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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나는 도다 14 - 완결
정혜나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한동안 윙크를 구독했었는데, 그때 '탐나는도다'는 이미 중반부까지 진행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드라마가 방영되었지만 나는 드라마를 보지 못했고, 윙크 구독도 중지했기 때문에 내용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도 몰랐다. 시작 부분을 보지 못하고 중간부터 봤으니 작품 전체에 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뒤늦게 탐나는도다를 구입해서 읽어보고는 대박 작품을 못알아봤다는 자책을 지난 한주간 했다.
때는 1640년. 병자호란이 조선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다음의 시점이다. 영국 스펜서 가문의 윌리엄은 모험심이 많은 청년으로 겁도 없고 철도 없으나 아주 담이 큰 녀석! 엄마 몰래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밀항했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 해안에 떠밀려왔다. 그렇게 제주 좀녀 버진과 마주친다. 고된 해녀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버진에게 이 푸른 눈의 소나이는 미지에 대한 동경이고 바깥 세상에 대한 열망이고, 닫힌 일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같았다. 거기에서 진상품 밀무역 조사를 위해 귀양다리 행세를 하며 제주로 들어온 뼈속 깊이 양반인 박규가 3각구도를 이룬다. 이양인의 존재는 개방을 하지 않는 나라 조선에서 얼마나 기이하고 위험하게 비쳤겠는가. 충분히 심각해질 수도 있는 설정이지만 작가는 이것을 아주 코믹하게 풀어간다.
흑발이 지는 순정만화가 있냐는 대사가 나를 자극했다. 하하핫, 해묵은 이야기지만 아르미안의 네딸들이 나왔을 때 에일레스파와 미카엘파의 설전이 생각난다. 나의 주장은 늘 이렇다. 순정만화 속 남주인공은 금발이 좋고, 여주인공은 흑발이 좋다고. 그래서 나는 미카엘과 아스파샤를 사랑했지.^^
두번째 그림은 사진 네장을 묶었더니 대사가 잘렸다. 윌리엄이 사람들이 환영의 꽃가루를 뿌려줬다고 좋아하니까 버진이 그건 '소금'이라고 알려준다. 숨어 지내도 모자랄 것 같은 이양인이 제주 신화와 설화의 힘으로 신성한 존재로 변신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제주답다고 할까.
세번째 그림은 도자기를 보고 음흉하게 변한 윌리엄의 모습이다. 영국에서부터 조선 자기에 홀딱 빠져들었던 윌리엄은 요강과 명품 도자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여러 사건들을 만드는데 거기서 오는 재미도 아주 컸다.
마지막 그림은 상투의 속사정을 표현한 것이다. 흑집사 표지가 겉껍데기를 벗기면 속에는 패러디물이 나오는 것처럼 탐나는도다도 그런 설정을 갖고 있다. 겉표지를 떼어내니 저렇게 웃긴 그림이... 사극에서는 상투 머리가 베어지면 머리를 풀어해치며 나름 순정만화스런 그림이 나오지만, 실제 상투 속 머리는 저렇게 속알머리 없는 머리... 아, 환상을 다 깰 수밖에 없다. 그냥 꽉찬 머리로 계속 표현해주기를!!
버진이라고 처음부터 윌리엄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은 아니다. 박규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이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마음을 열고, 그 마음을 전하는 과정들은 천천히 진행된다. 설득력 있게! 그 과정에서 참 예뻤던 반딧불이 장면이다. 아래 그림은 한양으로 압송된 윌리엄을 찾아 버진이 한양으로 떠나고 나중에 만난 윌리엄인데, 금발 머리를 잘라서 금실인 양 고리를 만들어 노잣돈을 만든 윌리엄의 짧아진 머리카락이다. 떼쟁이에 철부지였지만 윌이엄은 사실 속내도 깊고 마음도 넓은 아주 건실한 청년이다. 고뇌하는 표정도 일품이다.
제주 편에서는 버진의 어머니가 나올 때마다 참 재밌었다. 물질로 단련된 그들의 일상과 진상품에 얽매인 삶은 고단하기 짝이 없지만, 그걸 아주 씩씩하게 표현해냈다. 이웃 마을과의 대결 구도, 남자보다 더 억세지만 더 생활력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 안에서 윌리엄과 박규의 대조되는 성격도 잘 드러났다. 물질 잘한다고 금세 '고급인력' 취급당한 윌리엄의 강한 생활력도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워줄 만하다. '탐나는도다'를 패러디한 '땀나는도다'도 어찌나 재밌던지...
그나저나 제목도 참 잘 지었다. '탐나는 도다'라고 읽으면 제주는 섬이다!도 되고, 말 그대로 탐이 나~도 되고... 땀도 나도...^^
윌리엄은 역시 진지할 때 훨씬 멋지다. 오른쪽 나무 장면은 다모의 매화씬이 떠올리는 멋진 풍경이다. 말한마디 없이도 나무 그늘에 앉아 시간을 공유하며 서로를 느끼는 예쁜 연인의 모습이다.
실제로 어리기도 했지만, 버진은 제주를 떠나올 때 그저 철부지 떼쟁이에 가까웠다. 윌리엄이 그랬던 것처럼. 다만 고달픈 제주 해녀의 삶을 벗어나고 싶기만 했을 뿐, 목표도 방향도 방법도 몰랐다.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여겼지만 착각이었다. 그것을 깨달으며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버진이 성장한다. 윌리엄도, 박규도 함께 성장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일으켜주고 채워나가는 멋진 존재였다.
후기 만화에 등장한 장면이다. 양반 가문입네~하며 으시대던 박규가 윌리엄 집에 성도 있고 말도 방목해서 키운다는 소리에 식겁하는 장면. 그리고 '박규'라는 이름이 힘주어 발음하면 상당히 욕처럼 들린다는 설정에서 오는 이야기까지... 모두 재밌다.
작품은 소현세자와 인조의 갈등, 그리고 13년 뒤 조선에 표류하는 하멜의 이야기까지, 픽션과 팩션을 적절히 조화시키며 멋진 마무리를 짓는다.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아주 괜찮은 엔딩이었는데, 마지막에 조금 서두른 감이 있었다. 해서 충분히 감동의 여운을 주었어야 했는데 좀 몰아친 기분이다. 그리고 제주에서 의미심장한 단서를 던져주던 할아방의 정체가 자세히 나오지 않아서 아쉽다. 아, 궁금해라...
작가의 첫 연재작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이보다 더 잘하긴 힘들었을 거라고 여긴다. 그림도 내용도 모두 탄탄하다. 오래도록 잡지는 보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후 어떤 작품으로 독자들과 다시 만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떤 작품이든 미리부터 기대하게 된다. 애석하게 보지 못한 드라마도 기회되면 찾아서 볼까 한다. 당시 친구 하나가 전화만 하면 드라마가 아주 좋으니 꼭꼭 보라고 강조를 했는데, 역시 기대가 된다. 드라마가 원작보다 먼저 끝났는데 마무리는 어떻게 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작가님이 엔딩에 대한 언급을 해줘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갔을지, 아니면 드라마 극작가의 생각으로 마무리 했을지... 이럴 때 보통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상, 흑집사 애니메이션의 엔딩 때문에 원작의 엔딩이 더 궁금해진 독자의 질문이다.
덧글) 13권이었던가. '봉림세자'라고 오기가 하나 있다. '봉림대군'으로 써야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