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0쪽

진로상담을 하다보면 학생들이 지닌 목표 또는 욕망의 상당부분은 부모에게서 빌려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도 서울대에 가고도 남을 실력이 있었다. 그런데 집안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목표를 이룰 수가 없었다. 너는 할 수 있다. 공부를 위해서라면 너에게 무슨 지원이든 아끼지 않겠다.” 많은 학생들이 이런 장탄식을 듣고 자라면서 은연중에 부모의 욕망을 그대로 모방합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께 바쳐진 아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너를 두고 서원 기도를 했으니 네 진로는 이미 결정된 거라고 강요받았다. 이 지독한 세뇌교육은 의문을 품지 못하게 했고, 의문을 가졌더라도 표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신학대학을 졸업했고, 아직도 신대원을 가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살고 있다. 물론 그렇게 성직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분명 있지만, 그것이 내 서원이 아니고, 내 소원도 아니고 내 욕망도 아닌데,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부모의 '욕망' 아닌가? 요새 내 가슴에 울리는 한마디는 이거다. 나를 바꿀 수 없으면 환경을 바꿔라! 엄마 그늘 아래서는 이런 강요된 욕망과 소명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인 나의 현실!

 

 

52쪽

위기가 절정에 달해 모두가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만장일치의 폭력이 시작됩니다. 평소에는 의견이 달랐던 사람들도 누군가를 죽여 위기를 해소해야 한다는 데 쉽게 합의합니다. 마녀사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가뭄이 극심한 상황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왕의 목을 치기도 합니다. 이같은 만장일치적 폭력에는 희생자의 제자나 신하까지 배신을 통해 묵시적으로 가담합니다. 예수를 죽이는 현장에서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그런 예입니다. (...) 이런 폭발적인 폭력과 희생을 통해 사회는 질서와 평화를 되찾습니다. 희생양이 진짜로 페스트를 치유하거나 자연재해를 물리치지는 못하지만, 개인 사이에 극대화되었던 불화를 정리함으로써 위기를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르면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에 대해 신성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한 개인을 의심하여 살해하고 추방한 사람들이 이제 그 억울한 개인에 대해 과도한 숭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신화화의 과정을 거쳐서 신적인 존재로 부활합니다. 이게 바로 서양의 여러 신화에서 시작되어 예수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희생양 메커니즘’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신화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장일치의 폭력. 무섭다. 마녀사냥이라고 달리 부를 수도 있는 말.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다이애나비가 떠오른다. 다이애나비가 죽었을 때 잘 울지 않던 영국 사람들이 목놓아 울고서 묵은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기사를 보았더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단지 슬퍼하고서 스트레스를 풀 사안이 아니었지만, 희생양 매커니즘을 보며 섬뜩함을 느꼈다.

 

57쪽

신문을 보든, 책을 읽든, 학벌주의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대부분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단지 몇 개의 대학만이 있습니다. 그 안에 있어서 누리는 것은 별게 없을지 모르지만, 그 밖에 있어서 누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 많습니다. 학벌은 뜨거운 감자입니다. 누구나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해법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골칫거리입니다. 모든 사람의 모방욕망이 집중되는 핵이기 때문에 그걸 쟁취하기 위한 경쟁과 그에 따른 상처도 엄청납니다. 학벌사회에서 만들어진 과도한 자신감과 열등감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모방욕망과 과도한 경쟁 속에서 우리 내면에는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 때려죽이고 싶다는 분노가 자리잡습니다.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정신병동으로 변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벌은 일종의 폭약 덩어리입니다. 어떤 계기로든 이 폭약에 불이 붙으면 무엇이라도 태울 수 있습니다.

일베 사이트를 이용하는 사용자들은 기본적으로 '분노'를 깔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이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청소년층이라면 지나친 학벌주의로 인한 폐해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또 거기 이용자들 중에는 아주 고학력에 잘 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떠오른다. 어느 쪽으로 보든 거대한 정신병동이라는 말에 공감간다. 다들 많이 아프다.

