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 류시화 제3시집
류시화 지음 / 문학의숲 / 2012년 4월
구판절판


옹이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 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한 부분이라고
한때는 이것도 여리디여렸으니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 번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12쪽

낙타의 생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24쪽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 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가슴에 있는 노래를 배우는 것’-작자 미상
-32쪽

다르질링에서 온 편지

지금 지구는 외롭고 바람 부네
사람이 그리워 사람의 마을로 간 것을 파계라 하던가
여기는 별이 너무 많아
더러는 인간의 집을 찾아들어
몇 점 흐린 불이 되기도 하네
히말라야의 돌은 수억 년 전의 조개를 품고 있다지
이 생의 일인데도 어떤 일들은 아득한
전생의 일처럼 여겨져
꽃 같은 기억, 돌 같은 기억이 너무 많아
세상이 나를 잊기 전에 내가 나를 잊었구나
농담을 하듯이 살았네
해발 2억 광년의 고산을 넘어와
밤마다 소문 없이 파계하는 별들 보며
전생의 내가 내생의 나에게 편지를 써서
거꾸로 읽어 보네
여인숙 옆 사원에서 들려오는 주문인 듯
네부람바고롭외......
-53쪽

얼음 나무

첫해부터 후회가 되었다
집 가까이
그 나무를 심은 것이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밤마다 창을 두드린다
첫 시월부터 마지막 여름까지
가지마다 비와 얼음을 매달고서
나의 부재를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
바람에 갇힌 영혼같이
상처 입은 불같이

겨울이 떠나면서 덧문을 열어 놓고 갔을 때는
잠 속까지 걸어 들어와
꽃으로 내 삶을 두드린다

나는 그 나무로부터 너무
가까운 거리에 살았다

떨어지는 잎사귀 하나마저도
심장을 건드리는
-72쪽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1
달 표면 오른쪽으로 거미가 기어간다
월식의 흰 이마 쪽으로
어느 날 그런 일이 일어난다 밤늦은 시각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흰 빗금을 그으며
산목련이 떨어지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거미가 달의 뒷면으로 사라지기 전이었을 것이다
텅 비고 깊고 버려진 목소리
망각의 정원에 핀 환영의 꽃 같고
육체를 이탈한 새의 영혼 같고
얼마큼의 광기 같은
당신 거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은요?
전화는 연결 상태가 좋지 않다
당신 아직도 거기 있어요?
당신도 아직 거기 있어요?

2
지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매화는 피었나요 소복이
삼월의 마지막 눈도 내렸나요 지난번
가시에 찔린 상처는 아물었나요
그 꽃가지 꺾지 말아요
아무리 아름답기로
그 꽃은
눈꽃이니까

천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그곳에도 매화가 피었나요 촉촉이
초봄의 매우도 내렸나요 혹시
육체를 잃어서 슬픈가요
그 꽃가지 꺾지 말아요
아무리 신비하기로
그 꽃은
환생의 꽃이니
-74쪽

3
어느 날 너는 경계선 밖에서 전화를 걸 것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幻(환) 속에서
이미 재가 되어 버린 손가락으로
수신자 부담 전화를
네가 있는 여기
봄 그리고 끝없이 얼굴을 바꾸며
너와 함께 이동해 준 여러 번의 계절들
해마다 날짜가 변하는 기억들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만큼 살지 않았을 뿐
어느 날 갑자기 너는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질문과 회피로 일관하던 삶을 떠나
이미 떨어진 산목련 꽃잎들 위에
또 한 장의 꽃잎이 떨어지듯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생물들에
또 하나의 생을 보태며

*바르도-‘둘 사이’라는 뜻의 티베트 어로, 사람이 죽어 일정 기간 머무는 곳
**매우(梅雨)-매화 질 때 내리는 비
-76쪽

살아 있는 것 아프다

밤고양이가 나를 깨웠다
가을 장맛비 속에
귀뚜라미가 운다
살아 있는 것 다 아프다
다시 잠들었는데
꿈속에서 내가 죽었다

그날 밤 별똥별 하나가 내 심장에 박혀
나는 낯선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나는 알았다
그것이 시라는 것을
-79쪽



나를 치유해 준 것은 언제나 너였다
상처만이 장신구인 생으로부터
엉겅퀴 사랑으로부터
신이 내린 처방은 너였다
옆으로 돌아누운 너에게 눌린
내 귀, 세상의 소음을 잊고
두 개의 눈꺼풀에 입 맞춰
망각의 눈동자를 봉인하는
너, 잠이여

나는 다시 밤으로 돌아와 있다
밤에서 밤으로
부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얼굴의 윤곽을 소멸시키는 어둠 속으로
나라고 하는 타인은
불안한 예각을 가지고 있다
잠이 얕은 혼을

내가 숨을 곳은 언제나 너였다
가장 큰 형벌은 너 없이 지새는 밤
네가 베개를 뺄 때
나는 아직도 내가 깨어 있는 이곳이 낯설다
때로는 다음 생에 눈뜨게도 하는
너, 잠이여
-80쪽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신발 뒷굽이 닳아 있는 걸 보면
그는 새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거리를 걸을 때면 나무의 우듬지를 살피는 걸 보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다 주머니에 기도밖에 들어 있지 않은 걸 보면
그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슬픔을 아는 사람이다 가끔 생의 남루를 바라보는 걸 보면
그는 밤을 견디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샤갈의 밤하늘을 염소를 안고 날아다니는 걸 보면
그는 이따금 적막을 들키는 사람이다 눈도 가난하게 내린 겨울 그가 걸어간 긴 발자국을 보면
그는 자주 참회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거절한 모든 것들에 대해 아파하는 걸 보면
그는 나귀를 닮은 사람이다 자신의 고독 정도는 자신이 이겨내는 걸 보면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많은 흉터들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숙이 가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걸 보면
-84쪽

그는 홀로 돌밭에 씨앗을 뿌린 적 있는 사람이다 오월의 바람을 편애하고 외로울 때는 사월의 노래를 부르는 걸 보면
그는 동행을 잃은 사람이다 때로 소금 대신 눈물을 뿌려 뜨거운 국을 먹는 걸 보면
그는 고래도 놀랄 정도로 절망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삶이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걸 보면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그의 부재가 봄의 대지에서 맥박 치는 걸 보면
그는 타인의 둥지에서 살다 간 사람이다 그의 뒤에 그가 사랑했으나 소유하지 않은 것들만 남은 걸 보면
-85쪽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꽃눈 틔워 겨울의 종지부를 찍는
산수유 아래서
애인아, 슬픔을 겨우 끝맺자
비탈밭 이랑마다 새겨진 우리 부주의한 발자국을 덮자
아이 낳을 수 없어 모란을 낳던
고독한 사랑 마침표를 찍자
잠깐 봄을 폐쇄시키자
이 생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있는 것 같았던
지난겨울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가끔 눈 녹아 길이 질었다는 것 외에는
젖은 흙에 거듭 발이 미끄러졌다는 것 외에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곁방살이하던 애인아
종이 가면을 쓰고 울던 사랑아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삶이라는 것이 언제~마모시키는 삶’-옥타비오 빠스 <태양의 돌>에서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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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6-04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으네요~ 언제봐도 류시화 모음 글들은!

마노아 2012-06-04 01:19   좋아요 0 | URL
시인의 영혼은 악마라도 탐을 내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어요. 시인의 언어라고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