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도
윤영수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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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 문성현'으로 처음 만났던 윤영수 작가의 단편 모음집이다. 착한 사람 문성현 때도 앞의 세 작품은 연작소설이었는데, 이번에도 앞의 세 작품은 '귀가도'라는 제목으로 묶이어 1,2,3의 소제목이 따라붙었다. 여전히 소시민들의 오밀조밀한 삶의 모습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고 전작보다 유머러스함은 더 보태었다.  

첫번째 귀가도가 제법 무겁게 진행되었는데 두번째 귀가도에서 해학을 만났다. 지하철 2호선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정거장이 바뀔 때마다 서로 다른 사람을 시점으로 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시작은 230 번호를 붙인 신림역에서 시작됐다. 노약자석의 ㄱ 노인이 선 채로 졸고 있는 청년 ㅈ에게 빈 자리를 권했던 것이다. 아직 두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한 자리쯤 차지해도 무방하겠거니 여긴 ㅈ은 한 번 사양하고 두 번째에 자리에 앉았다. ㄱ 노인은 자리값이라도 되는 양 자기 이야기를 주욱 풀어냈지만 어느새 잠이 든 ㅈ 때문에 무안하기만 하다.  

그리고 226사당 역에서 사단이 났다. 두 노인이 노약자 석 앞에 섰고, 좀 더 몸이 빨랐던 ㄴ 노인이 자리에 앉았고 가장 나이가 많았던 ㄷ 노인은 선 채로 난감하다. 그러자 보다 젊지만 앉아서 무안했던 ㄴ노인이 ㅈ에게 버럭 고함을 쳤다. 잠에서 깬 ㅈ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일반석으로 갔는데 때마침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갈 수 있었다.  

이제 225방배역이다. 노약자석의 ㄱ,ㄴ,ㄷ 노인은 요즘 젊은이들의 뻔뻔함을 성토하느라 바쁘다. ㄱ노인은 자신이 권해서 앉았다는 얘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혼자 떠들었던 무안함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는 듯 보인다. ㄴ노인이 가장 목소리를 높이니, ㄷ노인은 그 덕분에 자신이 자리에 앉은 것처럼 느껴져서 불편하다. ㄴ의 기세를 보니 가장 나이 많은 자신이 쫓아가서 ㅈ을 혼내줘야만 할 것 같다.  

222강남역에서 아기 엄마가 탔다. ㅈ이 일어나 자리를 권한다. 아까는 밤을 새워 정신없는 와중에 ㄱ 노인의 권유로 앉았지만 아기 엄마를 외면할만큼 뻔뻔한 인사는 아니었다. 노약자 칸의 분노 게이지 상승과 달리 일반석의 아기 엄마 주변에선 아기가 예쁘다며 호호하하 웃음소리 가득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그런 분위기를 알지 못하고 ㄴ노인의 눈치를 보던 ㄷ노인이 달려와 ㅈ에게 성을 버럭 내니, 놀란 아기는 자지러지게 울고 아주머니들은 노인네가 노망났다고 또 성토하는 분위기다. 자신에게 처음 성질을 부렸던 건 ㄴ노인이었는데 ㄷ 노인이 다가와 뭐라뭐라 하니 ㅈ은 또 난감하고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좌불안석이다. 그런 ㅈ이 측은하게 여겨졌던 깍두기 행색의 청년 ㅊ이 ㅈ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위압적인 얼굴의 ㅊ때문에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ㅈ은 이러다 자신이 어디로 끌려갈까봐 불안하고 무서워주겠다. 그렇지만 ㅊ은 약자를 보호해준 자신의 선행에 스스로 만족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220선릉역. ㄷ노인의 뜨뜻미지근한 행태에 부아가 치민 ㄴ노인이 다시 총대를 메고 ㅈ앞에 와서 한 소리 하다가 ㅊ에게 제지당한다. 그 바람에 아기는 잠에서 깨어 또 자지러지게 울고, 노해버린 아기 엄마는 지하철에서 내려버린다.  

장면을 잠시 바꿔보자. 218종합운동장 역에서 한 학생이 가방을 두고 내리고, 그 가방을 챙겨주려던 중년 사내는 분실물센터를 믿을 수 없다며 지하철 역사에 전화를 해서 역무원을 보내라고 호통을 친다. 그 와중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모두 한 마디씩 보태어 지하철 안은 어느새 아줌마 곗날 분위기 마냥 왁자지껄해진다.  

