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막대 파란 상자 Dear 그림책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 그림, 이지원 옮김 / 사계절 / 2004년 12월
구판절판


어떤 나라에 사는 클라라라는 여자아이가 아홉 살 생일 선물로 이상한 막대기 하나를 받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파란색 막대였다.
신비롭게도, 이 막대는 이 집안의 모든 여자아이들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막대는 점점 비밀스럽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클라라는 마치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막대의 유래와 원래 쓰임새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막대에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막대를 받은 아이들이 막대를 어떤 용도로 썼는지를 기록한 공책이다.
클라라 역시 이 공책에 무언가를 쓰게 될 것이다.

이 막대에 대해서 처음으로 기록을 남겼던 이는 클레멘티나다. 막대는 그 전에도 집안의 여자들에게 전해 내려왔지만, 그 사용처에 대해서 제일 먼저 기록한 사람이 클레멘티나.
그녀는 이 막대를 생쥐 키치아를 훈련시키는 데 썼다. 막대의 도움으로 키치아는 훌륭한 곡예싸가 될 수 있었다.

클레멘티나의 딸 로잘리아는 연극을 좋아했다. 해서 감자와 헝겊으로 만든 얼굴을 막대에 꽂아 배우 인형을 만들곤 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의 얼굴은 정성껏 만들어 파란 막대에 꽂았다. 파란 막대로 만든 인형은 늘 주인공이었다.

로잘리아의 조카 테클라는 동그라미 그리기를 좋아했다. 파란 막대는 모래밭이나 눈밭 위에 여러 동그라미를 그리는 데에 쓰였다. 막대를 꽂고 실을 달아 또 다른 막대를 걸면,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었다. 멋진 아이디어다!

다음 번 주인인 발비나는 나무토막이나 종이로 배를 만들어 호수에 띄우기를 좋아했다. 발비나는 손수 만든 멋진 배에 파란 막대를 붙였다. 막대가 곧 돛대의 역할을 한 것이다. 배가 바람에 떠밀려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다행히 이웃에 사는 어부 아저씨가 배를 찾아서 돌려주셨다. 덕분에 파란막대의 역사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진정 신비로운 막대다.

얌전히 말 잘 듣는 아이가 되기 싫었던 체칠리아는 막대에 팻말을 붙여서 '싫어요!'라는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오, 이것도 멋진 걸! 진정한 1인 시위다.

라우라는 파란 막대를 마법의 막대라고 믿었다. 마치 해리포터의 마술봉처럼 파란막대를 사용한 것이다. 언젠가는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으면서. 그 믿음이 배신하지 않았기를!!

클라라의 할머니인 아델라는 태양과 구름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호기심쟁이 아델라 할머니는 그림자의 길이에 관심을 갖고는 파란 막대를 이용해 해시계를 만들었다. 진정한 과학소녀의 탄생이다!

다음 장의 주인은 클라라의 엄마 테레사다. 어린 시절의 테레사는 라우라처럼 파란 막대가 마법의 막대일 거라고 생각했다.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테레사는 막대로 하늘을 나는 마법의 빗자루를 만들었. 그리고는 날마다 빗자루를 타고 침대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마녀배달부 키키가 떠오른다. 어제 늦은 밤 귀가하면서 텔레포트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어붙은 발을 구르며 생각했다. 파란 막대가 있다면 나도 그런 상상을 했을지도...

주자 언니는 천장에 커다란 하트 무늬를 그리는 데에 파란 막대를 사용했다.
천장에 커다란 색칠을 했음에도 혼나지 않고 존중해 주었다는 그 문화가 더 감탄스럽다.

이제 클라라 차례다. 클라라 역시 이 파란 막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면 무엇으로 쓸까? 칠판 지시봉으로 쓰면 아주 예쁘지 않을까, 지극히 평범한 생각을 해보았다. 체벌용이 아닌 그야말로 지시봉 말이다. 침대 밑에 들어간 연필을 꺼내는 데에도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이고.

그런데, 이 파란 막댐가 어떤 상자에 딱 맞게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자, 이제 책을 뒤집어서 뒤에서부터 다시 읽자.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떤 나라에 사는 에릭이라는 남자아이가 아홉 살 생일 선물로 이상한 상자 하나를 받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파란색 나무 상자였다.
이 상자는 이 집안의 모든 남자아이들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상자는 비밀스럽고 특별하게 느껴졌고, 에릭은 마치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게다가 상자에는 특별 선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이 상자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그 내용을 적어놓은 공책이었다.
에릭 역시 이 공책과 상자에 흠뻑 매료될 것이다.

