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고백
김려령 지음 / 비룡소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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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둑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누구의 마음을 훔친 거였다는 낭만적 도둑도 아니며, 양심에는 걸리나 사정이 워낙 나빠 훔칠 수밖에 없었다는 생계형 도둑도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한 도둑이다. 강도가 아니니 흉기를 지녀서는 안 되며 사람을 해쳐도 안 된다. 몸에 지닌 지갑이나 가방에 손을 대는 소매치기 날치기도 아니다. 나는 거기에 있는 그것을 가지고 나오는, 그런 도둑이다.

도발적인 첫문장이다. 스스로를 도둑이라고 밝힌 이 사람은, 올해 18세의 고등학생이다. 첫 도둑질이 일곱살 때였던, 타고나기를 섬세한 손을 가진, 그런 전천후 도둑이었다. 주인공 해일이 짝꿍 지란의 전자수첩을 훔쳐낸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감쪽같이 물건을 손에 쥐었다. 훔쳐낸 전자수첩은 중고거래로 현금으로 만들었다. 깔끔하게 손에서 떠나보내고 그 돈은 통장에 모았다. 생계형 도둑도 아닌 해일은 훔쳐내어 만든 돈을 그저 쌓아둘 뿐, 어디에 쓰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아이, 어떤 문제아인가? 도벽을 가진 것인가?

 

도벽은 아닌 것 같다. 집안도 표나게 유복하지는 않아도 무척 화목한 편이다. 노상 싸우고 큰 소리가 넘나들지만, 그래도 서로 아껴주고 보듬어주는 가족의 모습이 분명했다. 띠동갑 형은 어릴 적 천재 소리를 들으며 부모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현재는 백수다. 그렇다고 기죽어 사는 것도 아니고 '감정설계사'가 되겠다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소리를 당당하게 내뱉으며 아버지의 애를 태운다. 그런데 그 감정설계, 무척 구미가 당긴다. 우리는 모두 감정에 휘둘리는 약한 사람들이 아닌가.

 

해일이 손을 댄 전자수첩의 주인 허지란. 아빠의 전자수첩을 일주일만 빌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 아빠는 새아빠였다. 친아빠와 엄마가 이혼하고 마음으로 방황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새아빠에게 애교를 떨어서 받아낸 전자수첩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단순한 전자기기가 아니라 아이가 몇 해만에 마음을 열었던 증표였던 것이다. 그랬던 물건을 도난당했다. 그 사정을 도둑이 알까마는...

 

작품이 본격적인 재미를 주기 시작한 것은 해일이 병아리를 부화시키겠다고 유정란을 들이면서부터였다. 급하게 변명을 둘러대느라 눈에 띈 상자에 쓰여진대로 부화를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것이 판이 커졌다. 온 가족의 기대와 해일 자신의 격려 속에서 유정란 두개가 수정에 성공했고, 그 안에서 생명이 탄생했다. 이렇게 개인이 알을 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독자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체험학습 하는 것처럼 신기하고도 신비롭게 보였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병아리를 키우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격려하고 응원해주는 부모와 형님이라니, 이것 너무 근사하지 않은가! 대한민국에 이런 고등학생이 있을 수 있다니! 이 사실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다.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담임과의 사이에 벽을 무너뜨렸고, 병아리송이라는 건전한 노래로 친구들의 시선을 끌었고, 병아리 구경하기 위해서 집으로 놀러오겠다는 아이들마저 생겼다. 그리고 그렇게 몰려온 아이들을 향해 재밌게 놀라고 권하는 엄마도 있다. 아, 이 소박한 모습이 왜 이리 감동적인가.

 

병아리 이야기에 잠시 마음을 빼았겼지만, 해일의 도둑질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사이사이 해일의 빠른 손은 여전히 그 섬세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물건에도 사연이 있다. 그 물건을 사용한 사람과의 추억이 있다. 자신이 건드린 무언가가 또 다른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에게로 돌아왔을 때 해일은 당황했다. 차라리 친구들에게 들켜서라도 멈추고 싶은 욕망마저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벌을 받고 싶은 아픈 자아가 있었다. 대체 해일의 마음 속 무엇이 해일을 이렇게 도둑질하게 만들었을까. 이 다복해 보이는 가정에서 대체 무엇이....

 

지란의 이야기도 깊숙이 들어가본다. 친아빠의 외도, 행복하지 않은 엄마, 더불어 행복하지 않았던 어린 지란이의 상처가 독기로 똘똘 뭉쳐졌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도 작가는 변명을 해준다. 그래도 사랑했다는 것, 그래도 아꼈다는 것을 독자는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해서 마찬가지로 받아낼 수 없는 게 또 사랑 아닌가. 그걸 힘으로, 자격으로 밀어붙이면 그것도 폭력이 될 수 있으니...

