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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 고종실록 - 쇄국의 길, 개화의 길 ㅣ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권에서는 헌종·철종실록을 함께 다뤘는데, 삼정의 문란을 구체적으로 언급했고, 아울러 조선 왕조가 500년 동안 어떻게 망하지도 않고 근근이 그 명맥을 이어 왔는가를 설명했다. 세계는 탐욕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고, 믿었던 중국도 종이 호랑이라는 것을 입증했으며, 일본 역시 바로 꼬리 내리고 힘 기르기에 열중했다. 그런 세계의 흐름 속에서 조선은 임금이 후사 없이 죽었다. 그렇게 19권을 맞이했다.
19권은 당연히 고종의 즉위부터 다룬다. 12세 어린 임금을 대신해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순조, 헌종, 철종에 이은 4대 연속 수렴청정이다. 왕실의 손이 얼마나 귀했는지, 얼마나 위태롭게 이어왔는지가 한눈에 보이는 순간이다. 효명세자의 요절로 현실 속 중전은 되지 못했던 신정왕후. 한때 세도가로 이름 높았던 친정 풍양 조씨도 안동 김씨 앞에선 맥을 못 추었고 궁궐의 존재감 없는 왕대비로 살아가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조카가 찾아왔다. 흥선군 이하응이다. 그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익종대왕(효명세자)의 아들로 삼아 왕실의 후사를 이으라고 권고했다. 큰 아들도 아닌 둘째 아들을 내민 것은 ‘수렴청정’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그 정도 딜은 되어주어야 대왕대비도 마음이 움직일 게 아닌가. 종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남연군의 자손 중에서 왕위 계승자가 나오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야사에서는 그녀가 안동김씨에 뒤쳐진 친정을 부흥시키고 안동김씨 일가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표현하곤 하는데, 그보다는 흥선군이 제안한 개혁 구상에 동의하고 지지했다는 게 더 합당하겠다.
드라마에서 표현되는 대원군은 늘 대궐을 출입하며 직접 회의를 주재하고 명을 내리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에서 궁으로 들어오는 전용문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대원군의 출입은 드물었다. 몇몇의 경우를 빼고는 그는 좀처럼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의 구상과 개혁은 더러 대신들의 건의라는 형식을 통했고, 대부분은 대왕대비의 입과 언문 하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그녀는 대원군의 개혁 파트너였던 것이다. 그리고 왕실의 재건이라는 대원군의 구상을 실현하는 수렴청정의 주체로서 각종 개혁을 이끌었다. 그녀의 수렴청정 기간은 2년 3개월. 고종이 15세가 되자 망설임 없이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이후 83세가 되는 고종 27년까지 살았는데 단 한 번도 정치에 무리하게 개입하거나 하지 않았다.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가야 할 때를 잘 아는 삶이었다. 절제와 위엄이 돋보인다.
살아서 '대원군'의 호칭을 받은 유일한 인물 흥선대원군. 그는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한다. 야인으로 살던 시절부터 오래 구상하고 계획했으리라. 그야말로 준비된 지도자였다. 안동김씨 세도 정치를 털어냈지만 피바람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가 인재라면 노론, 소론, 남인을 구별하지 않았고, 심지어 언제 나왔는지 까마득하게 잊혀진 북인과 차별받던 서북인들, 그리고 안동 김씨 마저도 들어서 썼다. 동원할 수 있는 인재는 다 동원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종친이라는 굴레로 재주를 썩혀야 했던 관례를 깨고 과거를 보게 했으며 관직도 내줬다. 어찌 보면 안동 김씨 세도를 능가하는 전주 이씨 세도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철퇴를 내리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가 재정 운용에 가장 큰 곤란은 세금 체납이었다. 그렇다고 백성들이 정말 세금을 안 냈냐하면 무슨 쏘리! 어떤 험한 꼴을 당하려고.... 세금은 냈지만 국가로 들어가지 않고 부패한 관리들의 곳간으로 쌓였다. 저기 저 모습들... 어디서 많이 본 모습 아닌가? 심지어 세곡을 빼돌리고 조운선을 일부러 침몰시키는 관행조차 있었다. 나라 꼴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눈에 선하다. 공무원이 먼저 이렇게 썩어버린 나라에 무슨 기대를 품을 수 있을까. 그리스가 언뜻 떠올랐지만, 남의 걱정 할 때인지 모르겠다.
