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SION 과학

제 1547 호/2012-02-20

 
경주로, 육상트랙 부럽지 않아~

다정한 연인에 도시락 싸온 가족까지! 오늘도 많이들 오셨군요. 이런 날은 뛸 맛이 납니다. 함성 소리가 커지면 제 심장은 더 힘차게 뛰지요. 히이잉~ 히잉~ 어서 달리고 싶어 자꾸 달그락거리게 되네요. 오늘은 예감이 좋습니다. 어제 내린 비로 경주로의 모래가 단단해져서 기록도 꽤 좋을 것 같습니다. 라인도 안쪽이라 승산이 있어 보입니다. 관람객 여러분, 제가 지난 몇 번의 경기에서 꽤 기록이 나빴지만 그건 염두에 두지 말고 절 찍으세요. 경마는 말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사실 경기장 상태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거랍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요? 믿지 못하시겠다고요? 제 얘기를 좀 들어보세요. 다행히 오늘은 날이 좋습니다만, 어제는 비가 꽤 많이 내렸지요? 저기 4코너 주변을 보십시오. 아직도 물이 고여 있지 않습니까? 멀리 관람석에서 보기에 말들이 달리는 경주로는 평평해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경륜 벨로드롬이나 빙상 쇼트트랙 경기장처럼 눈으로 식별이 가능한 정도는 아니지만, 경마 경주로 역시 안쪽과 바깥쪽의 기울기와 높낮이가 차이가 납니다. 직선 주로 부근은 가운데가 약간 높고 양쪽이 낮은 형태입니다. 배수(排水)를 빠르게 하기 위해 그렇지요. 곡선 주로는 안쪽이 낮고 바깥쪽이 높은 형태입니다. 이런 형태는 배수를 원활하게 할 뿐만 아니라 원심력이 작용하는 코너에서 말들이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게 도와주지요. 육상 트랙경기에서 선수들이 안쪽을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넘어지는 것을 보신 적 있죠? 안쪽이 확실히 유리합니다. 제가 오늘 딱 좋은 자리에서 출발하네요.

4코너에 물이 고인 이유는 그곳이 경주로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높은 곳은 결승점입니다. 가장 낮은 지점과 가장 높은 결승점은 높이의 차이가 4m에 이릅니다. 상당하지요? 결승점은 마치 언덕길마냥 점점 높아져서 말들이 지나치게 가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합니다. 오르막이 힘들어 적정 속도를 유지하니까 지나친 가속으로 인한 말과 기수들의 부상도 막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경주를 원활하게 하려는 세심한 배려의 결과입니다.

히잉히잉~~, 이제 제 발 밑에 깔린 모래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까 4코너 주변에 물이 고였다고 했습니다만, 근래 내린 집중호우를 생각해 보면 경주로는 참 신기할 정도로 물이 없는 겁니다. 마치 맑은 날만 계속된 것 같이 말이지요. 경주로는 배수를 원활하게 하고 말과 기수의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꼼꼼하게 디자인됩니다.

전 세계 경마장의 경주로는 모래주로, 잔디주로, 인조주로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마장은 3곳으로, 모두 모래주로입니다. 이 모래주로는 땅 속 60cm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4~10cm의 굵은 모래를 33cm 깔고, 그 위에 4cm의 돌을 10cm 깝니다. 그 위로 마사토 10cm 위에 굵은 모래 8cm를 덮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건 모래층 8cm 뿐이지만요. 제일 위의 모래층은 맹렬하게 달리는 말의 말굽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일본의 삿포로, 하코다테 등의 경마장은 8.5cm, 미국의 사라토가나 벨몬트 경마장은 9.5cm로 우리나라보다 더 두터운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 국내 경주로는 모래주로로 두께가 무려 60cm나 된다. 사진 제공 : 한국마사회


경주로에 사용되는 모래들은 아무 곳에서나 퍼오는 게 아닙니다. 강의 모래인지, 바다의 모래인지 모래의 출신성분도 중요합니다. 강의 모래는 염분이 없어 좋지만, 입자가 바다모래보다 거칠고 점토의 비율이 높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강의 모래를 쓰지만, 일본의 경우는 바다 모래의 염분을 세정한 뒤 사용한다고 하네요. 아, 그런 곳에서 저도 한 번 달려보고 싶군요.

모래층의 모래가 균일한 크기가 되도록 유지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사회 직원들이 손으로 일일이 큰 돌을 골라냈다고 합니다. 그 풍경을 상상해보면 웃음이 먼저 나오네요. 하하. 물론 지금은 기계가 모래를 선별하는 작업을 합니다. 모래층의 두께와 굵기를 한 번에 조절하는 특수장비지요. 모래 크기가 제 각각이면 배수 기능은 더 좋겠지만, 말의 발굽을 보호하는 기능은 떨어집니다. 저에게는 당연히 모래 크기가 비슷하게 관리되는 편이 좋지요.

잔디주로는 유럽의 많은 경주로에 채택되는 방식입니다. 푸른 들판을 달리는 느낌이니 얼마나 좋을까요. 관람객들이 보기에도 그만이겠지요. 하지만 잔디를 키울 기후 조건이 갖춰져야 하고, 또 관리하기 힘들어 경기 횟수가 적은 상황에서만 가능합니다. 제가 있는 서울 경마공원은 1년에 1,100개의 경주가 치러지는 곳이니 잔디주로는 아무래도 어렵습니다. 미국 등에서 설치가 늘고 있는 인조주로도 있습니다. 모래주로의 단점을 보완한 인조주로는 폴리트랙, 쿠션트랙, 타페타 등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래주로에서 잘 달리는 말이 잔디주로나 인조주로에서도 역시 잘 달릴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잔디주로에 익숙한 유럽의 말들은 모래주로에서는 성적이 나빴지만, 인조주로에서는 성적이 좋았다고 합니다. 저처럼 모래주로에서 성적이 그저 그런 말도 잔디주로에 가면 훨훨 날지도 모르지요. 아 한 번 달려보고 싶군요! 그 푸른 잔디 위를 말입니다.

글 :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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