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3 - 여씨와 유씨 - 건설과 숙청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3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11월
절판


역사의 패배자들에게 문학은 영생을 주었다. 유막둥이에게 패배한 항우만이 아니라 여후에게 살해된 한신도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나이가 되었고, 척부인도 가장 가련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어쩌면 이 모든 결과도, 사마천이 <사기>에서 의도한 것일지 모르겠다. ‘항우본기’나 ‘회음후열전’ 등에서 사마천이 유막둥이가 아니라 항우나 한신에게 공감하도록 글을 써내려갔다는 점은,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당시 일어났던 일은 물론 이러한 영웅 판타지와는 다를 것이다. 현실 권력의 앞에는 절대적인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영웅도 엄청난 악당도 없다. 패배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안타깝지만, 여러 번 읽으면 그들이 패배할 이유가 없지만은 않다는 점을 알게 된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사연은 서럽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언제나 정당했던 것만은 아니다.
-5쪽

입술 가운데를 세모꼴로 칠하는 것은 한나라 시대의 화장법이라고 한다.

-31쪽

<사기> ‘고조본기’에 따르면 유막둥이는 황제가 되고 나서 이렇게 말했대요. "계책을 짜내는 일은 내가 장량만 못하며, 백성을 위로하고 양식을 공급하는 일은 내가 소하만 못하고, 백만대군을 통솔하는 일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을 쓸 수 있었고 그래서 천하를 얻은 것이다. 항우 측에 쓸 만한 인재는 범증 하나였지만, 항우는 그마저 제대로 쓰지 못하여 나에게 졌다."
사마천이 보기에 리더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른바 용인(用人), 즉 사람 쓰는 능력입니다. 지도자 본인이 모든 능력을 고루 갖출 필요는 없으며, 다만 각 분야 능력 있는 인재들의 마음을 얻으면 충분하다는 사상이지요. 이러한 생각이 2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동아시아의 독특한 지도자상을 형성했어요. <삼국연의>의 유비나, <수호지>의 송강, <서유기>의 삼장법사 등, 이렇게 무능력한 리더들이 다른 문화권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37쪽

당시 사람들도 한신이 정말 모반하려 했을까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민심이 한신에 동정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신들을 숙청하는 동안 황제는 자주 사면령을 내렸는데, 혹시 있을지 모를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56쪽

한신은 몰락 후에 더욱 삼가는 바가 없었다. 몰락 이후의 오만한 언행이 그의 비참한 죽음에 일조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신이 말을 공손히 하고 주위를 살폈다고 해서, 유막둥이와 여치가 그를 살려 두려 했을까?

-62쪽

유막둥이는 군현제도 봉건제도 택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가족도 믿지 못한 채 천하를 직접 다스리겠다며 무리하게 군현제를 밀어붙였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어요. 초나라의 항우는 부하들에게 땅을 나눠주며 봉건제를 부활시켰지만, 유막둥이 같은 ‘공신’들이 더 많은 땅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무너지고 말았어요.
유막둥이는 공신들에게 땅을 주어 일단 안심시켰다가 기회가 되는 대로 ‘회수’했어요. 다시 빼앗은 땅 일부는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군현으로 삼고 일부는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자기 아들과 조카들한테 건네주었지요. 여러 공신들 즉 ’이성제후‘의 땅은 하나둘씩 황제 직할의 군현이 되거나 황제의 가족인 ’동성제후‘의 나라로 바뀌었어요. 예컨대 한신에게서 거두어들인 제나라 땅은 유막둥이의 아들에게, 초나라는 그 사촌형에게 넘어갔지요. 이러한 정책 덕분에 한나라는 내전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당하는 쪽이야 괴롭겠지만요.
-63쪽

한신이 실각할 무렵 전후로 장량은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장량은 신선이 되겠다며 정계를 은퇴했다. 장량은 매우 영민한 사람이었으므로 "신선이란 헛되고 궤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사리기 위해 그러했다고 사마광은 생각한다. 그러나 장량이 신선사상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73쪽

유막둥이에게는 서로 다른 여인에게서 얻은 여덟 아들이 있었다. 여후의 아들 유영은 다른 일곱 형제와 경쟁해야 했다. 친누이 노원공주와 그 남편 장오는 유영에게 매우 든든한 지원 세력이었을 것이다.

-78쪽

조나라 땅은 중원에 있고 오래전 전국시대부터 문화의 중심지였다. 유막둥이는 그 땅을 여후의 사위인 장오에게서 빼앗아 척부인의 아들에게 준 것이다. 이후 조나라의 왕 자리를 놓고 여씨와 유씨의 세력 다툼이 일어난다.

