인인 구조 아사코는 황후에 책봉되지 못하고 후궁 중에서 최고인 준후에 머물러야 했다. 준후는 말 그대로 황후 다음이라는 뜻으로서 엄격히 따지면 후궁이었다.

-265쪽

일본의 여관은 천황과 황후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육체노동을 제공하는 여성 관리였다. 조선으로 치면 궁녀에 해당했다. 하지만 일본의 여관과 조선의 궁녀는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도 신분이 달랐다. 조선의 궁녀는 근본적으로 내수사 소속의 노비 출신이었지만, 일본의 여관은 공경의 딸들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여관은 명색만 여관이지 실제로는 후궁도 될 수 있었고 황후도 될 수 있었다. 신분적으로 여관은 후궁이나 황후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천황의 황후도 처음에 여관으로 시작했다.

-267쪽

(역자후기)
일본국 헌법에는, 천황을 일본국과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이라고 규정하고 있어서 천황 및 황족이 최상의 대우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황실의 호위만을 전문으로 하는 황궁경찰본부가 있고, 천오백 명에 달하는 궁내청 직원이 황실의 모든 생활을 관리하며, 황족에게는 소득세 납부 의무도 면제된다. 천황 및 황족은 말하자면 갖가지 국가의 특혜를 받는 세습제의 ‘고위직 국가 공무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만큼 그들이 포기해야 하는 인간적인 삶 또한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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