 

작품은 무척 입체적이다. 반장병에 걸린 다영이와, 백설공주에 나오는 독사과 권하는 왕비 같은 미연이, 입은 거칠지만 나름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보이는 진오까지 저마다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자신의 캐릭터를 소화해낸다. 그 나이 또래 청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누군가는 진지한 역할을, 누군가는 유머러스한 역할을 맡았고, 누구는 다정하고, 누구는 또 까칠하다. 어느 쪽도 넘치지 않고, 어느 쪽도 모자라지 않다. 앞선 작품 완득이나 우아한 거짓말에서 보다 더 균형잡히고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전달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눈물 쏙 빼는 감동이 있다. 이 외로운 청소년들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괜찮다고 말해주는 목소리가 들린다. 궁디 팡팡!! 해가면서 격려해주는 손길이 느껴진다. 그래서 무척, 따뜻하다. 독자도 청소년들만큼이나 위로를 받은 모양이다.

 

작가님은 게다가 센스까지 있다.

 

"야!야!오늘담임중대발표가있나봐엄청엄한얼굴로온다!"

 

이 문장, 어떻게 읽히는가. 띄어쓰기가 없다. 그만큼 빠른 말로 쉬지 않고 말을 했다는 의미다. 아, 이렇게 종이 책을 오디오까지 곁들여서 표현하는 센스라니!!

 

담임 선생님의 과거 이야기가 덜 나온 것은 조금 아쉽다. 제자에게 폭행을 당한 선생님이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교단을 여전히 지킨 이 강인한 선생님. 직설적으로 학생 가린다고 말하는 선생님. 제 능력 이상의 것을 주려고 하지 않고, 오버해서 착한 선생님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여론을 조작해서 제 마음에 안 드는 학생을 따 시키려는 학생을 상징적으로 경고해주는 카리스마 있는 선생님이다. 이 선생님이 제시한 상징이 백설공주 새엄마의 '독사과'다. 요즘 독사과는 뭘까? 라는 질문에 진오가 답한다.

 

"음...... 조작으로 나쁜 여론 만들기? 우르르 몰려가서 끝장낼 수 있잖아요. 나중에 일이 잘못돼도 슬쩍 발 빼기 쉽고요. 쟤도 그랬고 너도 그랬잖아, 그런 식으로 죄책감을 n분의 1로 나누는 거죠."

 

뼈 있는 말이다. 비단 학교에서만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우리 살고 있는 세상에서 얼마든지 적용 가능하다. 지금처럼 온라인이 활성화된 상태라면 더더욱.

 

피자를 먹으면서 오고 갔던 독사과 공방은 시사점이 컸다. 과연 이런 목소리를 낼만큼 아이들은 생각이 여물었는가 잠시 머리를 갸우뚱했지만, 이런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는 우리의 교실이 비정상이라고 다시 고개를 끄덕여본다.

 

제목의 가시고백. 해일은 고백하고 싶었다. 자신이 도둑이라는 것을, 자신이 훔쳤다는 것을. 분명 가시를 뽑는 것은 큰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뽑지 않으면 그 상처는 곪을 것이다. 해일은 그 가시를 어떻게 뽑을 것인가. 어떤 고백으로?

지란도 가시가 있다. 친아빠와 새아빠의 사이에서 상처입고 자라지 못한 어린 아이를 해방시켜야 한다. 그렇게 지란의 가시도 뽑아야 한다.

 

청소년 소설은 대개 '성장 소설'로 귀결된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의 고민과 방황을 이야기하고, 이 아이들이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결핍을 메우고 그렇게 자라가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아이들은 한뼘씩 자라고, 독자는 그 덕분에 기운을 얻는다. 이미 다 자란 성인이지만, 그 아이들만큼이나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가슴 속에 하나씩 있고, 그 아이들처럼 채우지 못한 결핍을 늘 끌어안고 산다. 그리고 이런 작품을 하나씩 만나면 손톱 밑 가시 하나씩 들여다본다. 내 가시를 떨쳐낼 나의 고백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나의 가시가 혹시 나말고 다른 사람도 찌른 것은 아닌지 나의 '거울'을 쳐다본다. 내가 해치고 싶은 상대를 차지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도구로서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좋은 작품을 만나서 몹시 고맙다. 눈시울이 촉촉해지면서 내 감성 아직 죽지 않았어! 라며 실없는 웃음도 지어본다. 이 작품, 참 좋다. 참 재밌고, 참 따뜻하다. 웃음과 깨달음, 감동을 함께 전달해주는 작가라니, 독자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다. 고맙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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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1-1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가시고백, 참 좋았어요~ 다들 읽어보라 추천하고 싶은 책!
리뷰도 훌륭해요~ ^^

마노아 2013-01-11 11:46   좋아요 0 | URL
저 좀 시큰둥하게 읽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좋아지는 거예요. 저력 있어요. 근성도 있구요. 작가님이 더 좋아졌어요. 칭찬 감사해용! 저도 이 책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