 

89쪽

중년 남성의 내면에 남아 있는 소년은 ‘지랄총량의 법칙’으로 알려진 ‘지랄’이기도 하고, ‘에너지’이기도 하며, ‘청춘’이기도 하고,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드’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색(色)’, 즉 욕망의 영역에 속한 힘이죠. 10대 중반부터 20대 후반까지 소년은 남성의 내면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춥니다. 조물주의 설계에 따르자면 바로 그 즈음에 가장 자연스럽게 분출되어야 하는 에너지입니다. 이몽룡과 성춘향이 그랬던 것처럼 주로는 섹스를 통해서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욕망을 찍어누른 사람만이 성공이란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섹스를 통해 분출되어야 할 에너지는 엉뚱하게도 도서관, 고시원, 영어학원에서 대부분 소비됩니다. 그런 에너지 소비가 ‘건강한’ 것으로 권장되기도 합니다.

남녀 불문하고 다들 비슷한 형편이라 어차피 연애할 상대방도 시간도 공간도 찾기 어렵습니다. 취직, 고시, 유학 준비에 몰두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더욱 ‘계’에 속한 인간으로 변해갑니다. 그런 극심한 경쟁을 거쳐서 겨우 결혼할 여유를 갖게 되었을 때, 상대방을 고르는 기준도 ‘색’보다는 ‘계’에 속한 것들입니다.

자연스럽게 성검사가 떠올랐다. 가정도 있고, 잘 나가는 검사가 대체 왜 피의자와 그런 짓을!!!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이유를, 김두식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도록 설명했다. 이래서 네덜란드는 모든 음성적인 것들을 양성화시킨 것일까? 지하경제의 활성화가 아니라 양성화로? 불법 성매매 문제도 과연 단속이나 음성화로 답이 있을까 싶다. 인간이란 이렇게 나약하고 본능적인데, 이성으로 누르고 덮고 감출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혹은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해야 면이 선다는 것일까.

 

105쪽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차가운 진실입니다. 그걸 알면 세상이 스산하게 느껴지죠. 그런데 그 진실이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승환이 곧잘 얘기하던 '가르마 이론'이 있다. 가르마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꾸면 본인은 어색해서 죽을라 하지만, 남들은 아무도 못 알아본다는 것으로, 곧 세상은 너에게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관심받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기보다 그 속에서 얻는 자유로움을 누린다면, 그것도 참 괜찮은 셈법 아닌가. 착한 아이 콤플렉스 따위는 버려야 한다고 자꾸 생각하게 하는 요즘이다.

 

240쪽

악의 평범성, 진부함을 이해하지 않고 히틀러만 악마라고 생각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이 만들어 유지하고 있는 수많은 악마적 씨스템의 가면을 벗겨낼 수 없습니다.

언젠가 무슨 심리 테스트 비슷한 질문지에서 본 일이 있다. 여러 사람의 리스트를 두고서 하나씩 하나씩 배제했더니 결국 남는 사람이 히틀러였다는 것. 앞에서 어떤 하자사항이 있어서 제끼고 제꼈는데, 가장 평범하고 문제 없다고 여긴 인물이 히틀러였다는 사실에 엄청 놀랐었다. 악의 평범성과 진부함. 우리같은 소시민의 모습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어린아이들조차도 '무지'를 핑계로 얼마나 사악하고 무서워질 수 있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역시 인간은 참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성선설, 그거 믿을 수 있나?

 

247쪽

마지막 순간까지 엉터리 사법씨스템에 충성하는 사냥꾼들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공통점은 바로 ‘어떤 경우에도 법과 질서는 지켜져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출전도 찾을 수 없는 “악법도 법”이라거나 “나쁜 법도 무법보다는 잣다”는 말들은 오랜 세월 이런 믿음을 대변해왔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그런 믿음을 갖도록 교육받았습니다. 그러나 규범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싸이코패스 못지않게 위험합니다.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이 이렇지 않았나. 그가 믿는 법의 질서 안에서 장발장의 헌신과 인류애 등은 결코 소화를 시킬 수가 없었다. 자신의 신념과 부딪히는 것을 감당할 수 없던 그는 제 목숨을 버리면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영화 '26년'에서 광주 진압군 출신 경호인 역시 그랬다. 규범에 대한 과도한 신뢰의 무서움을 생각한다. 짱돌을 들어야 할 때 혹시 촛불만 들었던 것은 아닐까 불안한 생각마저도 든다.

