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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세계사 ㅣ 창비청소년문고 5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퇴근 길에는 지하철에서 내려서 버스로 갈아탄다. 그때 질러가기 위해서 교보문고를 휙 지나가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에 제목을 저장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내 보관함에 이미 이 책이 있다. 먼저 찍어놓고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와 만날 책이었나보다.^^
200쪽이 채 되지 않는 가벼운 책이다. 말투도 엄마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더 가볍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다루는 역사 이야기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식탁 위에서 마주치는 것들 속에 담겨 있는 역사 이야기지만 식탁 위에서 가볍게 버려질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사실, 입으로 들어가는 먹는 것이 차지하는 중대함이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법! 표지에 이 책에서 다룰 소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위트가 넘친다.
첫번째 이야기는 감자에서 시작했다. 감자라면 응당 아일랜드가 떠오르기 마련, 역시나 아일랜드 사람들의 한을 다루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감자가 유럽으로 전해졌을 때는 그야말로 찬밥 신세였다. 악마의 음식 취급을 받으며 괄시 당하던 감자가 어느덧 식탁을 점령하며 가난한 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식량이 되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기대를 했음일까. 그 감자가 병충해를 입으며 아일랜드는 대기근을 겪었다. 그리고 그때 영국이 취한 행동은 아일랜드인들의 민족 감정을 건드렸다. 오늘날까지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나라의 관계가 흡사 일본과 우리나라를 보는 느낌이다. 간밤 버터에 노릇하게 구운 감자를 늦은 시간에 먹으면서 죄책감을 느꼈고, 그렇지만 그 황홀한 맛에 만족감을 느꼈는데, 책 속에서 다시 만나는 감자의 녹록치 않은 역사를 보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영국 여왕이 아일랜드 땅을 밟은 저 역사적인 사진은 무려 백년 만의 발자취였다. 사진의 구도는 빌리 브란트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사진만큼 감동적이지는 않다.
두번째 이야기는 소금이었다. 가장 중요한 금 세 가지에서 황금과 어깨를 견주는, 아니 사실은 그보다 더 중한 소금의 이야기이다. 이번 이야기를 아주 감동적으로 이끌어준 인물은 간디였다. 마하트마 간디, 그 위대한 영혼의 눈물 겨운 투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생산한 목화를 식민 지배중이었던 영국은 헐값에 사들여서는 공장에서 만든 면제품을 인도에 비싼 값에 되팔았다. 여기에 저항하기 위해 간디는 직접 물레로 실을 자은 다음 옷을 만들어 입었다. "아름다움으로 옷을 입지 말고 위엄으로 입읍시다."라는 그의 말은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그가 행적으로 보였기에 더 울림이 크다. 그 어떤 명품 딱지를 붙인 옷도 따라잡을 수 없는 '위엄'이다.
그의 소금 행진은 또 어떠했던가.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 소금세를 매겼다. 제 집 앞에 소금밭이 있는데도 영국 것만을 먹어야 한다니, 얼마나 폭력적인 법이던가. 이 위악적인 법에 간디는 평화적으로,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선에 협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무입니다."
아아, 간디는 명연사이기도 하다. 언행의 일치가 보여줄 수 있는 힘있는 말의 무게다. 1930년 3월 12일 사바르마티 아쉬람이라는 곳에서 시작해서 4월 6일 염전이 있던 구자라트 주의 단디 해변까지, 장장 370km를 26일간 계속 걸었다. 환갑을 넘은 나이의 간디가, 우리가 알다시피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타오르는 볕을 자랑하는 40도 이상의 온도에서 모자도 쓰지 않고 맨발이나 다름 없는 허름한 신발로 길을 걸어냈다. 오죽하면 사람들의 그의 발앞에 나뭇잎을 깔아 주었을까. 마치 예수님이 지나는 길목에 옷을 깔아주었던 성경의 한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마침내 해안가에 도착한 간디는 침묵 속에서 소금을 집어 올려 맛을 보는 행위로 인도 사람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전해 주었다. 그 무엇보다 영적이고, 그 무엇보다 강렬한 이 투쟁을 영국은 힘으로 억눌렀지만, 역사는 간디의 정신을 기억해 주었다. 그리고 이젠 나도 그를 기억할 차례다.
