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하루 - 실록과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 하루 시리즈
이한우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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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하루’라는 제목이 흥미를 돋운다. 조선의 지존이지만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그 왕의 하루가 어떠할지 관심이 갔다. 왕의 공적인 하루와 왕의 사적인 하루 역시도.

 

책은 세 개의 주제를 담아냈다. 1부는 ‘역사를 바꾼 운명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태조 이성계, 연산군 이융, 광해군 이혼, 소현세자 이왕과 정조 이산의 하루가 펼쳐졌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하루를 소개했다. 태조 이성계의 입을 빌려 저자는 그가 조선을 개국하던 그날까지도 고려의 중흥을 기대했고, 위화도 회군 역시 그가 새 왕조를 열 목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었고 백성의 바람이었다고. 글쎄다. 그다지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저자 스스로도 위화도 회군은 왕명을 어긴 정도가 아니라 반역이라고 말을 했으니.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문을 열었던 그날이 역사를 바꾼 운명의 하루였다는 것에는 물론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그 순간까지도 고려의 중흥을 바랐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고려의 충신으로 시작을 했을지언정 그는 분명 새 왕조를 열었다. 그것도 주도적으로. 주변에서 팔 걷어붙이고 밀어붙였다 해도 그가 한사코 만류했다면 그는 고려의 마지막 신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조선의 태조가 되었다고 해서 사적 탐욕으로 인한 결과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만큼 당시 고려가 썩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내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고 말을 하는 것은 어째 덜 당당해 보인다.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린 연산군 부부상이다.)

 

연산군 이융의 파멸은 그가 당한 것이 아니라 ‘자초’한 것이라고 그의 입술을 빌려 설명했다. 연산군이 아니니 장담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왕위에서 쫓겨날 무렵의 언행은 실로 비정상이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향응을 누리며 아주 퇴폐적으로 살았는데, 영화 ‘왕의 남자’에서 그려진 모습처럼 그는 행복해 보이기보다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니 소제목 ‘허무가 불러온 파멸’이란 제목도 잘 어울린다.

 

광해군 이혼의 하루는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던 날을 묘사했다. 저자는 광해군의 입을 빌려 요사이 추켜세워지고 있는 그의 ‘중립외교정책’이 호도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과장된 재평가라는 것이다. 이 부분도 글쎄, 나는 너무 깎아내린 것이 아닌가 싶다. 과대평가된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잘 짚어낸 부분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불필요한 전쟁을 두 번이나 일어나게 한 인조에 비한다면 그가 받아온 평가들은 그의 죄업보다 늘 가혹해 보였다. 그래서

 

내성외왕(內聖外王)에 다가가려 했던 선조의 꿈은 아들 광해군에 의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119쪽

 

와 같은 표현은 동의할 수가 없다. 오히려 광해군에게 이런 불우한 업보를 남겨준 원죄는 선조에게 있다고 믿고 있다. 늦은 나이에 계비에게서 아들을 본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솔직히 어쩔 수 없었다고 여기지도 않지만) 자신의 적자 콤플렉스로 후왕의 불안감을 부추겨서는 안 되었다. 선조의 행실이 영창대군의 비극을 불러왔고, 이어서 광해군의 비극도 낳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서 이미 병자호란의 오욕이 싹튼 거라고.

 

 

(선조의 글씨와 그림이다.)

 

 

