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자연 - 정선의 진경산수화로 배우는 옛 그림 학교 3
최석조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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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은 친구의 딸에게 주려고 샀던 책이다. 선물로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읽어볼 생각이었는데, 읽다 보니 아주 재밌었고, 친구를 만날 때까지 다 읽지 못해서 결국 친구의 딸이 아닌 내 책이 되어버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마음에 드는 결과라고 할까.^^

 

이 책 아트북의 옛 그림 학교 시리즈는 우리 조상들이 그린 옛 그림을 읽어주는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앞서 '김홍도의 풍속화로 배우는 옛 사람들의 삶'과 '신윤복의 풍속화로 배우는 옛 사람들의 풍류'에 이은 세번째 시리즈다. 초등학생과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아주 친근한 말씨와 어렵지 않은 설명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마치 정선의 그림 속으로 뛰어들어간 것처럼 생생하게!

 

정선의 그림은 유명한 게 워낙 많지만 그 중에서도 이 그림의 장엄함은 특히 인상적이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저 가사로 익숙한 금강산의 모습이다. 노래 가사처럼 정말 일만 이천봉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하겠다.^^

정말 금강산의 봉우리는 1만 2천개일까요? 이렇게 알려진 건 금강산의 이름과 관련 있습니다.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 “동북쪽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는데 법기보살이 1만2천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구절이 있거든요. 여기서 1만 2천봉우리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만큼 산세가 험하고 다양하다는 뜻도 되겠지요. 실제로 금강산에는 1000m 이상 되는 봉우리만도 100개가 넘는답니다. -15쪽

 

일만 이천봉우리는 아니더라도 금강산을 실제로 본다면 그 절경에 입이 쩍 벌어질 것만 같다. 살아서 금강산에 오르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고, 금강산을 직접 보면 소원을 이룬다는 말까지 생겼으니, 이 산이 얼마나 경탄의 대상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금강산 때문에 머리 깎고 속세를 떠나려고 하였을까.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출발해서 보통 4~5일이면 금강산에 도착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단발령이란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이곳에 오르면 저 멀리 금강산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단발령은 ‘머리를 깎는 고개’라는 뜻입니다. 처음 마주치는 금강산의 절경에 감탄한 나머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금강산에 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요. 그래서 화가들도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모습을 즐겨 그렸습니다. -32쪽

 

다시 그림을 보자. 사계절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던 금강산! 이중 '금강산'은 봄의 이름이고, 여름엔 신선이 산다는 뜻의 '봉래산', 가을엔 '풍악산', 그리고 저 그림의 모델이 되어준 계절인 겨울엔 뼈를 드러낸 것 같다고 해서 '개골산'이라고 불렸다. 이름 탓인지 그림의 산이 더욱 앙상하게 느껴진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왼쪽과 오른쪽 산의 풍경이 무척 달라 보인다. 왼쪽 산은 나무가 울창하고 오른쪽은 바위 봉우리들이 뾰족뾰족해서 영어 이름 '다이아몬드 마운틴'을 연상시킨다. 왼쪽은 육산, 오른쪽은 골산으로 보면 된다. 자세한 설명을 옮겨 보면 이렇다.

골산은 바위산을 가리킵니다. 마그마가 그대로 땅속에서 굳어져 생성된 화강암이 오랜 세월을 거쳐 땅 위로 드러났지요. 아름답기는 하지만 식생이 빈약합니다. 설악산, 관악산, 인왕산은 골산에 속합니다. 육산은 흙이 많이 뒤덮인 산을 가리킵니다. 흙산이라고도 하는데 완만한 산줄기에 숲이 울창하며 여러 가지 식생이 잘 발달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육산으로 지리산을 꼽지요. -19쪽

한 글자의 한자가 그림 속 산의 풍경을 잘 표현해 주었다. 이름으로 다가가니 산이 살아있는 인격체로 느껴질 정도다.

 

정선은 이 그림을 금강산에 다녀온 후 무려 22년 만에 그렸다. 이렇게 정교한 그림을 어찌 그렇게 오랜 시간에 뒤에 그렸나 놀라울 법하다. 하지만 정선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그려본 게 아니었으니까. 정선은 금강산 그림을 수도 없이 그려보았다.

