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빈슨 크루소 - 아후벨의 그림 이야기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지음, 고인경 옮김 / 별천지(열린책들) / 2010년 4월
품절
재밌는 그림책이다. 77장의 판화 그림으로 뒤덮여 있는데 글자가 없다.
글은 없지만 워낙 유명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짐작으로 스토리를 따라가볼 수가 있다. 나의 읽기가 당신의 읽기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재밌는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색채가 없는 흑백 펜선은 어린 로빈슨 크루소가 아닐까 짐작한다. 바닷가에서 자라면서 늘 바다를 동경하며, 언젠가 자신도 저 바다로 가야만 한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로빈슨 크루소는 20년도 훨씬 전에 읽은 책이어서 그가 바닷가에서 태어났는지는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시작한다.
그의 꿈속으로 달려드는 넘실대는 파도와 커다란 배들, 그 속에는 모험과 우정과 낭만이 가득할 거라고 멋대로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선원이 된 로빈슨 크루소!
하지만 애석하게도 바다는 결코 신사적이지도 않았고, 우아하지도 않았다.
거친 풍랑에 배가 뒤집히고 순식간에 생과 사가 결정된다.
난파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로빈슨 크루소.
그가 떠밀려간 곳은 무인도였다.
눈을 뜸과 동시에 밀려오는 고독과 불안과 공포!
이 낯선 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제일 무서운 것은 언제까지 여기서 홀로 살아야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낯선 환경을 자랑하는 섬의 낮은 찬란했다.
온간 진기한 풀과 열매들이 눈을 자극했을 것이다.
하지만, 뜨겁던 태양이 지고 흑암이 몰려오면
다시금 고독과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한다.
박쥐 떼라도 잘못 건드리면 크나큰 낭패!
이 모든 난관들을 기억하고 알아서 피해가려면 무수한 경험과 실패와 도전이 필요하다.
가끔 난파선이 떠밀려 오면, 인적이 있을까 기대해 보지만 어김 없이 실망만 하고 만다.
그래도 배 안에서 가져오는 식량과 옷가지와 책, 무기 등등은 모두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맞닥뜨린 또 다른 생명체는 개였다.
비록 대화가 통하지는 않지만 체온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로빈슨에게는 커다란 은총이었다.
시간은 어김 없이 흐른다. 얼굴엔 수염과 주름이 함께 뒤덮인다.
그가 그 섬에서 몇 년을 살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28년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하루 잘 살아내었지만, 위기가 왜 오지 않았겠는가.
하늘을 향해 원망도 쏟아보고 비난도 해보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빗금 여섯 개에 반대 방향의 빗금을 하나 그어서 일곱 개를 완성한다.
일주일의 표시다. 이런 일주일의 표시가 52개가 나오면 한 해가 간다.
그렇게 스물 여덟 해를 보내야 한다.
막막한 숫자다.
시간만이 충분히 많은 그에게 책이 없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어디서든 책은 꼭 필요하다. 반드시!!
쓰지 않으면 글도 말도 모두 잊어버린다.
펜을 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무엇이든 끄적인다.
일기도 되고, 일지도 되고, 상식도 되고, 역사도 된다.
그렇게 그의 표류기가 완성되어 간다.
그리고 또 다른 인간의 출연!
식인종들 사이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한 사내를 구해낸다.
금요일에 만난 그 사나이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생활이 달인 프라이데이!
그를 얻은 것은 1박2일에서 이수근을 얻은 것과 진배 없다.
야생에서 그가 준 도움은 깊고도 높다.
그리고 마침내 등장한 해적선 하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뭍으로 돌아가게 되는 로빈슨 크루소.
그렇게 그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고, 세상은 이 기적의 사나이를 찬양하게 된다.
오래오래, 300년이 다 되도록...
동화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어린이 친구들이 로빈슨 크루소를 미리 읽지 않았다면 그림을 해독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쪽이 더 맞는 표현으로 보인다.
어릴적 읽었던 기억을 잠시 접어두고, 새롭게 로빈슨 크루소를 읽어낸다면, 그 안에 깃든 여러 풍자와 교훈과 한계까지도 함께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젠 로빈슨 크루소가 섬에 갇혀 산 시간보다 더 살았으니까.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도 함께 추천해본다. 풍자에 풍자에 역설의 역설이 이어질 것이다. 통쾌하게, 혹은 씁쓸하게.
강렬한 색채의 그림이 몹시 인상적이긴 한데, 예쁘다기보다는 기괴한 편이다. 누군가에게는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만, 독특함 하나만은 누구라도 인정할 것같다. 반가운 만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