-82쪽

<사기> ‘유후세가’는 장량의 전기입니다. 몰락한 귀족 장량은 젊어서 황석공이라는 노인을 만나 수련을 쌓았대요. 황석공의 정체는 신비한 ‘누렁바위(黃石)’라나요. 장량은 전쟁 중에 전쟁터에 나가지도 않고 후방에서 작전을 세워 능력을 발휘하고요, 통일 후에는 ‘상산사호’라는 수수께끼의 노인들을 모셔오기도 하지요. 결국 몸소 신선이 되겠다며 속세와 인연을 끊습니다. 후세의 어떤 연구자들은 장량을 전형적인 도가 지식인으로 이해합니다. 이전 세대 법가 지식인과는 처신이 사뭇 다르기는 하지요. 법가라면 얼핏 모질고 야박하다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회 개혁 세력이었습니다. 어쩌면 사회가 서구화된 요즘, 우리에게 더 익숙한 지식인의 모습일지도 몰라요. <한비자>에도 나오지만,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버려도 좋다는 의식이 있었어요. 상앙이니 이사니 실제로 개혁에 나섰던 법가 지식인들 가운데 제 명에 죽은 사람도 없어요. 그들 덕에 바로 민중의 삶이 나아진 것만은 아니었지만요.
-97쪽

그러나 도가 지식인은 달라요.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거꾸로 자기 몸부터 챙겼답니다. 노자는 난세를 피하여 인간사회를 등졌지요. <장자>에는 벼슬살이에 묶였다가는 자기 몸을 망칠 수도 있다는 철학이 등장합니다. 도가 지식인은 소하나 진평처럼 절묘한 처세술로 복이란 복은 다 누리기도 하며, 장량이나 ‘상산사호’처럼 은일지사가 되기도 하죠. 개인을 중시하는 도가 지식인의 모습은 이후로도 동아시아의 독특한 전통을 형성하였답니다.
-97쪽

한신을 유막둥이에게 추천한 것은 소하이다. 그러나 한신을 죽이는 일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 얄궂은 일이다. "한신은 소하 덕분에 성공의 길을 갔고, 또 죽음의 길을 갔다."(이중톈)

-111쪽

노관은 연(燕)나라의 왕이었다. 숙청 당할까 두려워하다가 흉노와 손잡고 모반을 기획하지만, 결국 황제를 이기지 못하고 흉노로 망명한다. 연나라 땅이 변란에 휩싸인 이 무렵, 위만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에 입국했다고 한다.

-134쪽

여후와 척부인의 관계는 단순히 질투심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대립으로 파악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여후가 척부인을 숙청하려는 상황은 이전의 공신숙청과 같은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45쪽

소하의 전기 ‘소상국세가’를 읽다 보면 뭔가 앞뒤가 어색합니다. 전란의 시대에 둘도 없는 행정가였던 소하.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제국의 2인자가 되자 소하는 큰 사업에 손대지 않습니다. 소하에 뒤이어 승상이 된 조참과 진평도 술만 마시며 일을 벌이지 않았지요. 어째서 이렇게까지 일을 안 했을까요? 황제의 질투가 두려워서? 단지 그것 때문이었다면 한나라는 성공한 제국이 되지 못했겠지요. 조참의 전기 ‘조상국세가’에 따르면 백성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나요. "소하가 제정한 법... 청정무위의 정책 집행하니 온 백성 한결같이 편안하네." 유막둥이와 여후, 소하와 동료 대신들은, 도가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되도록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 ‘무위이치(無爲而治)’의 정책기조는, 진나라의 까다로운 통치를 싫어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특히 어필했겠지요.
-151쪽

그러나 ‘내버려 둔다’는 기조만으로는 제국을 운영할 수 없죠. 사실 백성들 처지에서도 유력자(豪强)의 횡포를 규제해주는 강력한 법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요.(힘없는 백성의 입장에서는 자유방임만큼 불리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한나라는, 도가 사상의 ‘무위’를 모토로 삼은 채 법가 사상에 입각한 진나라의 제도를 물려받은, 묘한 하이브리드 체제로 운영됐습니다. (사실 도가 사상과 법가 사상을 버무리려는 시도는 진작부터 있었지요.) 한편 이 무렵부터 유가 지식인들도 정계에서 활약하기 시작해요.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숙손통입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유가 사상이 통치이념의 위치에 오르게 되는 것은 몇 세대가 지난 후의 일이랍니다.

-151쪽

노자의 부쟁사상. 굳이 경쟁하고 이기려 들지 말라는 의미인데, ‘나서지 말라’는 처세술의 의미도 있다. 진평의 경우에 특히 이런 처세가 눈길을 끄는데, 결국 이것이 내전을 막아 천하를 안정시켰으니 천운이랄까.

-168쪽

짐승의 피를 찍어 입가에 바르는 삽혈(歃血) 은 고대의 맹세 방식이다. 이 맹세에 따르면 여씨 왕을 세우려고 할 때 대신들이 내전을 불사, 들고 일어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진평은 왕릉과 생각이 달랐다.