 

금강산은 멀고 험해서 쉽게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금강산 유람이 유행처럼 번집니다. 너도나도 앞 다투어 유람을 떠났지요. 여행이 끝난 후에는 무얼 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행 중에 찍었던 사진을 꺼내보며 추억을 되새기겠지요. 선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을 더듬으며 그림을 감상하지요. 이렇게 방 안에 앉아 그림을 한 장씩 펼쳐보는 일을 와유(臥遊)라고 합니다. ‘방 안에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려면 썩 잘된 그림을 구해야 합니다. 바로 정선이 선비들 입맛에 쏙 맞는 그림을 그렸지요. -26쪽

만화가가 같은 얼굴의 주인공을 계속해서 그려낼 수 있는 것처럼 정선 역시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금강산을 방금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수없이 그렸던 경험과 감동의 기억을 더듬어서 말이다.

 

이 책은 2박 3일 동안 정선의 그림 세계를 여행한다는 취지로 구성을 했는데, 첫째날의 주제가 금강산이었다. 그리고 여행 사이사이에는 마치 휴게실에 들러서 잠시 쉬어가는 것처럼 다른 주제를 하나씩 담아냈는데, 그 첫번째 휴게소에서는 동물 그림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그 중 내게 인상깊었던 그림은 이것이다.

 

 

 

어라? 고슴도치 등에도 오이가 한 개 얹혔군요. 어쩌다 등에 떨어진 것이라고요? 하하하, 고슴도치가 직접 딴 것이랍니다. 오이 위에 그대로 뒹굴면서 가시를 이용해 포크처럼 쿡 찍어 따지요. 그래서 ‘고슴도치 오이 걸머지듯’이란 속담도 생겨났답니다. 남에게 진 빚이 많다는 뜻이지요. -49쪽

포크처럼 콕! 찍어서 오이를 나르는 고슴도치의 모습이 재밌다. 나름의 신성한 노동이 아니겠는가! 이 그림에는 많은 자식을 계속해서 주렁주렁 낳으라는 기원이 담겨 있다. 쭉쭉 뻗은 오이 넝쿨과 셀 수 없이 많은 고슴도치의 가시가 바로 그 뜻을 보여주고 있다.

 

정선이 그린 내금강 그림 중 '백천교'도 눈길을 끌었다. 까닭은 그림 속 가마중 때문이다.

 

 

 

금강산의 절에 사는 스님들이 선비들이 탄 가마를 메기 위해서 대기 중이다. 참으로 천대 받고 괄시 받던 조선 승려들의 처지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에 대한 복수일지 모르겠지만, '백천교' 그림에는 다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림 제목에 있으면서도 말이다. 다리가 없는 곳은 필시 선비들도 발을 적시며 건너야 할 것이다. 물론, 하인 등에 업히는 방법을 택할 인사가 더 많을 것 같기는 하지만!

 

 

 

지난 5월에 간송미술관에서 정선의 그림들을 보았다. 그때 보았던 '총석정'을 이 책에서 다시 만날 수가 있었는데, 덕분에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해금강에는 육각형의 돌기둥이 다발로 묶여 세워져 있는데, '총석'이란 돌 다발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총석적은 그 옆에 있는 정자를 말한다. 육각 돌기둥은 지각 변동으로 생긴 것이다. 바위가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 풍화된 것인데, 금강산의 화강암과 달리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문용어로 '주상절리'라고 하면 되겠다. 아직도 가보지 못한 제주도! 그곳에 가서 저런 모양의 돌기둥을 보게 되면 그땐 또 다시 정선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첫째날의 주제가 금강산이었다면 둘째날 여행의 주제는 수도 한양이었다. 정선은 한양이 곳곳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송파 나루의 모습이다. 유유히 떠가는 배의 모습도 눈길을 사로잡지만, 송파진에 대한 설명에 눈길이 더 꽂혔다.

 

송파진은 한양과 경기도 광주를 잇는 중요한 나루터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10대 상설시장이 세워질 만큼 붐비던 곳이지요. ‘임금님께 진상하던 꿀단지도 송파를 거친다’는 속담까지 생길 정도였습니다. 왜 이렇게 붐볐냐고요? 한양 4대문 안의 상권을 독점하던 시전상인들에게 밀려난 영세 상인들이 이곳에 송파장을 크게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송파장의 규모가 커지자 시전상인들이 송파장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송파상인들이 아니지요. 구파발·애오개·녹번·아현 등에 있던 놀이패를 끌어다가 산대놀이를 공연했거든요. 이를 보려고 사람들이 몰리는 바람에 장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지 뭡니까. 그런 송파진이 지금은 왜 사라지고 없을까요? 홍수 때문에 자주 물이 넘치자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송파진은 흙으로 메워버렸습니다. 바로 지금 놀이공원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도 나루터가 있던 흔적은 남았습니다. 놀이공원 옆 석촌호수 말입니다. 바로 이 석촌호수가 바로 송파진이 있던 흔적이랍니다. -101쪽

