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품절


급기야 엄마도 깨달았다. 냉장고를 다리미로 부른다고 냉장고가 옷을 다릴 수 없는 것처럼 철수를 피아니스트로 부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냉장고에서 열 조금 난 걸 가지고 다리미라고 착각한 것인지도 몰랐다.-44쪽

어쩌면 뉴스의 가장 큰 기능은 위로가 아닐까. 몇 가지 소식만 들어도 "내가 아니라 참 다행이야." 또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행이야." 하는 식의 위로가 가슴깊은 곳에서 진하게 우러나오곤 했다. 인생이 우울하고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뉴스를 보세요! 아마도 모든 사용 설명서의 공통 사항이 아닐까. 아버지가 계속 뉴스를 본다면 철수가 위험한 제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내 자식만 저런 건 아니구나 정도는 될 것 같았다.-114쪽

졸업하고 뭐 하느냐는 말에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하면 누구도 더는 묻지 않았다. 이미 훌륭한 완제품으로 분류된 이상, 테스트를 계속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회사 다녀요."라고만 대답하면 어떤 회사인지, 연봉은 얼마인지 질문 공세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앞으로 다 잘 될 거라는 따뜻한 덕담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건 그 제품을 위한 게 아니라 소비자의 인품을 위한 것이었다. 제대로 되지 않은 제품 앞에서는 인품을 드러내기가 더 쉬운 법이다. -119쪽

-어젯밤 지켜 줘서 고마워.
오류가 아니라 기능을 만들어 준 건가. 철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그녀의 문자를 보며 의미를 곱씹고 있는데, 그새 문자 한 통이 또 들어왔다.
-나 말고 평생 지켜 줄 수 있는 여자를 만나.
별점은 계속 깎여 나가고 있었다.-122쪽

결혼식에 다녀온 아버지와 엄마는 철수와 누나를 볼 때마다, 봄은 왔는데 벗지 못하는 겨울 코트처럼 답답하고 불편해했다. 너무 일찍 벗어 버리면 춥고 쓸쓸했고, 너무 늦게 벗어 버리면 덥고 짜증 났다. 만약 여름이 될 때까지도 벗지 못한다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128쪽

그래도 철수는 설마 사은품은 아니겠지 싶었다. 적어도 원 플러스 원 행사처럼 동등한 제품 정도는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나중에는 점점 사은품이 되어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별점조차 매기지 않는 비매품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끼워 준다 해도 선뜻 내키지 않는 제품이 될 수도 있다. 그쯤 되면 소비자도 못 쓰는 물건을 재고 처리하는 게 아닌지 하는 의심 어린 시선으로 철수를 바라볼 것이다.-136쪽

사용 설명서가 완성되어 갈수록 철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읽고서도 엄마와 아버지, 누나가 철수를 선택했을까. 그녀들이나 친구들, 또 면접관들은 어땠을까. 이걸 읽고도 철수를 사용할 생각이 들었을까. 혹시 사용 설명서가 없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철수를 선택하고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철수는, 과연 철수는, 철수를 선택했을까.-147쪽

철수는 조금 더 자 두려고 눈을 감다가 문득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결국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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