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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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혁명파가 농민적 성격이 강했던 반면 온건개혁파는 지주적 성격이 강했다. 특히 신분에 있어서도 정몽주 등 온건개혁파에 비하여 역성혁명파는 대체로 서얼의 핏줄을 잇고 있어서 중심부에서 한발 비켜난, 이를테면 변방 혈통이었던 셈이다.

-29쪽

스테판 에셀은 그의 작은 책 ‘분노하라’의 마지막 구절에서 "저항이야말로 창조이며 창조야말로 저항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서정분교는 저항이었으며 창조였다.
-47쪽

벽초 가문은 지금까지도 홍 판서댁으로 불리고 있을 정도로 마을 인심을 잃지 않았는데, 특히 벽초가 북으로 가면서 농지 17만평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고 떠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79쪽

경술국치를 당하여 자결한 선친의 뜻을 명심하고 항일운동에 투신한 이래 수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특히 신간회 창립 주역으로 좌우의 민족 역량을 결집했던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
-82쪽

‘임꺽정’은 단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천민을 소설의 ‘중앙’에 앉혀 놓은 작품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캔버스의 중앙, 영화의 주연은 각광받는 자리이다. 이 중앙을 하층민이 차지한다는 것은 그것으로도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임꺽정’은 계급적 저항 소설로 읽힌다. 근대적 문학평론의 오래된 준거 틀이다.

-86쪽

물론 임꺽정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가 ‘강자’의 면모로 읽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 이미지를 입히는 주류 이데올로기도 그렇지만 우리는 사회적 약자가 최소한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대응 방식에 관해서도 무심하지 않아야 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에 결코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는 문신을 하거나 성깔 있는 눈빛을 만든다. 위악을 연출한다. 생각하면, 사회적 약자는 위악을 주 무기로 하고, 반면에 사회적 강자는 위선을 무기로 한다. 극적 대조를 보인다. 시위 현장의 소란과 법정의 정숙이 그것이기도 하다.

-89쪽

종소리는 긴 여운을 이끌고 가다가 이윽고 정적이다. 소리가 없는 것을 정(靜)이라 하고 움직임이 없는 것을 적(寂)이라 한다. 1만 문수보살은 다시 산천으로 돌아가고 세상은 적멸이다.

-100쪽

우리가 반성해야 하는 것은 깨달음마저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끊임없는 불화와 긴장 그 자체가 지혜인지도 모른다.

-105쪽

우리 시대가 잃고 있는 것이 바로 조화와 소통이 아닐까. 산수(山水)는 대우라고 한다. 산과 물은 오래된 친구라는 뜻이다. 물이 없이 어떻게 산이 수목을 키울 수 있으며 산이 없이 어찌 물이 흐를 수 있으랴. 북악과 한강이 서로 환포하듯이 서로가 서로를 감싸고 어루만져야 진정한 벗이 될 수 있는 법이다. 북악이 권력의 상징이라면 멀리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한강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소통과 화해의 상징이다. 나는 서울시청이 북악이기보다 한강수이기를 바란다. 민초들의 애환과 함께 유정하게 흘러가는 700리 도도한 강물이기를 바란다. 우리 시대가 잃고 있는 공감과 소통의 다정한 공간이기를 바란다.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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