각종 폐단에 대한 경고, 시정, 처단이 이어지고 바로잡는 과정들이 뒤따랐다. 권력이 집중된 비변사의 기능을 의정부에 합치면서 폐지해 버렸고, 개국 초의 삼군부도 회복해 비변사의 군사 지휘 업무를 맡겼다. 법전을 정비했고 민생 관련 개혁 조치들도 박차를 가했다. 가장 화끈했던 부분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이 실시된 것이다. 영조는 역을 균등하게 한다며 균역법을 시행했지만, 사실상 아랫돌 빼서 윗돌 괴어버리는 수준이었다. 그걸 대원군은 해낸 것이다. 영조도, 정조도 못했던 작업이다.
서원을 철폐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카리스마는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득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이 뻔뻔한 기생충들에게 본때를 보여준 것이다. 명분이 있으니 양반들은 속이 타고 애가 타도 할 말이 없는 상태.
1000여 개가 넘던 전국의 서원이 다 정리되고 47개 남았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이보다 엄청난 개혁이 있을 수 있을까. 집단 멘붕 소리가 들릴 법도 하다.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여태 재건하지 못한 경복궁의 중건. 백성에게 짐이 된 것은 사실이나 불필요한 일을 무리해서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중건 과정에서 잇따른 화재발생은 그야말로 불우했고, 당백전의 발행은 제 발등을 찍는 무리수였지만 경복궁 중건 자체는 왕조 국가에서 피할 수 없는 숙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원군은 해냈다. 지금도 전 세계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멋진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경복궁의 재탄생이다.
개혁의지 확고했고, 능력도 빼어났던 흥선대원군. 그러나 그에게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외교정책이다. 때는 바야흐로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들이 서로 뜯어먹기 바쁜 아주 살벌한 시기. 그렇지만 문 닫아 걸고 소중화만 외치는 조선은 그런 세계 정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다. 심지어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개망신 당하고 수도 베이징까지 열리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고도 말이다.
저 엄청난 격변의 시기를 연표로 확인하시라. 숨이 막힌다. 체급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먼저 문 열고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면 일본처럼 한 번 맞고 바로 생각을 돌려먹기라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은 순진해도 너무 순진했고, 상대 국가들의 탐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조선 후기 이후 지나치게 사대로 흐른 대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큰나라 눈치만 살피다가 그 나라마저도 제 앞가림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 일어난 멘붕. 그 멘탈붕괴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고, 눈치껏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야말로 무능했다. 정말 속상한 일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명백한 조선의 패배였다. 그들은 실컷 불태우고 부수고 죽이고 훔쳐서 떠났다. 사상자와 우리측 피해를 생각하면 명백한 패배이건만, 이제 그만 가자~하고 가버린 그들을 '물리쳤다'고 여겼다. 그리고 여전히 통상수교거부... 다 잘 하고도 하나를 잘못하면 실기하기 쉬운 정치판에서 엄청난 판단오류이다. 그게 조선의 한계였다.