215성내역에서 한 번 더 쐐기를 박으려던 ㅊ은 노인들이 모여서 아직도 ㅈ 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ㄴ노인은 노약자석이 자신들의 홈그라운드라 생각하고 일부러 목청을 키워본다. 마침 내리려고 문앞에 섰으니 금세 내릴 게 아닌가. 그러나 이런 젠장! 하필 지하철이 연착을 하네. 이런 식으로 윤영수의 입담은 잠시도 멈추지를 못하게 독자를 끌어당긴다. 이건 5분만 더 버티면 연속극 끝나니 아무리 급해도 화장실을 결사적으로 참는 그런 모양새라고 할까. 

이야기는 강변역을 지나 구의역에서 마무리된다. 입이 근질거리지만 더 이상은 얘기하면 안 되겠지. 지하철을 소재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 적절했다. 게다가 그 이야기는 순환선인 2호선일 때에야 더 실감 난다. 그 사람 많아 북적거리는 2호선이니만큼, 더 다양한 군상의 인간들이 모일 것이고, 그만큼 이야기는 극적이다. 사실,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다이나믹한 것이 뉴스고, 우리의 실제 현실이 아니던가. 

두번째 귀가도는 나름 착한 일을 해보려고 했던 사람들의 낭패담을 담았다면 세번째 귀가도는 보다 심각해진다. 개척교회 목사와 사모로 긴 시간을 섬겼지만 남편이 낸 사고로 딸 아이가 한쪽 눈을 실명하고, 이어 자살까지 이어지자 별거 생활에 들어간 부부 이야기가 나온다. 부부 사이를 붙여주는 아이도 있지만, 그 아이의 부재로 인해 부부 사이가 멀어지는 경우도 분명 많다. 더구나 둘 중 한 사람의 과오가 아이와의 이별을 부채질 했다면 그 가정이 온전하기는 힘들 것이다. 오랜만에 남편을 만나 하룻밤 자고 올 생각이었지만, 만난지 한 시간만에 짐을 들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아내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아들의 혼사와 자신의 건강 진단 문제로 의논할 것이 있었지만, 남편의 살림을 돌봐주는 이웃 과수댁의 존재와 자신을 잡지 않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까지 겹쳐 빗속에서 그녀는 더 떨어야 했다. 하지만 기막히게도 옆자리에 앉은 더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젊은 아가씨의 따스한 수다가 그녀의 마음을 녹여버린다.  

딸 아이의 사고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밀어붙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자신의 잘못을 마주볼 용기가 없던 남편의 괴로움을  뒤늦게 인식하는 그녀의 마음이 아파온다. 딸을 다치게 한 장본인으로서 남편은 분명 더 힘들었을 텐데, 무너져가는 가정을 붙잡지 않은 책임은 자신에게도 있음을 기어이 인정하게 된 것이다. 옆자리의 아가씨는 아프리카에 가서 미용실을 차리겠다며 한껏 환상의 나래를 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저 소망이고 이상일 뿐이라고 스스로의 입으로 고백한다. 서러운 일을 경험하고 그 마음을 잊고자 부러 밝은 이야기만 했던 그 마음결에 전직 사모가 더 울컥해버린다. 서로의 체온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들, 그러니 아직 살아 있어 고마운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이 전만큼 서럽지는 않을 것이다. 오해의 다른 면이 이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6편의 단편 중 가장 문제적 소설은 바로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이 되겠다. 읽다가 가슴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너무너무 착한 유순봉씨.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그저 성실함과 착한 마음씨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그는 '어머니 고맙습니다!'를 늘 달고 산다. 그런 그의 집에 어느 날 낯 모르는 남자가 들어섰다. 처음엔 아내의 친척인줄 알았고, 아내는 남편의 친척이거니 했다. 알고 보니 생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엔 갈 줄 알았는데 윗목에서 잠을 청한다. 단칸 방에서 아이둘과 네식구 자기도 빠듯한 살림이었다. 추운 겨울이니 차마 내칠 수 없어 다음 날은 나갈 줄 알았는데 그렇게 들어선 기천웅은 벌써 3년 이상 유순봉의 집에서 기생하며 오히려 이들 식구들을 호령하고 있다. 이런 사정이 방송국 귀에까지 들어가 취재를 나왔다. 기천웅이 전과자라며, 그를 내쫓고 싶냐고 다그쳐 묻는 피디에게 유순봉은 전과자라고 다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오히려 두둔하고 나선다.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는 설상가상, 일파만파다. 유순봉이 착한 것도 알겠고, 늘 감사하며 사는 그보다 그런 그를 이용해 먹는 이 사회의 영악한 인사들이 더 나쁜 거라고 분명히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유순봉에게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이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똑똑하기도 하고 현명하기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래서 착한 사람을 봉으로 여기는 풍토가 생기는 것 아니냐며, 오히려 피해자인 그를 닥달하고 있으니, 나 역시 착한 사람을 답답하게 여기는 똑같은 속물이 되고 만다.  