이제 롯데월드를 가게 된다면, 그래서 자이로드롭을 타서 멀리 석촌호수를 바라보게 된다면 정선의 이 그림을 떠올릴 수 있을까? 긴장으로 손발이 오그라들었을 텐데 아무래도 그건 무리겠다. 그래도 땅을 다시 밟으며 안도의 숨을 내쉴 때 석촌호수와 송파진을 함께 떠올린다면 좋겠다. 혹시 마음이 평화로워질지도 모르니까.^^

 

아마 김홍도나 신윤복이었다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송파장을 더 선호하며 그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선비 체면에 풍속화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을 터! 정선의 입맛에는 풍속화보다 산수화다. 그것도 진경산수화!

 

 

 

드디어 기다리던 그림이 나왔다. 내가 보지 못한 금강산보다 내가 본 인왕산을 그린 이 그림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두 그림 모두 리움미술관을 가야 하지만, 비온 뒤의 인왕산을 직접 보는 쪽이 더 끌린다. 물론, 비오는 날의 산행은 좀 두렵긴 하지만... ^^

 

셋째날의 그림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주제를 가졌다. 금강산과 한양을 제외하고도 정선의 그림 소재가 된 곳은 조선 팔도에 널려 있었다. 그중 그림이 소리를 재생시켜주는 효과를 주는 멋진 그림이 있다. 바로 박연폭포다.

 

 

 

 

 

같은 소재지만 아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나는 박연폭포, 하나는 박생연이란 제목으로 되어 있는데, 폭포수가 떨어지는 물길 옆의 정자와 오른쪽 위의 성문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래도 저 장대한 물줄기가 수직으로 떨어지는 그 힘의 파괴력이 그림 밖으로 생생하게 전달된다. 당장 이무기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 모양새다. 힘있는 그림에 거칠고도 섬세한 붓질이다.

 

 

 

수많은 그림을 그렸던 정선이지만 자신의 초상화는 그리지 않았을까? 이 그림을 보자. 부채를 든 선비가 툇마루에 비스듬히 앉아서 꽃을 감상하고 있다. 책장엔 책이 가득하고, 그 앞에는 그림이 걸려 있다. 선비가 들고 있는 부채에도 그림이 옅게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이 실린 것은 '경교명승첩'이라는 화첩이다. 그것도 제일 첫번째 그림으로 실려 있다. 이병연과 정선이 서로 시와 그림을 교환하며 만든 화첩에 첫 장에 실렸다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정선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병연이었다면 책장 앞에 그림이 아니라 시가 걸려 있었을 테니까.

 

자세히 보면 그림은 아주 많은 정성을 기울인 표시가 난다. 책장의 꽃무늬, 마루의 결, 돗자리의 촘촘한 무늬도 꼼꼼하게 담아냈다. 선비를 상징하는 난과 부귀영화를 뜻하는 모란꽃이 한자리에 있어 선비다우면서도 세속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도 그림에 비친다. 참으로 솔직한 그림이다.

 

 

 

 

'목멱조돈'이라는 제목이다. 남산 해돋이란 뜻이다. 정선은 이 그림을 서울 한복판에서 보고 그린 게 아니라 강서구 가양동 근처에서 보고 그렸다. 당시 정선이 양천현령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붉은 해가 산 중덕에 걸려 있지 않고 비켜서 걸쳐 있다. 그런데 그 편이 더 운치가 있다. 이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서울시 엠블럼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호라! 정말 그럴싸하다. 알고 보니 참 반갑다.^^

 

 

 

 

부록같은 코너에서 소개받은 조선 양반들이 쓰던 모자다. 천원짜리 지폐와 오천원짜리 지폐에 등장하는 모자를 비교해 보시라.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사모'의 날개가 아래로 쳐졌는데, 성종 이후로는 평행을 유지하는 모양새로 바뀐다. 사극을 자세히 보면 그 변화를 눈치챌 수 있다.

 

 

진경산수화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정조의 그림이어서 특별히 애정이 가서 한컷 찍어봤다. 이 재주많은 임금님은 이리 잘 하는 게 많아서 명이 짧으셨나... 조선 시대 기준으로는 단명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쉬움에...^^;;;;

 

책 속에서 옮겨 적은 내용 중에 또 마음에 드는 대목을 옮겨본다.

