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학자 이영림 교수 "루이 14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귀족들의 먹이사슬의 포로에 불과하다. 절대군주의 상징인 루이 14세의 최대 비밀은 그가 절대군주가 아니라는 점이다. 화려한 베르사유와 엄격한 궁정의례의 비밀도 여기서 드러난다. 절대군주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루이 14세는 절대군주로서의 이미지에 집착했던 것이다."
-56쪽
절대군주정은 성격상 호전적일 수밖에 없다. 절대군주의 영광은 예술과 예법 등의 상징적 수단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루이 14세는 전쟁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잘 과시할 수 있는 위대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전쟁은 신민의 불만과 귀족의 음모를 억누를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했다. 이렇게 전쟁을 좋아하다보니 결국 그는 당대의 유럽인들에게 가혹하고 잔인한 전쟁광으로 인식되었다.
-66쪽
섬나라여서 해군이 막강하고 해군이 모든 군사력의 중심이다 보니 영국 육군은 해군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다. 배가 쉽게 드나들지 못하면 영국군의 공포감은 급격히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이에 더해 잔 다르크가 영국군과 싸울 때 본진을 공격하는 것보다 주위의 작은 요새를 점령해감으로써 결국 본진을 무너뜨린 것도 참고했다. 이런 지식이 한순간에 머릿속에서 이어지면서 누구도 생각지 못한 레귀예트 점령의 아이디어로 전개되었다. 전략적 직관은 이처럼 두뇌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지식이나 경험이 순식간에 조합되어 가장 확실한 문제 해결책으로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출중했던 나폴레옹은 툴롱 전투 이후 3년 만에 대위에서 장군이 되었다.
-79쪽
나폴레옹은 예술가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나폴레옹은 예술가들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하고 그들의 재능을 인정해 자부심을 극도로 높여줌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연극배우 탈마에게 모자를 벗어 최고의 경의를 표한 적이 있는데, 황제 스스로 이를 떠벌리고 다니며 자랑함으로써 배우의 자부심을 한껏 높여주었다. 나폴레옹은 다비드의 작품에 대해서도 늘 공공연히 경의를 표했다. 이런 황제를 그리는 화가의 붓 끝에 열정이 실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87쪽
‘임금님’이나 ‘나라님’ 같은 호칭과 달리 차르는 매우 잔혹하고 억압적인 군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농노제에 기초한 후진적인 사회체제 위에 국가 자체가 최고의 봉건 지주로 군림하다보니 그 정점에 선 차르는 그만큼 무서운 압제자로 인식되곤 했다. 차르는 삼권을 장악하고 러시아 정교회 수장을 겸한 전제자로, 헌법과 제도화된 내각, 선출된 입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늘은 높다. 그러나 차르는 더 높고 멀다"는 러시아 속담이 보여주듯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다. 이에 따라 이반 뇌제뿐 아니라 많은 차르들이 억압적이고 냉혹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히는 표트르 대제의 별명도 ‘처형관 차르’였다. 표트르 대제의 사후에는 75년 동안 무려 열 차례의 권력 변동이 발생해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부인 사이에 죽고 죽이는 혈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피의 니콜라이’라는 별명을 얻은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혁명세력에게 무참히 살해된 것도 변화하는 시대와 담쌓고 전제주의를 고집한 데 따른 것이었다. -111쪽
흥미롭게도 이 희대의 독재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러시아인이 아직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2008년 러시아의 한 TV 토크쇼에서 벌인 여론조사에 따르면, 스탈린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다는 응답자가 무려 54%에 이르렀다(스탈린을 우상이라고 평한 응답자는 16%에 그쳤다). 최근 고등학교의 역사 교과서에는 그의 지도력을 칭송하는 글들이 실리고 있고, 그의 동상이 새로이 세워지다 못해 상품과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까지 등장하고 있다. 무엇이 많은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아직도 스탈린에 대해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일까?
-115쪽
근현대사에서 독재자로 지탄받은 지도자들이 그들의 사후 상당수 혹은 일부 국민들로부터 그리움과 향수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과거의 고통스럽고 두려웠던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독재자가 고무한 자부심과 비전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116쪽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 그루지야의 시골 마을 고리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다(권좌에 오른 후 스탈린은 자신의 생일을 1879년 12월 21일로 바꿨다).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스탈린이라는 이름은 강철을 뜻하는 러시아어 스탈에서 나온 것이다. 레닌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116쪽
화가들이 레닌과 스탈린의 관계를 끈끈하게 묘사했던 것과는 달리 말년의 레닌은 스탈린을 경계했다. 레닌은 유서에 덧붙인 글에서 스탈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은 너무 난폭한 인간이다. 그의 이런 결점은 서기장의 직책에 합당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그 지위로부터 제외시키는 방법을 찾도록 여러 동지들에게 제안한다." 자신의 사후 당이 분열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레닌은 동지들에게 집단지도체제를 권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당 간부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스탈린에게 넘어갔고, 권력의 화신 스탈린은 레닌의 우려를 끝내 현실로 만들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소련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스탈린은 소련 사회를 전면적으로 개조했다. 20세기 빅브라더의 가장 공포스러운 전형을 창조한 것이다. -122쪽
로마인들이 간과한 것은 남매 사이의 결혼은 종교적 함의에 더해 권력의 유지와 배분을 위한 정치적 고려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이게 가능했던 것은 그리스나 로마와 달리 여성 왕족의 통치를 인정하는 유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나 로마에서 태어났으면 여성이라서 받지 못했을 고급 교육(왕자들과 동일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훗날 이것이 그녀에게 큰 정치적 자산이 되어주었다.
