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하루 - 실록과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 하루 시리즈
이한우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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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루에 물시계와 함께 큰 종이나 쇠북을 걸어놓고 밤 10시경에 종을 스물여덟 번을 쳐서 인정을 알리면 도성의 8문이 닫히고 통행금지가 시작되며, 새벽 4시경인 오경삼점에 종을 서른세 번 쳐서 파루를 알리면 도성의 8문이 열리고 통행금지가 해제됐다. 이 제도가 언제부터 실시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학계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하고 도성 구축을 완료한 후부터로 추정한다. 인정에 스물여덟 번의 종을 울리는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 28수에 고하여 밤사이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고, 파루 때 종을 서른세 번 치는 것은 제석천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 고하여 그날 하루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불교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인정이 울린 후 도성 안에서는 통행이 금지됐는데 이를 어기는 사람을 범순자라 했고 이들을 단속하는 사람을 순작군이라 했다. 범순자는 경수소에 구금했다가 그 다음 날 위반한 시간에 따라 10도, 20도, 30도 등 차등 있게 곤장형을 집행했다.
-10쪽

즉위와 함께 선조는 궁중 법도에 따라 명종의 양자로 입적됐기 때문에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혼인을 할 수 없었다. 인순왕후를 비롯해 주변 신하들은 선조가 여자 문제에 대해 좀 더 인내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정비에 앞서 후궁을 들일 경우 훗날 후사 문제가 복잡하게 뒤얽힐 수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당시 혈기를 참기 힘든 십대 후반이었고, 방계승통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지존은 지존이었다. 제도적으로 혼인은 금지돼 있었지만 남녀 문제는 사생활이었고 제3자가 왕의 사생활을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선조는 정식 혼인에 앞서 궁중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 나인을 가까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바로 임해군과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다. 실록에는 ≪선조수정실록≫에만 공빈 김씨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단 한 건 실려 있을 뿐이다.
-85쪽

성패의 갈림길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수양은 결심했다.
"저들이 알았다 하더라도 회의하는 데 3일, 계획을 세우는 데 3일 약속하는 데 3일로 쳐도 족히 8,9일은 걸릴 것이다. 우리가 정한 10일의 기한만 어기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말이 자꾸 입에서 나오면 비록 사람은 알지 못하더라도 귀신이 알고, 귀신이 알면 결국 사람이 아는 것이다. 혹시라도 입밖에 내지 말고 더욱 조심해 기다리거라. 그리고 다시는 와서 의논하지 말라."
-219쪽

겸재 정선의 그림 중에서 <압구정도>를 보면 압구정의 모습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 후 이 정자는 박영효의 소유가 되었다가 갑신정변이 일어나 박영효가 국적(國賊)으로 일체의 재산이 몰수될 때 헐렸다고 한다.
-228쪽

17세 안팎의 나이였던 조광조는 ‘소학 동자’ 김굉필로부터 학문보다는 인격적인 면에 깊은 감화를 받았을 것이다. 물론 조광조 자신에게도 그런 면모가 내재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시대적으로는 연산군의 폭정과 난행이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폭정과 도덕절대주의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244쪽

1515년 2월 하순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 윤씨가 그토록 기다리던 원자(훗날의 인종)를 낳은 후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3월 1일 장경왕후 윤씨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들자 중종은 궁 밖으로 ‘피병’을 하겠다고 했다가 승정원으로부터 일종의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전염병이 아니라 산후의 질병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에 앞선 1월 3일에는 "아직 국본이 세워지지 않았다"며 후궁을 들이라는 어머니의 권고를 신하들에게 밝혔다가, 우의정 김응기의 거센 반론에 부딪힌 바 있었다. 장경왕후가 만삭일 때에 이런 논의를 했던 것이다.
-249쪽

장경왕후가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조정은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장경왕후 윤씨의 아버지는 윤여필, 어머니는 병조판서를 지낸 박중선의 딸이었다. 당시 조정은 반정공신 트리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그중 박원종이 바로 박중선의 아들이다. 반정 직후 중종의 부인이었던 단경왕후 신씨를 강제 폐비시키고, 조카딸을 후궁으로 밀어넣어 제1계비의 자리에 앉힌 것도 다름 아닌 박원종이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일까? 성종 즉위 초 한명회가 했던 역할을 중종 초에는 박원종이 하고 있었다.
-249쪽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5성(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으로부터 공문십철(공자의 뛰어난 열 제자)과 송나라 때의 주자학자 6명을 기리면서, 동시에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에서 고려의 안향과 정몽주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따라서 서인들은 종묘보다는 문묘에 배향되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고, 당파의 문묘 배향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거는 적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268쪽

특이하게도 수정의 범위가 가장 미미했던 ≪숙종보궐정오≫를 제외한다면 역대로 수정, 개수, 수정 등의 작업을 추진한 세력은 서인과 노론이었다. 그들은 역사를 장악해야 당대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권력을 쥘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284쪽

조선에서 즉위식은 기본적으로는 상중에 치러지기 때문에 길례가 아닌 흉례로 분류된다. 지금 보았듯이 세상을 떠나고 정상적으로 성장한 세자가 왕위를 이었을 때 즉위식 현장은 눈물바다가 될 수밖에 없었다.
-302쪽

정희왕후 윤씨가 왕비가 되면서 파평은 하루아침에 파주목으로 승격된다.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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