세번째 주제의 키워드는 '후추'다. 콜럼버스를 함께 기억하면 좋겠다. 죽을 때까지 인도로 착각한 그에게 노출된 아메리카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이야기했다. 그 시절에 왜 후추가 그리 귀했는지, 긴 항해 끝에 괴혈병으로 죽는 선원들의 사연을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정도로 쉬운 설명이라면 초등 고학년도 얼마든지 소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의 대장정과 문화 대혁명에서는 돼지고기가, 그리고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덧씌워진 오해를 다루면서 빵이 등장한다. 음식과 역사가 함께 버무려져 서로를 당기는 기분이다. 바게뜨 빵이 '평등 빵'이라고 불려지게 된 사연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새겨보고, 초승달이라는 이름을 가진 크루아상 빵에서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튀르크의 과거를, 그리고 다시 마리 앙투아네트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도 재밌게 보았다. 바게뜨 빵과 크루아상을 먹을 때마다 그들의 나라를, 그들의 이름을 한번씩은 더 떠올리게 될 것이다. 덕분에!
프랑스의 앙리 4세와 미국의 후버 대통령을 함께 엮은 닭고기 편도 재밌었다. 최근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죽은 메리 스튜어트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앙리 4세를 함께 떠올렸는데 며칠 만에 다시 만나게 되니 그 우연성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 황미나의 '불새의 늪'도 같이 떠올렸다. 종교개혁의 절대 군주, 유럽의 얽히고설킨 혼인관계 등이 포개지는데, 복잡하기보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흥미로움이 따라 붙었다. 이 책을 보면서 다른 책이 함께 보고 싶어지는 이 아름다운 효과!
감자와 함께 대표적인 구황작물 옥수수 편에서 흐루시초프의 남다른 면을 보았고, 바나나에서는 플랜테이션 농업에 스며있는 착취의 무서운 얼굴을 함께 보았다. 어릴 적 부의 상징이었던 바나나가 요즘처럼 마구 먹을 수 있는 값싼 과일이 된 이면에 '살충제'라는 무서운 특수효과가 번쩍번쩍 섬광을 일으킨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치르는 동안 전쟁에 쓰이는 화학 무기를 개발하던 공장들이 전쟁이 끝나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지자 업종을 바꾸었다고 해. 살충제나 제초제, 과일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약품 등을 개발하는 일을 하기 시작한 거야. -143쪽
칼을 녹여 곡괭이를 만드는 평화의 시대를 꿈꾸기엔 기술이 지나치게 발달했지만, 그래도 분명 저런 용도 말고도 다른 이로운 쪽으로 전쟁 기술이 인류에게 이바지한 일들이 있을 거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칠레가 세계 제일의 포도 생산국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칠레산 포도주가 유명한 것일까? 오래 전 뜨겁게 덥혀진 와인을 마셨던, 아주 덥던 날의 특별한 소풍이 떠오른다. 그때 마신 와인이 칠레산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가 근세로 넘어오면서 몸살을 앓던 시절에 가장 눈길을 끌었던 대목이 아편전쟁이었다. 장사의 이문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아편도 밀수할 수 있고, 전쟁도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는 탐욕의 인간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또 그만큼 인간을 잘 설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차는 영국인들 모두가 즐기는 일상적인 음료로 자리 잡았지. 차에는 카페인 성분이 들어 있어서 각성 효과가 있거든. 졸음이 오지 않고 일시적으로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말이야. 그래서 공장 같은 데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차를 제공했다고 해. 게다가 차에 넣는 설탕은 열량을 보충해 주는 효과가 있거든. -173쪽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잠을 깨라고 옷핀으로 찌르는 공장주가 나오는데, 그에 비하면 각성제 효과를 내는 차를 마시는 건 그나마 로맨틱하다고 해야 할지...
이 책 '식탁 위의 세계사'는 기획을 아주 잘 잡은 책으로 보인다. '식탁'이라고 공간을 한정 지었지만, 그 안에서 다뤄지는 역사의 이야기는 아주 긴 시간을 품고 있고, 우리의 일상과 아주 가까운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흥미를 끌었다. 내용이 진행되면서 곁들여 소개되는 이야기들도 재미있고 유익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가 정말 가볍고 산뜻하게 끝났다. 청소년은 물론 성인들마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기왕이면 시리즈로 나와서 부엌 안의 세계사, 욕실의 세계사 등등... 다양한 내용들이 소개되었으면 한다. 응원과 기대를 담아서 기꺼이 읽을 것이다. ^^
덧글) 전 근대사회가 지난 이후에도 국민이 아닌 백성으로 표현한 것에서 아주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아편전쟁을 1839년이라고 썼는데 1840년 아닌가? 이건 좀 찾아봐야겠다. 185쪽에는 대처 수상을 새처 수상이라고 표기했다. 다음 쇄에서 수정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