-142쪽
미모와 관능만으로 따지면 클레오파트라보다 우월한 여인들이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주변에는 많았다. 고대 동전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심지어 이마가 좁고 턱이 뾰족하고 입술이 얇아 결코 미인형이 아니었다고 한다. 영웅들이 사랑한 게 단순한 미모나 관능이 아니었음을 유추하게 하는 대목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지성은 그녀가 마케도니아어뿐 아니라 그리스어, 민간 이집트어, 라틴어에도 능통했고, 아랍인, 히브리인, 메데스인과 그들의 언어로 직접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에서 또렷이 확인할 수 있다. 또 독약의 종류와 효과에 대해 깊이 연구했고(사형수에게 독을 주입하는 끔찍한 실험을 행했다고 한다), 미용법과 화장술에 대한 글을 썼다는 기록도 그녀의 지적인 면모를 일깨워준다.
-144쪽
고대 그리스에서는 매춘이 경제활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사람들은 윤락문화를 후대 사람들만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런 관용적인 시각이 그리스 미술가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윤락문화를 표현하게 만들었다. 로마의 화가들 또한 유곽을 소재로 한 그림을 적잖이 그렸다. 이런 그림들을 통해 우리는 로마 사람들도 그리스 사람들과 유사한 태도로 윤락문화를 대했음을 알 수 있다.
-171쪽
하렘은 본래 이슬람권에서 가까운 친척 외에 일반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간을 지칭한다. 한마디로 ‘금남의 구역’이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오스만 제국 술탄의 하렘이다. 톱카프 궁전에 있던 이 하렘에는 술탄의 아내와 여인들, 술탄의 어머니, 술탄의 누이들, 딸들, 가까운 여성 친척들, 환관, 여성 노예들이 거주했다. 세월이 흐르면서는 16세 미만인 술탄의 아들들도 하렘에서 함께 살았다. 하렘을 만든 것은 술탄의 성적 욕망을 위한 게 아니라, 이처럼 내외를 따지는 문화에서 기능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공간적 성격과,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서 술탄의 어머니나 아내, 누이들이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하렘이 환락의 장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제국의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으리라는 사실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3쪽
14C의 흑사병 외에 유럽의 진로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BC430년경 아테네에서 창궐한 장티푸스다. 4년 만에 아테네의 군인과 민간인 1/4 정도가 세상을 떠났다. 병의 독성이 얼마나 강했던지 감염자들이 워낙 빨리 죽는 바람에 병이 더 이상 퍼지지 않는 역설적인 결과가 초래되었다. 당시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치르던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은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스파르타의 펠레폰네소스 동맹에 패하고 말았다.
-222쪽
페스트는 이후에도 18C까지 유럽을 주기적으로 위협했고 유럽의 상황을 크게 변화시켰다. 페스트로 인구가 줄어들자 귀족들의 부와 권력 또한 줄어들게 되었고 농노들은 영지를 떠나 소작농이나 장인 등으로 변모한다. 또한 페스트를 퇴치하는 데 실패한 교회가 민심을 잃으면서 기독교의 힘도 약화되었다. 이렇듯 페스트는 중세시대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228쪽
헨리8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사후 왕위 계승권자는 헨리 8세의 맏딸이자 에드워드의 누나인 메리였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죽으면서 왕위를 누나가 아니라 아버지의 여동생인 메리 튜더의 상속자들에게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측근인 노섬벌랜드 공작의 설득에 따른 것으로, 그렇게 하면 메리 튜더의 외손녀인 제인 그레이에게 왕권이 넘어갈 수 있었다. 에드워드의 왕위를 가톨릭교도인 메리가 아니라 신교도인 제인이 계승함으로써 기존의 신교 권력이 변함없이 유지되도록 하려는 노섬벌랜드 공작의 책략이었다(제인은 노섬벌랜드 공작의 며느리이기도 했다). 에드워드는 영국 국교회의 창설자인 아버지 헨리8세의 유지를 잇고 가톨릭의 복고를 막기 위해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231쪽
‘피의 메리’가 아닌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1542-1587)는 자신의 왕국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영국에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처형되었다. 메리의 불행은, 프랑스 왕비가 된 그녀가 첫 남편 프랑수아 2세의 이른 사망으로 스코틀랜드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두 번에 이은 재혼이 문제였는데, 이 잘못된 혼인들로 스코틀랜드 군주로서 그녀의 통치력은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에게 도움을 청해 영국으로 망명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게 영국 내의 가톨릭 세력들로 하여금 메리를 영국 여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와 반란을 획책하게 만들었다.-235쪽
모반 음모가 없더라도 후사가 없는 엘리자베스가 죽으면 왕위는 메리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신교도 세력에게 이보다 더한 재앙은 없었다. 메리는 오랜 유폐생활 중에도 줄기차게 모반에 연루되었는데, 결국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되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참수형에 처했다. 1587년 2월 7일 그녀는 그렇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메리는 끝내 영국 여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그녀의 아들 제임스 1세는 엘리자베스 사후 적법하게 영국의 왕위까지 계승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가 청교도혁명의 와중에 처형됨으로써 메리의 불행은 손자 대에 다시 반복되었다. -235쪽