첫번째 기록을 남긴 사람은 레오나르도다. 그 이전 세대부터 전해져 온 상자이지만, 상자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기록을 남긴 이는 레오나르도가 처음이다.
레오나르도는 상자 속에 다섯 개의 거울을 붙여 두고 놀았다. 거울이 반사시키는 빛은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주었다. 레오나르도는 거울을 빼 버리고 상자를 물려주었지만, 공책에 거울의 크기와 거울을 상자 안에 붙이는 방법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유산은 이렇게 물려주는 법이지. 혼자만 알면 무슨 재민겨!

레오나르도의 아들 빈첸티는 상자에 희귀 튤림을 심어 키웠다. 정성껏 가꾸자 춘분날에 아름다운 튤립 꽃이 피었다 한다.

빈첸티의 조카 알프레드는 상자 덕분에 100코론을 벌었다고 했다. 상자 안에 100명의 사람을 넣을 수 있다고 내기를 한 것이다. 그 사람이란 천 명도 들어갈 수 있는 종이 인형이었다.

티모테우스는 아빠가 되어 보고 싶어서 상자 안에서 달걀을 부화시켰다. 따뜻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닭이 품지 않아도 온도만 조절되면 병아리가 깨어나는겨???

루드빅은 상자 안에 세 개의 주사위를 넣었다. 어떤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상자를 흔들어서 주사위를 쏟아낸 것이다. 나온 수를 모두 합쳐 홀수면 '네'로, 짝수면 '아니오'로 결정했다고. 흥미롭긴 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보면 어떻게 던져도 앞면만 나오는 동전이 있는데, 그쪽이 더 마음에 든다.

판크라치는 공작 솜씨가 좋았다. 상자에 구멍을 뚫지 않고도 바퀴 네 개를 달아서는 멋지게 수레로 활용했다고 한다. 오늘 나는 공구 없이 커다란 철제 선반을 맞추느라 손가락이 다 아작 났다. 내게도 그런 솜씨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에릭의 할아버지 테오도르는 모래섬 '바오바' 이야기를 좋아했다. 테오도르는 자기만의 바오바 섬을 고안해 냈다. 상자 안에 두 개의 병을 주둥이가 마주보도록 설치한 다음, 가운데에 구멍을 뚫은 코르크 마개를 끼워 모래시계를 만든 것이다. 테 오도르는 이것으로 자기만의 시간을 측정했다. 그리고 그 시간 단위의 이름을 '바오바'라 정했다. 그야말로 창의력과 창조성이 넘치는 아이였구나!

에릭의 아빠 지그문트는 도자기로 만든 코끼리 인형에게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주었다. 파란 상자 안에 은박지를 깔고 물을 부은 다음 추운 겨울에 밖에 내놓아 꽁꽁 얼렸던 것이다. 오, 은박지만으로도 방수가 되는 훌륭한 상자로군! 아무튼 지그문트의 아이디어도 훌륭하다.

에릭의 형 미코와이는 상자 안에 여러 가지 실험 재료와 도구들을 보관했다. 형은 그 도구로 섣달 그믐날 밤에 불꽃놀이 실험을 했다. 오늘이 음력으로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면 미코와이가 실험했던 그날이 될 뻔했다. 그럭저럭 재밌는 우연이다.

에릭은 공책을 덮었다. 이제 그 공책을 채울 사람은 자신이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벅찬 설렘과 감동이 따라오지 않았을까. 나라면 파란 상자를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 담아 놓고 거의 열지 않는 도구로는 쓰고 싶지 않다. 가끔, 혹은 자주 열어보고 생각을 정리할 만한 무언가를 넣었으면 좋겠다. 어이쿠, 저금통으로 만들어 저축을 하는 상상은 너무 재미가 없는 걸... ^^

근데 그거 아나? 이 파란 상자에 어떤 막대가 꼭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재밌는 책이다. 먼저 만들어진 다음에 번역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가와 편집진이 '기획'해서 만든 책이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다운 번뜩이는 재치다. 다음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어린이들이라면 더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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