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교문 옆에 있는 목련나무 며칠 전에는 주먹 꽉 쥐고 있던 봉오리였는데 오늘은 손바닥만 한 꽃이 폈다 겨울이랑 화해를 했나 보다 둘 사이에서 기회를 보던 봄이 슬쩍 끼어들었다
봄은 본다는 걸까
너를 보고 있으면 얼어 있던 내 마음이 녹으며 찰랑찰랑 물소리가 들리고 꽃처럼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고 칠판에도 교과서에도 눈 감으면 눈꺼풀에도 네가 보이고
하하하, 그래서 봄일까-12쪽
잃어버린 부호
언제부터인가 내 노트에서 느낌표가 사라졌다 초등학생 때에는 내가 좋아하는 부분에 야구 방망이 닮은 느낌표 홈런 치듯 딱딱 찍어 놓았는데 요즘 내 노트에는 별표만 가득하다 뭐가 그렇게 중요한 건지 내 노트에는 중요하지만 느끼지 못하는 일들로 가득하다-19쪽
부자 엄마 가난한 딸
시간이 부족해 두 문제 못 풀었다 엄마는 또 빨리 푸는 것도 실력이라 말하겠지 바쁘게 사는 엄마에게 시간은 돈이니까 나는 또 두 문제 못 푼 만큼 가난해진 딸이 되겠지 그러나 내게 시간은 엄마다 엄마와 함께 보낸 시간이 많을수록 부자가 되는 느낌이다-55쪽
이에는 이
동민이는 욕쟁이다 말의 70%가 욕일 거다 오늘은 수업 시간에 핸드폰 하다 들켰다 선생님께 뺏기는 순간 "에이 씨팔!" 분위기 살벌해졌다 별명은 원시인, 무식하기로 소문난 생활지도부 선생님이었다 핸드폰을 주먹도끼처럼 치켜들 때 동민이 움찔 두 손으로 머리를 막았다 쩍! 찍히는가 싶었는데 선생님 동민이 앞에 핸드폰 내밀며 10초 줄 테니 네가 한 말 열 번 입력해서 문자로 보내라 하셨다 1초 넘어갈 때마다 일주일 압수라 하셨다 동민이 독수리보다 빠르게 12초 걸려 보냈다 다 끝났나 싶었는데 선생님 받은 문자 동민이 아빠께 보낸다 하셨다 안 보내는 대신 동민이 2주 동안 욕도 못하고 선생님께 충성하기로 했다-66쪽
징검다리
좁은 골목 꾸불꾸불 높은 계단 길
사람들이 징검다리처럼 길게 줄 서 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연탄
연탄이 겨울 강을 건너고 있다-70쪽
넘버원 아저씨
같은 빌라 지하에 살던 넘버원 아저씨가 고향으로 간단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아저씨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라며 엄지손가락 들어 넘버원을 만들곤 했었는데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 네 개 잘리고 몇 달 동안 붕대 감고 다니더니 지금 커다란 여행 가방 들고 서 있다
오른손 들어가 있는 볼록한 주머니를 못 본 척 꾸벅 인사를 하니 의외였다 왼손으로 넘버원을 만들어 주었다-83쪽
물감
물감이 한 방울 떨어졌을 뿐인데 세면대에 받은 물이 모두 물들었다 너의 말 한 마디에 어제는 까맣게 물들었다가 오늘은 빨갛게 물드는 내 마음 사랑은 물감이다 내가 눈물 한 방울만 흘려도 너는 쩔쩔맨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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