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에게 물린 날 푸른도서관 47
이장근 지음 / 푸른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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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 옆에 있는 목련나무
며칠 전에는
주먹 꽉 쥐고 있던 봉오리였는데
오늘은 손바닥만 한 꽃이 폈다
겨울이랑 화해를 했나 보다
둘 사이에서 기회를
보던
봄이
슬쩍 끼어들었다

봄은
본다는 걸까

너를 보고 있으면
얼어 있던 내 마음이 녹으며 찰랑찰랑 물소리가 들리고
꽃처럼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고
칠판에도 교과서에도 눈 감으면 눈꺼풀에도
네가 보이고

하하하, 그래서 봄일까-12쪽

잃어버린 부호

언제부터인가
내 노트에서
느낌표가 사라졌다
초등학생 때에는
내가 좋아하는 부분에
야구 방망이 닮은 느낌표
홈런 치듯 딱딱 찍어 놓았는데
요즘 내 노트에는
별표만 가득하다
뭐가 그렇게 중요한 건지
내 노트에는
중요하지만 느끼지 못하는
일들로 가득하다-19쪽

부자 엄마 가난한 딸

시간이 부족해
두 문제 못 풀었다
엄마는 또
빨리 푸는 것도
실력이라 말하겠지
바쁘게 사는 엄마에게
시간은 돈이니까
나는 또
두 문제 못 푼 만큼
가난해진 딸이 되겠지
그러나 내게
시간은 엄마다
엄마와 함께 보낸
시간이 많을수록
부자가 되는 느낌이다-55쪽

이에는 이

동민이는 욕쟁이다
말의 70%가 욕일 거다
오늘은 수업 시간에 핸드폰 하다 들켰다
선생님께 뺏기는 순간
"에이 씨팔!"
분위기 살벌해졌다
별명은 원시인, 무식하기로 소문난
생활지도부 선생님이었다
핸드폰을 주먹도끼처럼 치켜들 때
동민이 움찔 두 손으로 머리를 막았다
쩍! 찍히는가 싶었는데
선생님 동민이 앞에 핸드폰 내밀며
10초 줄 테니 네가 한 말 열 번 입력해서
문자로 보내라 하셨다
1초 넘어갈 때마다 일주일 압수라 하셨다
동민이 독수리보다 빠르게
12초 걸려 보냈다
다 끝났나 싶었는데
선생님 받은 문자
동민이 아빠께 보낸다 하셨다
안 보내는 대신
동민이 2주 동안 욕도 못하고
선생님께 충성하기로 했다-66쪽

징검다리

좁은 골목
꾸불꾸불
높은 계단 길

사람들이
징검다리처럼
길게 줄 서 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연탄

연탄이
겨울 강을
건너고 있다-70쪽

넘버원 아저씨

같은 빌라 지하에 살던
넘버원 아저씨가 고향으로 간단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아저씨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라며
엄지손가락 들어
넘버원을 만들곤 했었는데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 네 개 잘리고
몇 달 동안 붕대 감고 다니더니
지금 커다란 여행 가방 들고 서 있다

오른손 들어가 있는
볼록한 주머니를 못 본 척
꾸벅 인사를 하니
의외였다
왼손으로 넘버원을 만들어 주었다-83쪽

물감

물감이 한 방울
떨어졌을 뿐인데
세면대에 받은 물이
모두 물들었다
너의 말 한 마디에
어제는 까맣게 물들었다가
오늘은 빨갛게 물드는
내 마음
사랑은 물감이다
내가 눈물 한 방울만 흘려도
너는 쩔쩔맨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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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2 16: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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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2 23: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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