소현세자 이왕의 하루는 그가 죽던 날의 하루였다. 알려졌다시피 소현세자는 독살된 흔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저자는 인조의 방조로 소현세자가 죽었다고 묘사했지만, ‘방조’는 좀 약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인조의 주도로 진행되었지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다는 게 맞지 않을까? 세자가 죽은 뒤 이루어진 뒤처리를 본다면 말이다. 사실 인조가 직접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아들을 죽인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말은 안 되지만, 권력이란 부자 사이에서도 나눌 수 없는 무서운 습성을 지녔으니. 저자는 숙종 대에 가서야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이 신원되는 것을 두고 소현세자 이후 왕실의 아들이 귀해진 것을 ‘저주’로 보고 그것을 풀려고 한 노력이라고 보았다. 조선 왕조 내내 적자로 왕위가 계승된 사례가 그다지 없기도 하지만 확실히 후기로 가서는 아들이 무척 귀해진다. 그래도 숙종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는 표현은 너무 단정적인 게 아닐까 싶다. 강빈의 신원에 대한 이야기는 숙종 이전에도 나왔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것이고, 숙종 때에 가서는 보다 자유로워진 까닭이지 싶다. 왕권도 그만큼 강해졌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정조 이산의 하루에 대해서 묘사했다. 역시 숨을 거두던 날의 하루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수많은 의혹을 부정하며 노론 벽파에 의한 타살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직접적인 타살은 아니어도 그가 받은 스트레스가 사인이 되었을 수는 있다고 여기지만.

 

다섯 군주의 역사적 하루에 대해서 묘사한 부분은 길지 않다. 나머지는 그 임금들의 역사적 하루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길게 설명했다. 역사적 맥락이 있어야 그 극적인 하루도 설명이 될 테니 말이다. 이 부분에서 나로서는 기존에 읽었던 여러 역사책들과 내용이 많이 중첩되어서 다소 지루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을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2부는 ‘군신이 격돌한 전쟁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전개된다. 이방원과 정도전 편에서는 혁명 동지들의 비극적 결별을 다루었고, 수양과 김종서 그리고 한명회 편에서는 군신 대립의 뿌리를 찾았다. 성종이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한명회에 맞서 대립하는 장면에서 잠시 응원하는 마음도 생겼지만, 결국 한명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아서 애석함을 느꼈다. 자유로울 수 없는 권력의 뿌리였던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태종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혁명 동지를 베어버림으로써 후세에 남을 빚을 스스로 갚아버렸으니 그 결단력이 대단해 보인다. 그에게 희생된 사람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명회가 등장했으니 수양대군의 계유정난도 같이 소개되는 게 마땅하다. 똑같이 작전이 사전에 세어나가서 위기를 맞았는데, 뽑은 칼을 휘두른 세조는 왕이 되었고, 계획을 뒤로 미룬 단종 복위 세력은 사육신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죽었다. 후세에 이름은 남겼지만 중대한 결정 앞에서 문신의 머뭇거림과 무신의 결단력이 대조되는 순간이라 안타까웠다.

 

이런 대조성은 중종과 조광조 편에서도 소개된다. 성리학적 이상 세계를 꿈꾼 조광조와 왕권 강화를 꿈꾸며 그의 손을 빌린 중종의 길은 어긋날 수밖에 없다. 속전속결로 덤벼야 할 일도 있지만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이고 인내를 키워야 하는 일도 분명히 있다. 서둘러 왕권을 강화하려던 예종이 의문스럽게 죽었고, 서둘러 훈구파에 대항해 사림파를 키우려 했던 조광조도 기묘사화와 함께 스러졌다. 그러나 또 오묘하게도, 조광조는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 내내 추앙받았고, 제자리걸음으로 왕위를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중종은 사관으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5성(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으로부터 공문십철(공자의 뛰어난 열 제자)과 송나라 때의 주자학자 6명을 기리면서, 동시에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에서 고려의 안향과 정몽주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따라서 서인들은 종묘보다는 문묘에 배향되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고, 당파의 문묘 배향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거는 적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268쪽

 