 

4대문에 얽힌 이야기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둘레에 17km의 긴 성을 쌓고 출입문인 4대문과 4소문을 만들어 저녁 10시에 닫고 새벽 4시에 여는 통행금지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정식 명칭은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정문 또는 숙청문,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입니다. 4대문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인데, 유교의 다섯 가지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방위에 맞게 나타냈지요. 숭례문은 ‘예를 숭상한다’, 흥인지문은 ‘인을 일으킨다’, 돈의문은 ‘의를 돈독하게 한다’입니다. 북쪽도 원래는 지혜 ‘지’자를 넣어 홍지문으로 하려 했는데 백성들의 지혜와 지식이 늘어나면 왕실이 위태롭다고 하여 쓰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자를 사용하지 않은 건 지혜는 ‘인의예’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보물 1호인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 달리 이름에 갈 지(之) 자가 들어갑니다. 흥인지문이 위치한 곳의 지형이 낮아 ‘갈지’ 자를 넣어 약한 기운을 보완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신(信) 자는 바로 종로 한가운데 있습니다. 바로 보신각입니다. 원래 ‘신’자의 방위가 가운데라 중심에 보신각을 지었지요. -135쪽

이런 설명과 마주칠 때면 불타버린 숭례문이 다시금 안타깝기만 하다. 복원된 숭례문을 예전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한양의 풍수지리

한양은 크게 바깥의 4개 산(외사산)과 안쪽의 4개 산(내사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외사산은 동쪽의 용마산, 남쪽의 관악산, 서쪽의 덕양산(행주산성), 북쪽의 북한산이고, 내사산은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을 말하지요. 한양을 둘러싼 17km의 성곽을 바로 이 내사산을 연결하여 쌓았습니다. 처음 경복궁을 지을 때 서쪽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궁궐을 동향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결국 개국공신 정도전의 주장대로 북쪽의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고 남향으로 자리 잡은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양은 주산인 북악산을 중심으로 청룡인 낙산(125m, 일명 타락산), 백호인 인왕산(338m), 주작인 남산(265m, 일명 목멱산)의 맥들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입니다. 내사산에서 시작된 물이 한데 모여 서울의 내수인 청계천을 이루고, 청계천은 중랑천과 합쳐져 외수인 한강과 만나게 되지요. 이처럼 한양은 산세가 빼어난 여덟 개의 산과 여러 줄기의 물이 한데 어우러진 명당 중의 명당입니다. 한양의 ‘양’은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산은 북악산, 강은 한강을 가리킵니다. - 149쪽

21세기를 살면서 풍수지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명당 관련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오늘은 시내에서 타로점 치는 집이 유독 눈에 띠어서 유혹을 느꼈는데, 그것도 혹 이런 관심사를 반영한 것일까? ^^

 

내가 읽은 그림책의 넘버 원은 언제나 '오주석의 한국의 미특강'이었다. 앞으로도 그 순위는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비록 그 책을 넘어서지는 못하더라도, 비슷한 종류의 재미와 감동을 주는 책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이 책도 독서 대상으로 삼은 연령대를 고려한다면 무척 즐겁고 의미있는 책읽기였다. 그럼에도 별점이 다섯이 아니라 넷이 된 것은 편집 상의 아쉬움과 몇몇 오타 때문이다. 내가 만나지 못한 이 책의 시리즈 1,2권도 찾아볼 생각이다. 애정을 담아서!

 

*

43쪽 설명에 '몽고를 물리치기 위해 만든 팔만대장경은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라고 나와 있다. 몽고는 '몽골'로 고쳐주면 좋겠고, 팔만대장경은 '장경판전'으로 바꿔야겠다. 유네스코는 움직일 수 있는 유물이 아닌 움직이지 않는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팔만대장경이 훌륭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그 훌륭한 대장경을 이렇게 완벽하게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을 지정하여 기리고 있다.

 

119쪽에는 영지버섯이 '생각대로 되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며, 새해 인사용 그림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그런데 영지버섯이 들어간 그림은 제목이 '노송영지'인데 책에서는 앞서 나온 그림 '노백도'라고 표기했다. 수정해야 마땅하겠다.

 

121쪽 이인좌의 난 설명에서 청주성을 정령하고라고 적었다. '점령하고'로 고쳐야겠다.

 

179쪽에서 '평양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을 소개했다. 감사가 곧 관찰사이니 아래쪽 평안도 관찰사라고 쓴 것처럼 '평안감사'로 고쳐야겠다.

 

215쪽에 '조선중화중의의 결과라는 의견과'라는 구절이 있다. '조선중화주의'의 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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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2 0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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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3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