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두고 오래오래 지난 채 잊고 있었는데, 영화의 개봉으로 다시금 내 시야에 들어온 파이 이야기. 이 책을 영화 보기 전에 먼저 읽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영화를 먼저 보았더래도 소설은 반드시 읽었을 것이다. 좀처럼 소설을 두 번 읽지 않는 편인데도 이 책은 다시 읽어보고 싶다. 다 읽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내가 아는 단서는 그거였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 어린 소년이 배 안에 호랑이 한 마리와 기묘한 공생 관계를 유지한 채 8개월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남아서 육지까지 갔다는 것.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 책은 그게 다가 아니다.

 

작품은 아주 특이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일단 액자식 구성이다. 작가처럼 극중 이 이야기를 끌어낸 인물도 작가다. 준비하던 작품이 엎어지고 방황하던 찰나 작가는 인도에서 왠 노신사를 만난다. 이 이야기를 다 듣고나면 신을 믿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던 그가 소개한 사람이 바로 파이 씨다. 지금은 중년이 된 그의 열여섯 살 때 이야기가 이 책의 제목이 되겠다.

 

1부는 파이의 이름이 왜 파이인지, 그가 인도에서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그의 가족 구성원과 그가 받아들인 힌두교, 이슬람교, 가톨릭의 세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대체 호랑이 이야기는 언제 나오냐며 마음이 다급해질 수가 있지만 서두르지 말자. 앞의 이야기도 모두 필요한 것들이니까. 이를테면 채식주의자 엄마와 두 형제, 호랑이가 얼마나 위험한 짐승인지를 몸소 보여주셨던 아버지와의 일화 등등등...

 

파이의 아버지는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셨다. 그러나 재정난에 싸이게 되자 모두 정리하고 캐나다로 이민 가기로 결정했다. 더운 나라에서 살던 가족이 그 추운 나라에서 어찌 살까 독자마저도 걱정스럽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고 동물들은 빠르게 다른 곳으로 팔려 갔다. 채 정리되지 못한 동물들이 파이네 가족과 함께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배에 탑승했다. 그렇게 2부 태평양 편이 진행된다. 알다시피 배는 침몰하고, 파이는 살아남는다. 구명용 보트에 뱅골호랑이 한마리와 함께.

 

처음부터 호랑이와 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배에는 얼룩말도 있었고, 오랑우탄도 있었고 하이에나도 있었다. 아, 쥐도 한 마리 있었다. 그러나 결국 파이와 호랑이 둘만 남았다. 호랑이의 이름은 리처드 파커. 기막힌 이름을 가진 호랑이의 과거도 재밌었다. 새끼 호랑이를 잡아들인 사냥꾼이 원한 호랑이의 이름은 써스티(목이 마른)였지만, 신고가 잘못되는 바람에 사냥꾼의 이름과 뒤바뀌어 리처드 파커가 되었다. 덕분에 사냥꾼의 이름은 써스티 미상이 되어버렸고.

 

몸무게가 200kg도 넘는 이 육식 동물과 좁디 좁은 배 위에서 무려 8개월 가까이를 살아남았다. 과연 어떻게? 그가 육식 동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이가 아니었다면 호랑이가 대체 무엇으로 생명을 유지했겠는가. 열여섯 소년을 먹어봤자 주린 배를 얼마나 채웠겠다고... 파이는 리처드 파커에게 물고기를 잡아 대령해주는 고마운 공급원이었다. 이른바 물고기 셔틀....;;;; 파이 역시 리처드 파커가 있었기 때문에 고단한 조난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언제든 자신을 잡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호랑이가 곁에 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고, 이 어마어마한 대식가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여 식량을 만들어야 했다. 그야말로 절망할 틈도 없던 바쁜 나날이었다.

 

여러분에게 비밀을 털어놓겠다. 마음 한편으로 리처드 파커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마음 한편에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가족과 비극적인 처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해주었다. 그런 그가 밉지만 동시에 고마웠다. 지금도 고맙다. 이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리처드 파커가 없다면, 난 오늘날 이렇게 살아 여러분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207쪽

물론, 파이가 절망 없이 줄곧 꿋꿋하게 버텼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수시로 절망이 덮쳐왔다. 끊임 없이 목이 말랐고, 지나치게 배가 고팠다. 뜨거운 태양과 추운 밤, 폭풍과 바람, 부족한 영양소까지, 보이는 모든 것이 파이의 생명을 수시로 위협했다.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리라는 희망을 너무 많이 갖는 것도 그만둬야 했다. 외부의 도움에 의존할 수 없었다.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텅 빈 수평선을 내다보았다. 물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나는 혼자였다. 완전히 혼자였다.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가슴에 팔짱을 끼고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아무 희망도 없는 처지였다. -212쪽

 

가족을 모두 잃고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놓인 파이. 게다가 상어만큼이나 위험한 호랑이와의 동거까지. 맨 정신으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건만, 이 신을 숭배하고 자연을 경외하는 소년은 놀라울만큼 영리하게, 지혜롭게, 그리고 부지런히 살아남았다. 배 안에 있는 구호 식품을 파악했고, 태양증류기를 통해 물을 만들어냈고, 비가 오면 물을 받아서 갈증을 달랬다. 그러나 언제 구조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구호 식품만 믿고 살 수는 없었다. 소년은 낚시를 시작했고, 훌륭한 요리사가 되었다. 채식을 고집하던 식성이 무엇이든 다 먹어치울 수 있게끔 다시 세팅되었다. 호랑이를 길들여서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고 영역을 표시하는 일은 또 어땠는가. 동물원 집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이리 표류하게 되었지만, 그 바람에 생존 기술도 갖추게 된 극적인 운명!

