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우리 민족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추석이다.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먹고, 보름달을 보며 소원 빌고, 강강술래를 하고 놀며, 조상의 산소를 찾아 성묘하는 풍요로운 날이다. 이렇듯 ‘추석’ 하면 다양한 것들이 떠오르는데,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햅쌀밥’이 있다. 봄부터 자라난 벼가 황금들판을 이룰 때 즈음 음력 팔월 보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벼를 길러 쌀을 먹는 나라는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지만, 밥맛으로 따지자면 우리나라를 따라올 데가 드물다. 중국 청나라에서도 조선의 밥짓기를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한데다 솥 안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고 칭찬한 바 있다. 쌀을 물에 불려 익히는 우리 솜씨가 그만큼 탁월했던 것이다.
솜씨 좋은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밥맛 중에서 으뜸을 꼽자면 햅쌀밥이다. ‘새로 얻은 곡식’이라는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도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쌀은 찧은 뒤 7일이 지나면 산화가 시작되고 15일이 지나면 맛과 영양이 줄어든다. 또 쌀의 수분이 16%일 때 밥을 지으면 가장 맛있다고 알려졌는데, 갓 수확해 도정했을 때 수분이 딱 그 정도다. 햅쌀로 지은 밥에서 괜히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촉촉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쌀 품종도 맛있는 밥을 만드는 데 한 몫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찰지고 기름진 밥은 ‘자포니카’라 불리는 쌀로 만든다. 자포니카는 쌀알이 짧고 둥글면서 끈기가 있는 계열로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에서만 재배된다. 전체 쌀 생산량에서 10%밖에 차지하지 않지만 밥맛 면에서 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먹는다는 ‘인디카’보다 뛰어나다.
인디카는 인도와 파키스탄 등 동남아시아에서 주로 재배하는데, 쌀알이 길고 찰기가 없는 종이다. 안남미라고도 불리던 이 쌀은 우리나라가 과거에 구호미로 받아먹기도 했다. 찰기가 없는 인디카로 지은 밥은 푸석푸석한 느낌이며 주로 카레 등 소스에 버무려 손으로 먹는 풍습이 있다. 이밖에 ‘자바니카’라는 종도 있다. 이 쌀은 두 종의 중간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주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섬에서 재배된다.
[그림] 쌀알이 짧고 둥글며 끈기가 있는 자포니카 품종(좌)과 쌀알이 길고 푸석한 인디카 품종(우). 사진 출처 : 위키미디어, sxc 그런데 최근에는 날씨가 문제다. 우리 입맛에는 자포니카가 딱 맞지만 지구온난화가 지속되고 이상기후가 많아지면서 기존과 같은 쌀 품종은 점점 재배하기 어려워지고 있어서다. 그렇다고 입맛에 안 맞는 인디카를 들여와 재배하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포니카처럼 끈기를 가지면서 인디카처럼 열대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품종을 개발하려고 준비 중이다.
사실 두 종을 합쳐서 만든 쌀은 이미 1960년대에 등장했다. 우리가 ‘보릿고개’를 넘는 데 크게 기여한 ‘통일벼’가 그 주인공이다.
故 허문회 박사는 수확량이 많은 인디카와 밥맛이 좋은 자포니카의 장점을 모으려는 계획을 성공시켰다. 당시로서는 일본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획기적인 기술이었는데, 그 이유는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교잡이 유전적으로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었다.
유전학적으로 너무 먼 종끼리는 교배도 쉽지 않고 ‘잡종불임’의 문제가 생긴다. 이는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가 새끼를 낳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당시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교배시켜 얻은 벼에서는 쌀알이 쭉정이가 됐다. 허 박사는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잡종이 쭉정이가 될 때, 다시 제3의 품종과 교배시켜 불임 현상을 없앴다. 이렇게 탄생한 통일벼 ‘IR 667’ 품종은 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려 보릿고개를 이겨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통일벼는 수량은 많지만 쌀의 품질과 밥맛이 좋지 않았고, 저온에 약했다. 1972년에는 추수를 앞두고 닥친 냉해 때문에 대흉작을 거뒀고 1978년 도열병과 1980년 냉해를 겪으면서 약점을 드러냈다. 결국 정부가 1992년 쌀 수매 대상에서 통일벼를 제외시키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통일벼만큼 쌀 수량이 많으면서 밥맛도 좋은 품종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는 1970년부터 계속됐다. 그 결과 개발된 주남벼와 대안벼, 계화벼 등은 수확량이 많고 품질도 좋은 자포니카 품종으로, 벼의 키를 낮춰 바람이 불어도 덜 쓰러졌다. 이후에도 태풍이나 봄철 저온현상 등을 견디는 품종 연구가 계속됐고, 동진벼나 운봉벼처럼 재해에도 견디면서 수확량도 많은 벼 품종이 꾸준히 나왔다.
까다로워지는 입맛을 공략하기 위한 품종도 개발됐다. 쌀의 모양과 씹는 느낌 등에 초점을 맞춰 생산된 벼는 운광벼와 고품, 삼광, 호품 등으로 모양과 밥맛, 내재해성까지 갖춘 최고 품질로 꼽힌다. 밥맛이 좋다고 널리 알려진 일본 쌀 ‘추청벼(아까바리)’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런 ‘맛 좋고 수량 많은 품종’들을 기후변화라는 새로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전체적으로 기온이 높아지는데다 여름에 폭우가 내리는 등 날씨가 아열대처럼 변한 만큼 쌀 품종도 새로 개발해야 한다. 특히 벼는 한 품종을 새로 개발하는 데 10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고온에서도 잘 자라고 품질 좋은 쌀 품종’에 대한 연구를 서둘러야 한다.
현재는 기온이 미세하게 올라도 쌀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재배 방법을 개선하고 있다. 모내기를 늦춰 벼 이삭이 피는 시기를 평균 기온 섭씨 23도 정도가 되는 때로 조정하는 것이다. 현재 개발된 우리 쌀 품종의 이삭이 익는 최적 온도가 섭씨 21~23도이므로, 이 날씨가 될 즈음 이삭이 여물도록 늦게 이앙하는 방법이다.
지금까지는 재배 방법 개선으로 어느 정도 효과를 봤지만 앞으로 기온이 더 높아지면 여기에도 한계가 온다. 특히 쌀은 우리의 주식이기 때문에 생산량에 문제가 생길 경우 나라 전체적으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이에 국내 연구자들은 보릿고개를 넘게 한 통일벼처럼 새로운 품종의 쌀을 개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기후변화에 잘 적응하고 다량으로 수확 가능하면서도 맛있는 쌀을 맛보게 될 듯하다.
글 : 박태진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