유교의 나라 조선이니 문묘 배향이 민감한 것은 당연했다. 저자는 서인과 문묘 배향 편에서 군주를 초월한 공자의 권위에 대해서 다뤘는데 이 부분이 가장 재밌게 읽혔다. 종묘에 배향되는 것보다 문묘에 배향되는 것을 더 영예롭게 여겼던 서인들이니 군권보다 신권을 더 위에 놓았다는 평가가 적절해 보인다. 그러니 그들의 권력욕이 의문사를 의심케 하는 임금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관점들도 지나치게 보이지 않는다. 신하들은 종묘 배향을 두고 싸웠고, 그들이 여기에 목숨을 거니 그걸 이용해서 줄다리기를 하는 임금도 당연히 나왔다. 인조와 숙종이 그랬다. 확실히 남의 손으로 왕이 된 중종의 반정과 제 손으로 왕위를 차지한 인조의 반정은 격이 달랐다. 주도권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인조는 적절히 밀당을 하면서 제 권력을 지켰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을 허락하지 않았다. 반면 숙종은 배향을 허락하되, 정권이 바뀌면 제 말과 행동을 뒤집었다. 왕권을 높일 수만 있다면 언사를 뒤집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숙종이었다. 그의 왕권은 높아갔지만 정치질서는 무너졌고, 그가 부추기거나 방조했던 탓에 서인과 남인은 죽고 죽이는 관계로 정착되어갔다. 인조만큼이나 나쁜 임금이다.

 

마지막으로 왕과 실록 편에서는 역사를 두고 벌이는 전쟁을 담아냈다. 역사전쟁!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기록 유산에도 등재된 만큼,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치열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사관들이 왕권에 맞서 지켜낸 그 결기도 존경스럽다. 그리고 그 가치 앞에서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은 태종의 결정도 멋졌다. 좋은 선례가 이후 조선왕조의 역사 줄기를 바로 잡아준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선 결과가 나오자마자 5.16이 쿠데타에서 ‘혁명’으로 둔갑하는 작금의 사태가 심란하기 짝이 없다. ≪월간 박정희≫가 복간되는 판이니 앞으로 놀라고 한숨 쉴 일은 꽤 많을 테지만.

 

3부는 ‘하루’라는 의미에서 가장 이 책의 주제에 잘 맞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왕의 첫날이 되는 ‘즉위식’과 왕으로 다듬어 가는 제왕학 수련, 그리고 정치 행위의 결정체로 꼽힐 ‘왕의 결혼’, 그리고 묘호에 담긴 정치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 내용들은 모두 조선 전체 임금에 대해서 짧게나마 언급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통사이자 주제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권력 앞에 선 아버지와 아들들’이라는 제목으로 부자 사이의 권력 다툼에 대해서 다뤘다. 영조와 사도세자, 태조와 태종과 달리 효심이 깊었던 세종과 문종의 이야기도 소개되었다. 세조 역시 세종에게는 효를 다했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세조만큼 큰 불효자가 있나 싶다. 역시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공효와 사효가 충돌한 정조에 대해서 소개하고 책이 끝났는데 마무리가 좀 급작스럽게 느껴졌다. 뭔가 좀 더 뒷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말이다.

 

책을 다 읽는데 꽤 오래 걸렸다. 제목은 무척 흥미로웠는데 기존에 읽었던 역사서와 중첩되는 부분들이 많아서 진도가 조금 더뎠고, 이번 한주는 얼마나 폭풍같은 날들이었던가. (하아, 잠시 한숨 좀 쉬고 지나가자....) 때로 저자의 의견에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은 각자 생각이 다른 것이니 얼마든지 서로 이야기할 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아쉬운 대목들이 있는데 좀 옮겨보겠다.

 

72

성균관에 입학하게 될 경우 외부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에 관해 어떤 식으로건 듣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성균관에 입학을 해도 형식적인 것일 뿐, 등하교를 하는 게 아닐 것 같은데 좀 이상하다.

274

숙종 대 말인 1712년 유생 1,000여 명이 상소해 청하면서 김장생의 문묘 배향 운동이 시작됐다. 이때는 숙종이 친왕적인 소론을 물리치고 노론과의 타협을 시도할 때였다. 결국 운동을 시작한 지 5년 만인 1717년 상소가 받아들여져 문묘의 동무에 배향됐다. 동무란 문묘의 정면을 바라보고 오른쪽을 말한다. 왼쪽보다 더 권위 있는 자리다.

>>>문묘 입장에서 왼쪽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나 싶다. 조선에선 왼쪽이 더 권위 있는 자리이니까.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은 것처럼.