절단된 왕의 머리는 군중에게 전시되었다. 반역죄로 죽은 모든 죄수에게 가해지는 수치였다. 하지만 크롬웰은 그 머리를 다시 왕의 몸에 꿰매어 붙이도록 하는 전례 없는 조처를 내렸다. 유족들이 주검에 예를 표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려 깊은 크롬웰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40쪽
헨리8세가 죽자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가 낳은 에드워드 6세가 그 뒤를 이었다. 그가 어린 나이에 결핵으로 죽자 헨리7세으 증손녀인 제인 그레이(1537-1554)가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그녀는 메리에 의해 9일 만에 폐위되어 처형된다. 실질적으로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이 된 메리(1516-1558)는 교황과 화해하고 수장령을 폐지했다. 그녀는 신교도를 박해하면서 수많은 이들을 처형했기 때문에 ‘피의 메리’로 불렸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었고 재임 5년 만에 난소암으로 사망했다. 이후 즉위한 이복여동생 엘리자베스1세(1533-1603)는 가톨릭과 신교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절대왕정을 완성했다. 그녀는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1566-1625)가 그 뒤를 이어 스튜어트 왕조를 열었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한 그는 국교회를 절대주의의 보루로 삼아 가톨릭과 청교도를 모두 박해했다.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대립하는 일은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찰스1세(1600-1649) 때 더욱 빈번했다.
-247쪽
서양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전쟁은 일반적으로 일차세계대전이 꼽힌다.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받은 심리적 충격이 그 어느 전쟁보다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차세계대전을 ‘the Great War'라는 고유명사로 부르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 단어는 일차세계대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249쪽
일차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전쟁 자체가 준 충격도 컸지만, 이후의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독일 제국을 비롯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등 네 개의 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쟁 끝물에 퍼지기 시작해 최소한 250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추산되는 스페인 독감은 전쟁으로 위생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번져 그 위력이 대단했다.
-259쪽
다만 전쟁이 총력전으로 치러진 까닭에 전쟁 중에 인력난을 해소하고자 여성들을 대규모로 후방의 공장에 채용한 것은 여성에게 노동시장의 문을 열어준 긍정적인 변화였다. 특히 ‘총알 아가씨’로 불리며 군수 공장에서 일한 여성들은 지위 변화의 상징이 되어 여성들의 정치 사회적 권리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1918년 영국에서, 그리고 1920년 미국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것은 이 같은 시대의 흐름이 반영된 결과였다.
-259쪽
제1차 세계대전은 막대한 인명과 재정의 피해를 가져와 유럽을 후퇴시켰고 세계의 주도권을 미국에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266쪽
카리스마라는 그리스어가 처음 문자화되어 나타난 것은 서기 50~62년 사이의 일이다.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카리스마를 은사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기독교에서 은사란 하느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카리스마의 어원이 된 카리스charis가 은혜나 호의를 뜻한다는 점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의미 전개라 할 수 있다.
-273쪽
이 기독교적인 카리스마 관념은 교회가 유럽 문명에 안착하고 제도화되기 시작하는 서기 3세기 이후 급속히 약해진다. 바울의 카리스마 관념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특권을 부인하고 평등주의적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어서 헬레니즘 사회의 계층적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측면이 있었다. 제도화된 교회의 입장에서는 이런 급진적 가치와 이상주의가 교권을 약화시킬 수 있는 까닭에 이를 적극적으로 통제할 필요를 느꼈다. 이후 교회는 경전과 종교 규약, 전례, 성직자 조직, 리더십을 카리스마, 곧 은사보다 더 중요한 공동체 활동의 중심으로 삼게 된다.
-279쪽
오랜 세월, 교회에서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심지어 사라진 듯 보였던 카리스마라는 용어(물론 그 개념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가 오늘날 일상에서 빈번히 오르내리는 단어가 된 것은 전적으로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 덕이다. 막스 베버는 카리스마라는 용어를 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과학 분야에서 재활용했을 뿐 아니라 개념 자체를 재창조했다. 베버가 재창조한 카리스마의 개념은 고대의 기독교적 의미와는 거리가 먼, 철저히 세속적으로 변형된 것이었다.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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