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구판절판


아버지에게선 편지 한 통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편지를,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잊었다. 잊히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잊어야 했다. 1%의 기적을 기대하며 99%의 삶을 저당 잡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외롭고 나는 슬펐지만 우린 불행하지는 않았다. 책으로 지은 성채는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되는 절대적 안전지대였고 피난처였다. 그리고 만주의 전쟁터 속으로 걸어 들어간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남긴 목숨 값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다. 그것을 영원히 몰랐다면 좀 덜 슬프고, 덜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오거나, 아니면 너무 빨리 온다. 우리는 언제나 너무 빨린 만난 사랑 때문에, 너무 오래 만나지 못한 사람 때문에, 그리고 너무 늦게 알아버린 진실 때문에 아파한다.

-51쪽

간수장은 "전시 상황에서는 모든 인쇄물이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불온문서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아니라도 나는 알고 있다. 국가라는 괴물이 책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증오는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모든 국가와 체제는 책을 두려워했고 책과 불화했다. 책 때문에 나라는 망하고 군주는 쫓겨났으며 귀족들은 망명했다.

-63쪽

그때 나는 알았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모든 군인들은 문장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총탄도 포탄도 아니었다. 그것은 글이었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는 한 줄의 글로 족했다. 몇 개의 단어와 숫자, 구두점에 의해 소년들은 병사가 되고, 전장으로 이동하고,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인두처럼 달구어진 총탄에, 차가운 적의 총검에, 고막을 터뜨리는 폭발음에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 채 죽어 갔다.

-100쪽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읽는다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감각이라는 사실을. 한 줄의 문장을,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을, 혹은 그의 세계를 읽는 행위라는 것을.

-169쪽

스기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을 찾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신은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힘 있는 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신의 영광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킨다. 힘없는 자들은 신의 뜻이라는 핑계로 불의를 눈감는다. 하기야 지금 같은 시절이라면 신을 믿지 않는 자만보다 신을 믿는 어리석음이 나을지도 모를 테지.

-178쪽

사내들은 침을 튀기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가끔은 머리가 터지고 이가 부러졌다. 히라누마는 그들을 경멸하지 않았다. 그들은 경멸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폭력은 불안에 지친 그들의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시대의 쇠바퀴에 맞섰을 뿐이었다. 무식꾼은 무식한 대로, 야비한 자는 야비한 대로, 거친 자들은 거친 방식으로.

-187쪽

스기야마의 눈빛은 날이 무뎌졌다. 그는 행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약한 낭만주의자들의 지껄임이라고 외면해 왔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애써 부정해 왔던 일상의 작은 평화. 하지만 그것은 가질 수 없었기에 더욱 간절한 꿈, 꿈꾸지 못했기에 외면해야만 했던 동경은 아니었을까? 그는 한참 후에야 검열도장을 내리쳤다. 탕! 푸른 글씨가 새겨졌다. 검열 필. 엽서는 고베 항 뒷골목의 초라한 판잣집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년에게 날아갈 것이다. 소년은 프랜시스 잠을 읽을 것이다. 엽서는 소년에게 삶의 무게와 전쟁의 고통을 이길 의지를 전할 것이다. 검열은 실패했다.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212쪽

스기야마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분명히 인식했다.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다시는 변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변해 버린 자신이 두려웠다. 어떤 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읽기 전의 사람이 아니다. 문장은 한 인간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불치의 병이다. 단어와 구두점들은 몸 여기저기에 세균과 바이러스처럼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문장들은 뼈에 새겨지고 세포 속에 스며들고 자음과 모음은 혈관을 타고 흐른다. 수많은 상징과 비유는 뇌세포를 물들이고 영혼을 재구성한다. 그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가서도 안 된다.

-220쪽

동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은 스물여섯 젊은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세상이 친절하지 않으며 세월이 다정하지 않음을 알아 버린 노인의 웃음. 기대는 배반당하고, 꿈은 이룰 수 없음을 받아들인 자의 웃음.

-225쪽

스기야마는 입술을 달싹였다. 승전? 전쟁에 이긴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전쟁과 싸워 이기는 인간은 없다. 죽음과 싸워 이기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전쟁이 끝나면 모두가 패자다. 승자조차도 자신이 얻은 승리 때문에 고통 받고 파멸당한다. 그러니 이기는 자에게도 지는 자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전쟁으로 상처 입는 것은 똑같으니까.

-259쪽

스기야마는 몽둥이로 그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어 무사함을 확인했다. 자신의 몽둥이에 찢어진 이마와 부어오른 눈두덩과 터진 입술.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때로 말은 소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순간의 눈빛, 짧은 숨소리, 손가락 끝의 떨림이 말을 대신한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대화다. 스기야마의 눈빛은 수십 마디의 미안하다는 말보다 절실했다.

-269쪽

결핍은 고통스럽지만 때로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고 고양시키는 법이다. 감옥은 살기엔 고통스러웠지만 꿈꾸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그곳엔 자유가 없었기에 자유를 꿈꿀 수 있었고, 희망이 사라졌기에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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