304

단종의 경우 역시 눈물의 즉위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양과 안평대군 등 권좌를 노리는 숙부들이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 안평대군도 수양과 마찬가지로 권좌를 노렸던 것일까?

309

정조가 영조의 유언을 무시하고 폐묘를 쓴 것을 생각한다면

>>> 폐묘를 썼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329

≪대학≫보다 ≪소학≫을 중시한다는 것은 왕권보다는 신권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유가 궁금하다.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343

그 후 신씨(연산군의 비)는 중종의 배려 속에 편안한 삶을 살다가 1537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부적절한 표현 같다. 편안한 삶이었을 리가. 그냥 천수를 누렸다 정도가 맞아 보인다.

363

왕위는 사실상 세자 역할을 해왔던 후궁 소생 광해군이 이었다.

>>> 사실상 세자 역할이라니, 실제로 세자였지 않은가. 무려 17년이나.

364

그나마 (광해군은) 67세까지 천수를 누렸다는 점에서 곧바로 죽임을 당한 연산군과는 차이가 있었다.

>>>연산군은 병사가 아니었나? 타살이었나?

365

한마디로 영조 이후의 묘호는 엉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따른 왕실 권위의 추락과도 무관하지 않다.

>>>영종이 영조가 되고 정종이 정조가 된 것은 고종이 황제가 됨으로서 추존하여 바뀐 게 아니었던가?

383

왕위는 이복동생 적자 명종에게 넘어간다.

>>>인종도 적자였는데 굳이 명종 앞에 ‘적자’라고 붙이는 건 적절치 않아 보인다.

 

외삼촌 윤원형의 폭정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효자라고 평하기는 곤란하다.

>>>윤원형 폭정 시대는 일부러 연 것이 아니고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그리 된 게 아닌가? 열 두살 명종이 어머니를 어떻게 거스르나? 그로 인해 불효자가 된다는 건 좀 납득이 안 된다.

383

선조의 길이 아닌, 성종의 길을 따른 것이다.

>>인조가 선조의 길이 아닌 성종의 길을 따랐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수정했으면 하는 부분들이 있다.

 

51

홍산에서 대승를 거둔>>> 대승을 거둔

70

연산군의 ‘친모’ 역할을 했던 정혜왕후 윤씨>>정현왕후

99

신성군과 신립은 둘 다 임진왜란이 터지던 해에 세상을 떠나지만이 혼인은>>>떠나지만 이 혼인은

136

1636년 조선 조정은 군왕의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을 청의 수도 심양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1637년

153

이조판서이나 병조판서를>>>이조판서나

172

밖에서는 둘째 형님인 익안공 이방의와 셋째 형님인 회안공 이방간이>>>셋째 형님과 넷째 형님으로 수정

207

군권을 통괄하는 중외병마 도통사>>>내외병마로 검색이 되던데 어느 게 맞는지 모르겠다.

222

예종의 분경 엄단 지시는 구체적으로 ‘종친, 재추, 공신’를 찍어서 >>>공신을 찍어서

233

한명회가 그만큼 중국 사신 정동와 밀착해 >>> 정동과

286

전주에는 실록뿐 아니라 경기전에서 태조의 어진도 모신 경기전도 있었다.>>> 경기전 중복

287

1599년 마침내 7년 전쟁은 끝났다. >> 1598년이 아니라?

299

원상 제도는 어린 성종이 즉위할 때 수렴청정의 보완 방식으로 설치된 임시 제도다.

>>> 예종 때부터라고 알고 있다. 제도로 확립되기 전에는 단종 때의 김종서가 해당되기도 하고...

304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1455년 윤6월 11일 경복궁 사정전에서 노산군을 알현한 후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갖는다.

>>>이때는 노산군이 아니라 ‘상왕’

323

세조는 당시의 석학들을 불러모아 함께 ≪주역≫을 읽고 읽기 편하도록 >>> 읽고의 중복. 쉼표가 들어가거나 다듬을 필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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