제일 나쁜 것은 기천웅이었지만, 유순봉을 이용해 먹는 피디의 행태도 그 못지 않았다. 이 와중에 일요일이라 영장이 안 나온다는 한 마디는 심각한 와중에 한숨 섞인 웃음을 짓게 하면서 잠시 쉬어갈 짬을 내준다. 착하게 사는 것 외에 그 어떤 세상살이에 대한 답이 없는 유순봉 씨에게 세상은 너무도 잔인하고 두려운 대상이다. 그러니 그의 '어머니 감사합니다!'라는 혼잣말은 그를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주문 같이 들린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곧 무너질 것 같은 초라하고 버거운 가장의 심사 말이다.  

너무 착해서 답답한 유순봉 씨 얘기 다음에는 너무 못됐지만 어이 없어서 웃게 만드는 명구 씨가 등장한다. 바로 다섯 번째 단편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 편이다.  

아내 혜순 씨의 표현에 의하면 '개도 안 물어갈' 명구 씨는 아내를 그저 밥해주는 식모정도로만 여기고 있을 뿐이고, 결혼하고 수십년 동안 오입질로 날이 새는 인물이다. 게다가 똥오줌 다 받아내야 하는 시어머니까지 건사해야 하니 혜순씨의 일상이 얼마나 고단했겠는가. 그런 혜순 씨의 유일한 낙은 어릴 적에 잠시 스쳤던 친구 성희의 오빠에게 환상을 갖고 편지를 쓰는 일이다. 편지 속에서 혜순 씨는 성호 오빠를 여보라고 부르며, 당장이라도 그가 있는 미국으로 갈 것처럼 덤빈다. 나중에 아내의 여권과 편지를 발견한 명구 씨는 온갖 구타와 패악질을 쏟아내고는 집을 뛰쳐나온다. 나오면서 아내의 공책들을 다 들고 나온 명구 씨는 뒤늦게 아내의 오랜 기록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혜순 씨의 지난 삶을 되돌아 보며 연민을 느낀다. 그리하여 대인배의 마음으로 미국의 성호에게 아내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 마음을 편지로 적으며 스스로를 시인 혹은 문필가로 느끼는 명구씨. 집으로 돌아와서는 병든 어머니께 올리는 편지에서 스스로를 기구한 인생역경을 거친 불우한 사내로 표현하며 또 망상에 빠져든다. 너무 착해서 문제였던 유순봉과 비교되는, 스스로를 착하다고 믿고 있는 어이 없는 사내의 원맨쇼를 보는 인상이었다. 혜순 씨를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인사이건만, 이 남자의 행태가 너무 우스워서 독자는 미워하는 마음을 먹기도 힘이 든다. 이렇듯 개도 안 물어갈 인간에게조차 유머와 해학을 함께 불어넣는 것이 윤영수 작가의 미학이기도 하다. 

그녀의 글은 늘 따뜻했다. 여섯 번째 단편에서도 세상사에 찌든 외롭고 고단한 삶을 이야기하지만, 돈밖에 모르며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몹쓸 아버지가 등장하지만, 그렇게 발 디딜 틈 없이 위태위태한 인생 가운데 서로 기대어 살며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은주 씨를 등장시키지 않던가. 세상살이의 척박함과 살벌함을 포장해서 가리지 않지만, 그것들을 그저 냉소적인 시선으로 차갑게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녀의 글은 힘이 있다.  

착한 사람 문성현을 읽을 때는 순수 우리말을 많이 써서 부끄럽게도 문장이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번 책에서는 부러 많이 쓰는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전작과 닮아 있지만 전작보다 한 발 앞서 나간 문장과 이야기가 반갑기만 하다. 그렇지만 표지 디자인은 대략 난감하다. 표지 때문에 책을 살 것인가 몹시 고민했다는 고백을 해둔다. 

덧글) 269첫줄 위선을 가면을 >>>위선의 가면을 

오타를 하나 더 발견했는데 북클립을 한꺼번에 떼내는 바람에 어디에 표시를 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아무튼 책이 많이 찍혀서 다음 번에는 고쳐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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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1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1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