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게
내 너를 위해 더듬이를 잘라야겠느냐 내 너를 위해 저녁 해를 따라가야겠느냐 모래내 성당의 종소리는 들리는데 개연꽃 피는 밤에 가을달은 밝은데 가슴마다 짓이겨진 꽃잎이 되어 꽃잎 위에 홀로 앉은 벌레가 되어 내 너를 위해 눈물마저 버려야겠느냐 내 너를 위해 날개마저 꺾어야겠느냐 -50쪽
무릎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너도 무릎을 꿇어야만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느냐 차디찬 바닥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을 때가 일어설 때이다 무릎을 꿇고 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이다 낙타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 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 밤이 깊으면 먼저 무릎을 꿇고 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 -62쪽
햇살에게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102쪽
마음에 집이 없으면
마음에 집이 없으면 저승도 가지 못하지 저승에 간 사람들은 다들 마음에 집이 있었던 사람들이야
마음에 집이 없으면 사랑하는 애인도 데려다 재울 수 없지 잠잘 데 없어 떠도는 사람 잠 한번 재워주지 못한 죄 그 대죄를 결코 면할 수 없지
마음에 집이 없으면 마당도 없고 꽃밭도 없지 꽃밭이 없으니 마음 속에 그 언제 무슨 꽃이 피었겠니
마음에 집이 없으면 풍경소리도 들을 수 없지 마음에 세운 절 하나 없어 아무도 모시지도 못하고 누가 찾아와 쉬지도 못하고
마음에 집이 없으면 결국 집에 가지 못하지 집에 못 가면 저승에 계신 그리운 어머니도 뵙지 못하지 -114쪽
꽃을 보려면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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