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활한 난자와 2등 정자의 만남, 임신   FUN 과학

제 1738 호/2012-11-14

교활한 난자와 2등 정자의 만남, 임신

밤 10시. 태연과 엄마, 아빠 온 가족이 스스슥~ 빠른 동작으로 쿠션을 하나씩 안고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다들 신령스러운 무언가를 앞둔 듯 무척 경건한 태도로 TV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드디어 드라마 시작!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 무척이나 잘난 여러 명의 남자들이 가난하고 별로 예쁘지도 않으면서 성격만 활발한 어벙한 여자가 좋다고 경쟁을 벌인다.

“여보, 도대체 저런 여자가 뭐가 좋다고 저 훤칠하고 돈 많은 남자애들이 죽자 살자 매달리는지 몰라. 나보다 훨씬 못났구만.”

“당신은 매번 흉보면서도 왜 그렇게 열심히 드라마를 보나 몰라.”

“엄마 아빠는 진짜 모르는구나. 난 다 아는데. 원래 처음에 사람이 만들어질 때도 정자들이 난자를 만나려고 미친 듯이 달려가잖아요. 그런데 수 억 마리가 달려가도 1등으로 도착하는 정자만 난자를 얻을 수 있죠? 수많은 정자가 난자에게 달려가듯, 수많은 남자들이 한 여자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게 바로 인생인거죠.”

엄마, 아빠는 멍해져서 태연을 바라본다. 드라마와 태아 수정의 과정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그런데 태연아, 네가 뭔가 좀 잘못 아는 게 있구나. 실은 1등이 아니라 2등으로 도착한 정자가 난자와 만나게 된단다. 보통 정자는 한 번에 1~2억 개 정도가 방출되고, 자궁에 들어간 정자들은 나팔관까지 15~20cm의 힘든 여행을 하게 되지. 다행히 자궁이 정자를 끌어들이는 운동을 하기 때문에 난자까지 가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지만, 질 내에서 분비되는 산성 물질에 죽기도 하고, 자궁경부에 사는 대식세포에 잡아먹히기도 하고, 때로는 방향을 잃어버리기도 한단다.”

“아니,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뚫었으면 1등으로 도착한 정자가 난자를 만나는 게 맞잖아요. 그게 제일 힘이 쌔고 똑똑한 놈이니까요.”

“그러나!! 1등 그룹 수백 마리들은 장렬히 살신성인 하는 것을 선택한단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려면 먼저 난자를 싸고 있는 난구세포를 없애야 하는데, 그 일에 온 힘을 쏟고는 그만 지쳐서 쓰러져 버리지. 진정 멋진 싸나이들 아니냐!!! 그러고 나면 2등 그룹들이 도착하고, 그 가운데서 가장 운동성이 좋은 놈이 난구 안쪽의 투명대를 통과해 난자의 세포막과 결합한단다. 그렇게 정자를 받아들이면 난자는 투명대를 두껍게 만들어서 다른 정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버리지.”

“헐~ 대박!! 그럼 내가 1등이 아니라, 1등의 희생을 밟고 얍삽하게 기회를 노린 2등 정자로부터 태어났단 말이에요? 완전 실망이에요!!”

“얍삽한 걸로 따지자면 난자도 뒤지지 않아요. 보통 정자만 경쟁을 하고 난자는 그냥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단다. 오히려 더 치열하지. 배란이 되려면 난포가 성숙돼야 하는데, 보통 월경 85일 전부터 여러 개의 난포가 같은 출발선 위에 서서 경쟁을 시작한단다. 아, 여기서 난포란 난소조직에 있는 주머니 모양의 세포집합체로 난자를 포함하고 있어. 아무튼 경쟁을 시작한 난포는 가장 성장이 빠른 우성난포가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교활한 꼼수를 쓰게 되는데, 다량의 여성호르몬을 만들어 자신의 성장은 촉진시키고 난포자극호르몬(FSH) 분비를 억제해서 다른 난포들은 퇴화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같이 출발했다 해도 가장 뛰어난 난자 하나만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배란이 된단다.”

“와~ 완전 드라마에요. 형의 희생을 딛고 얍삽하게 여자를 차지하는 동생과, 여러 자매들이 가진 것을 쪽쪽 빨아서 결국 자신이 모든 걸 차지해 버리는 교활한 여자. 드라마 속 인간의 본성이 정자와 난자 시절부터 생겨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대단한데? 드라마 박사가 따로 없구나!”

“제가 공부는 꼴찌지만 드라마 분석은 일등이라고요. 그런데 아빠, 그렇게 힘들게 정자와 난자가 만났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고난 없이 아기가 만들어지는 거죠?”

“그게 그렇지 않아요. 수정란에서 배아가 형성된 이후에도 70% 정도는 자궁 안에서 살아남지 못한다고 해.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임신이 됐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하지.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는 태아는 자연적으로 유산이 되고, 자궁이나 엄마의 건강상태에 따라서도 유산이 되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태연이는 수억 대 일의 경쟁을 뚫은 데다 유전적으로도 아주 훌륭했기 때문에 이렇게 태어날 수 있었던 거란다. 그런데 우리 태연이, 이런 일에 관심 많은걸 보니 사춘기가 된 건가?”

태연은 가소롭다는 듯이 엄마 아빠를 보며 썩은 미소를 날린다.

“흥! 제가 아직 아이로 보이세요? 벌써 알만한 건 다 안다고요. 제 출생의 비밀을, 엄마 아빠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해서 제가 태어났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요!”

엄마와 아빠, 얼굴이 벌개져서 서로를 바라본다.

“두 분이 사랑을 하셨겠죠. 그런데 친할머니가 죽어라 반대를 하셨을 거예요. 그건 엄마가 친할머니 첫사랑의 딸이었기 때문이었죠. 할머니는 엄마와 아빠가 배다른 오누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할머니와 첫사랑 사이를 찢어버린 집안의 원수가 있었고, 아빠는 마침내 그 원수를 찾아내 인생을 망가뜨려 버렸어요. 복수를 하신 거죠. 그리고 끝내 어머니와 결혼을 쟁취해내셨고, 저같이 완벽한 딸을 얻게 되셨어요. 어때요, 제 말이 정확히 맞죠?”

엄마, 아빠 넋이 나간다. 아빠, 당장 TV를 꺼 버린다.

“태연, 오늘부터 드라마 한 달간 금지! 드라마 중독 부작용이 심해도 너~무 심해~!”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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