 

260쪽

길거리 범죄가 보여주는 외형상의 폭력성 때문에 사람들은 화이트칼라 범죄보다 길거리 범죄를 훨씬 흉악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버스에서 10만원을 소매치기한 절도범은 구속되고 수백억을 빼돌린 대기업 회장은 불구속되어도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수사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폭력배가 상대방 조직의 결혼식장에 난입해 칼부림을 벌이면, 검찰이나 경찰은 붙잡힌 조직원들이 “보스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아무리 부인해도 어떻게든 조각을 맞추어 보스를 공모공동정범으로 엮어넣습니다. 그런데 대기업 범죄에서 넘버투인 고용사장이 “모두 내 책임으로 이루어졌고, 회장님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아, 그러시냐”고 고개를 끄덕이며 넘버투만 잡아넣습니다. 회장님을 잘 보호한 넘버투는 잠깐 징역살이를 마치고 나와 기업에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화이트칼라 범죄, 우리나라에서 지나치게 가볍게 다뤄지는 것 같아 갑갑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자본주의의 최극단을 달리는 미국에서도 그 자본주의의 질서를 헤치는 자들에 대한 평가는 엄정한데, 어째 미국이라면 뭐든 못 배워서 안달인 우리나라에서 그런 법은 안 배우나 모르겠다.

 

272쪽

근본주의 기독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성서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목사님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의심, 동성애가 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예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의심이 기독교 신앙과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1)만약 이런 의심 중 한가지라도 사실이라면, 즉 성서에 오류가 있거나, 목사님에게 잘못이 있거나, 동성애가 죄가 아니거나, 예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면, 2)성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고, 3)성서가 진리가 아니라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으며, 4)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구원도 있을 수 없고, 5)구원이 없다면 나는 곧 지옥으로 간다고 믿습니다. 의심이 곧 지옥행 특급열차라는 논리체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의 의심이라도 품으면, 그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고,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언제나 결론은 지옥입니다.

 

내가 이런 환경에서 줄곧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그랬기 때문에 믿어야 하고, 믿겨지지 않는 상황이 오면 힘들어 하는 악순환의 고리. 그 끝엔 무시무시한 지옥이 있기 때문에 나를 다시 다그치게 만드는 상황들. 이 책은 이 부분에서 나를 가장 열광하게 만들었다. 뭔가 답답한 와중에 한줄기 빛같은 느낌. 동 저자의 다른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것도 이 대목이다.

 

274쪽

이런 단순한 프레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은 작은 불행을 겪어도 우울, 불안, 편집증, 공황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모든 불행은 내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안은 근본주의 교회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의심할 줄 모르는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불안의 노예가 되어 이미 충분한 벌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근본주의 기독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다른 신앙의 길도 있습니다. 성서의 규범이 갖는 역사적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고도 충분히 좋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도 어차피 매일 의심하는 삶을 삽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서의 무오류성을 의심하면 기독교인이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니면 지옥 가고 이땅에서 불행을 겪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의심을 드러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걷어내고 의심을 솔직히 나누는 공동체가 오히려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결국은 불행입니다.

나를 반성해 보는 것과 이 책에서 지적한 프레임에 갇힌 사람의 불안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두려움을 걷어내고 의심을 솔직히 나누는 것이 더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옳다. 아, 그런데 이 부분을 보고 나니 다시금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생각이 꼬리표처럼 따라온다. 의혹이 있다면 걷어내고 안심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나. 결과가 뒤집힐지 안 뒤집힐지는 모를 일이고, 그것보다 의혹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인데 말이다.

 

301쪽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잘 다독이며,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고, 깊은 내면을 이웃과 나누다보면, 나도 모르는 새 주변에는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이 하나씩 늘어납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 혼자서도 행복할 줄 아는 개인, 사냥꾼의 광기 속에서 남을 지켜주려는 따뜻한 이웃,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동지 들이죠. 그런 개인들과 아주 작은 연대가 싹트고 나면, 이 험한 정글 속의 삶도 한결 견딜 만합니다.

마무리에서 위로를 얻는다. 욕망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 작은 연대의 싹이 이 험한 정글 속의 삶을 견딜 만하게 해줄거라는 것까지도. 여기저기서 '힐링'을 외친다. 힐링이 너무너무 필요할 만큼 아픈 세상에서 살고 있다. 무엇이든 힐링이 될 수 있다면, 책은 그 중에서도 참 괜찮은 힐링 도우미다. '욕망해도 괜찮아' 제목도 마음에 든다. 사실 '욕만 해도 괜찮아'로 읽고 싶을 만큼 삐뚤어진 요즘이지만, 그런 것조차도 괜찮다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자가 힐링에 적합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