대원군에게 아쉬운 것은 이렇게 외교정책이지만, 대원군이 쇄국을 고집했다고 해서 바로 몰락했던 것은 아니다. 세도정치 60년 동안의 폐단을 과감히 도려냈던 카리스마 대원군의 진짜 천적은 며느리였다. 바로 고종비 민씨.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서 '한미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들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세도정치를 경계하느라 믿을만한 가문을 선택했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부인 민씨 가문이었다. 민유중은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이다. 그 민유중의 5대손 민치록의 딸이 중전이 된 것이다. 비록 민치록은 죽었지만 어머니는 살아계셨고, 양오라비도 있었다. 양오라비 민승호는 대원군의 처남이기도 하다. 대원군은 이 간택을 완벽한 선택이라고 믿었겠지만 그가 후회했을 것처럼, 그리고 내 생각에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민비가 스무살이 넘고도 친정을 하지 못하는 남편의 불만을 건드린 것은 나름 자신의 처세술로도 보인다. 대원군은 탁월한 개혁가에 정치가였지만, 그가 왕은 아니었다. 열다섯에 수렴청정도 거두었는데 그후 7년이나 더 섭정을 한 셈이다. 수술대 위에 올려진 조선의 갈 길이 너무 멀어 보였겠지만, 대왕대비처럼 물러날 때를 알아야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지체하다가 그는 꼴사납게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가야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대원군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애석하다. 대원군과 민비의 사이가 그렇게 나빠지지 않았더라면 이후 역사의 격동기에 조선 왕실은 조금은 덜 부끄러은 모습으로 대처하지 않았을까 하는, 하나마나한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면서 동시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의 체결과정을 보면 일본이 보인 고압적인 자세와 말도 안 되는 생떼와 물고 늘어지기에 잠시 혈압이 올랐다. 이제 서문 첫 글자 떼었을 뿐인데 벌써 이러면 곤란하지 싶어 호흡을 가다듬지만, 역시 화나는 건 화나는 일이다. 버럭버럭!!!
게다가 중국의 우산 아래 안전하게 머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조정 대신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에 역시 더더더더욱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친정 이후 고종이 보여준 정치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열두 살에 임금이 되어 정치밥 먹은지 벌써 십년도 더 되었으니 이 정도는 해줘야 기본이지만, 그동안 아버지와 마누라 기에 눌려 살았다고 생각한 이미지와는 다소 달랐다. 평범한 시절에 임금이 되었으면 보통 이상은 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시절이 평범하지 않은 것을. 각별히 불우한 시절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 이상의 정치력을 보여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괜찮기는 했어도 역시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내게 있어 고종은.
개화파들도 마찬가지다. 명문가의 자제에, 권세가의 자제에, 임금의 부마이기도 했던 젊은이까지 개혁에 나섰다. 일신의 영달만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 의도의 첫 순수함과 열정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 됐다. 급진 개화파들이 모델로 삼은 일본의 메이지유신. 단순히 엘리트들이 정변으로 권력을 잡고 개혁을 진행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랜 존왕운동의 연장으로 '대중적 지지기반'이 있었고, 저항을 막아낼 자체의 무력이 있었다. 급진개화파에게는 둘 다 없었다.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계였다. 대중적 지지기반이 없는 개혁, 성공할 수가 없다. 오늘날 진보 운동 하는 사람들이 새겨볼 부분이다. 무지해서 생각 없이 1번 찍었다고 생각하면, 또 지는 거다.
역사는 거울이다. 과거를 통해 오늘을 진단하고, 미래를 예단한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미래도 가망이 없다. 망국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 이유이다.
저자 박시백은 이 시리즈를 '철종실록'에서 마무리 지어야 하는가 고민했다고 했다. 이후 실록은 일제 감정기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개입이 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 실록에서도 집권 당파나 세력의 입김은 작용했었다. 실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실을 담고 있고, 그러니 고종실록도 진행하는 게 마땅하다고 여긴 것이다. 다행히 오늘날에서 가까운 시기인지라 실록말고도 관련 기록이 아주 풍부하다. 당대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외국인의 시선으로 기록한 객관적 자료들도 많다. 사진 자료도 있고 말이다. 참고문헌을 보니 독자 역시 보고 싶어지는 책이 많아서 다소 흥분되었다. 역으로 이런 도움이 가능하였군!
언제나 진지함과 핵심을 뚫는 정교한 실력을 보여주지만 유머도 결코 잊지 않는 박시백이다. 소매 폭을 줄이라는 고종의 명에 대한 사대부의 저 반응을 보시라. '스키니 소매'에 빵 터졌다. 이런 순간순간의 웃음은 자주 포착된다. 바로 이 맛에 초등 저학년만 벗어나면 누구에게든 권할 수 있는 책이 되었다. 많은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글밥도 무척 많은 편이지만 지루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리고 열심히 읽은 보람이 분명 차곡차곡 쌓이는 책이다. 세계가 인정한 이 방대한 역사 기록을 이렇게 읽기 편하게 정리해 주었는데, 이 정도 수고도 하지 않는다면 역사에 미안한 일이다. 닥치고 필독, 다시 한번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