 

권태와 공포는 파이를 동시에 괴롭혔다. 권태가 다가오는 듯하다가 곧 공포로 바뀌었고, 공포 역시 권태로 물들어갔다. 구조보다도 더 간절히 원한 것은 책이었다. 결코 끝나지 않을 이야기가 담긴 그런 책. 파이는 일기도 썼다. 아주 작은 글씨로. 종이가 모자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펜이 먼저 떨어졌지만. 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문화적 존재인 인간의 면모가 보인다. 그렇게 빵과 장미는 늘 같이 필요한 법!

 

이야기는 점점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어려워진다. 바다에서 만난 또 다른 표류객과 식충 섬의 존재가 그랬다. 독자는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무언가 거대한 반전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과 두려움에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마침내 태평양의 끝에서 주인공은 구조되고, 그의 오랜 동거 호랑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작별 인사도 없이.

 

리처드 파커와 헤어지면서 파이가 겪은 이별의 상처가 안쓰러웠다. 동화적으로 간다면 인간과 동물의 눈물 겨운 우정이 주가 되어야겠지만, 이 책은 그런 평범한 길을 가지 않는다. 유주얼 서스펙트 저리 가라 싶을 만큼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3부는 멕시코의 병원에서 진행된다. 구조된 파이를 찾아 일본의 선박 회사 사람이 찾아온다. 파이가 탔던 침몰된 배의 조사원이다. 그는 파이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해서 파이는 그들이 믿을 만한 이야기를 다시 해준다. 거기서 독자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아.... 이 작가 엄청난 걸! 그리고 다시 앞으로 돌려가며 수상쩍었던 부분을 되짚으며 이야기를 확인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이렇게 놀라운 은유와 상징이라니! 이미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내가 어떻게 놀랐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감 잡을 것이다. 어이쿠, 소설은 참으로 위대한 것!

 

읽는 동안에는 이 이야기를 시작했던 캐나다 작가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했다. 열다섯 까지도 생 떽쥐 베리가 어린왕자를 사막에서 정말 만난 거라고 믿었던 그때처럼 꼭 믿었던 것이다. 나같은 독자 많았나보다. '파이 이야기 실화'라는 검색어가 있는 것을 보면...

 

책을 다 덮고, 감탄과 감동과 서글픔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파이가 겪은 그 엄청난 모험과, 고통. 그리고 외로움에 감정이입이 됐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린 리처드 파커의 뒷모습도 아른거렸다. 뒤도 돌아봐주지 않은 그 '배려'가 차라리 고마워지면서... 작품 속 캐나다인 작가에게 파이 이야기를 소개한 노인은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신의 존재를 믿게 될 거라고 했다. 독자도 공감한다. 누구보다 신을 믿고, 신께 의지했던 소년 파이. 신을 잊지 않으려고, 그리하여 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그 파이. 그리하여 공생할 수밖에 없었던 호랑이 리처드 파커. 리처드 파커를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야 했던 파이가 가졌던 그 갈증과 공포, 그리고 외로움이 사무친다.

 

그러나 너무 걱정은 마시라. 파이가 직접 말했지 않은가. 이 이야기는 해피 엔딩이라고. 파이가 만났던, 그리고 만들어 낸 구원에 박수를 보낸다. 수고했다고 어깨를 안아주고 싶다. 리처드 파커는 돌아오지 않을 테지만, 작별인사도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부커상에 대한 신뢰가 더 높아진다. 영화에 대한 기대도 높아졌다. 셀프도 이 책만큼 재밌으면 좋겠다.

 

덧글) 수정되어야 할 부분들

 

20 평형 연습을 할 때는 >>> 평영

120 동물원계에서는 뾰족뒤지 한 마리를 >>>> 뾰족뒤쥐

194 방수포가 딱딱하지 않는 게 >>> 않은 게

229 하루가 저물어날 무렵 >>> 저물어갈

240 솔기만 남기고 다 헤져버렸다. >>> 해져버렸다.

266 손가락으로 변을 눌려보았다. >>> 눌러보았다.

267 먹잘 게 없다는 것을. >>> 먹을 게

283 그물과 바람을 완전히 빼놓지 않은 태양 증류기와 그물이 빈 공간을 메운 덕분에 >>> 그물의 중복. 하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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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년 1월에 본 영화들
    from 그대가, 그대를 2013-02-11 14:17 
    접힌 부분 펼치기 ▼ 1. 아무르 2013년의 첫번째 영화는 오락성보다는 좀 더 의미있는 영화를 고르고 싶었다. 그리하여 선택한 첫 영화는 '아무르'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음악가 출신의 노부부에게 어느 날 위기가 닥쳤다. 아내 안느가 갑자기 마비 증세를 일으킨 것이다. 수술위험이 높지 않다고 했는데 안느는 오른쪽 마비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남편 조르주는 헌신적으로 아내를 돌보지만 본인도 노쇠해 기운이 달리는 입장에서 종일 아내를 돌보는 일은
 
 
프레이야 2013-01-21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저는 오늘 이 영화를 봤어요. 3D로요.^^
원작을 읽어보고 싶게 되네요. 많은 생각들이 은유로 비유로 떠안겨 왔어요.
스크린을 장악한 화려하면서도 몽환적인 색감도 매력적이었어요^^

마노아 2013-01-22 10:58   좋아요 0 | URL
아아, 저는 내일 보려고 해요. 하루를 기다리는 게 참 힘드네요.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아이맥스 가야겠어요.
이런 영화를 위해서 아이맥스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이안 감독이라는 것도 기대가 크구요. 히히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