-171쪽

유막둥이는 공신들한테 맡겼던 땅을 빼앗아 유씨한테 주었습니다. 유막둥이 자신도 항우를 배신했으니만큼, 공신들을 믿기 어려웠겠죠. 그런데 유막둥이가 죽자 권력이 여후에게로 넘어갔어요. 여후로서는 유씨 역시 믿을 수 없었죠. 유씨 왕들 대부분은 남편 유막둥이가 다른 여인들과 낳은 아들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힘닿는 데까지 임금 자리를 빼앗고 여씨를 제후왕으로 앉힌 것이지요.(여후가 죽은 후 다시 유씨로 바뀌기는 하지만요.) 결국 여후 역시, 크게 보면 유막둥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을 벌였던 셈입니다. 둘 다 그나마 믿을 사람으로 자기 직계가족을 택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이, 권력의 비정한 속성일까요.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원래 한 가족이던 ‘동성제후’들끼리도 서로 창칼을 겨누고 내전을 일으키지요. 이 내전은 ‘오초7국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집니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나라는, 봉건제도 아니고 군현제도 아닌 새로운 체제의 제국으로 발전했어요. 봉건제와 군현제의 이러한 중간 형태를 군국제라고 부른다지요.
-187쪽

사마천은 여후를 잔인한 여인으로 그렸지요. 사실 사마천의 붓끝에서 멀쩡하게 묘사된 여인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교수는 "당시 많은 부인들이 유교의 예법...에 속박되지 않고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무슨 특종이라도 보도하듯, 악의를 품고 붓끝을 놀린 사마천의 심리 상태도 정상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사마천이 궁형에 처해진 후 인생관에 변화가 와서 여성에 대한 혐오나 증오의 감정을 품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동양사학계의 대가가 쓴 글치고는 다소 도발적입니다. 그러나 지적했다시피, 사마천은 여후를 나쁘게만 그리지는 않습니다. ‘여태후본기’의 말미에 실린 ‘좋은 정치를 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했지요. 여태후의 전기는 ‘세가’나 ‘열전’이 아니라 당당히 ‘본기’에 실려 있습니다. 심지어 그 위치마저, 유막둥이의 생애를 다룬 ‘고조본기’(권8) 바로 다음에 아홉 번째 책(권9)으로 이어지지요. 황제의 자리는 아들 혜제(유영)가 물려받았는데도, ‘혜제본기’니 ‘효혜본기’ 같은 것은 따로 없고, 여후만이 진시황제와 항우, 유막둥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221쪽

미야자키 교수도 인정하고 있어요. "고조본기의 뒤에 여후본기를 놓은 것도 훗날 종종 문제가 되었다. ... 사마천은 이 시기의 실권자가 여후였다는 점을 중시해 천자의 존재를 무시하고 ‘여후본기’를 놓은 것이다." 사마천이 여후를 마냥 깎아내리려고 했다고 보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221쪽

중국에서 가부장적 국가의 제도적 확립은 주나라의 종법 제도에서 완성된다. 그렇다면 그 이전, 즉 한자의 형성기인 주나라 이전 은나라 때 여성은 가족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였을까? 우선 여(女)란 글자의 형태를 보자. ‘여’의 갑골문 자형을 보면 여성이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고대에는 여자건 남자건 앉을 때 꿇어앉는 것이 기본적 자세였다. 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이 기마 전술을 위해 호복을 채택하기 전까지 바지는 중원의 중국인들에게 낯선 것이었다. 또 한나라 이전에는 의자가 없었고 자리(席, 깔개)를 깔고 그 위에 앉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자건 여자건 무릎 꿇고 앉는 자세가 예의 바른 기본 자세였다.
-233쪽

그렇다면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은 과연 가치중립적인 일상적 자세였을까? 공경, 경외, 조심스러움을 나타내는 ‘경(敬)과 따름, 복종, 몸에 붙이고 떼지 않음의 뜻을 지닌 복(服)의 갑골문 자형은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한데, 모두 가운데에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의 요소를 갖고 있다. 무릎 꿇는 동작은 제례에 참여한 사람이 취하는 공손한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갑골문의 여(女) 중에는 윗부분에 가로선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는 머리 장식을 가리킨다. 이것은 높은 신분의 사람임을 나타낸다. 짧은 머리나 더부룩한 머리는 지위 없는 천인을 나타내는 데 비해 단정하게 정리하여 관(冠)으로 장식한 머리는 높은 신분의 상징이다. 또 결혼한 여성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여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234쪽

갑골문에서 부(婦)는 녀(女)가 생략된 추(帚)의 형태로도 많이 쓰였다. 추는 빗자루이다. 후대의 용법으로서 아내를 낮춰 이르는 말로 ‘기추지첩(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드는 비천한 첩)이라고 했다. 출토된 갑골문 자료를 보면 이 ’부‘라는 글자는 지배층 여성의 호칭 앞에 붙는 접두사로 흔히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은나라가 제사중심사회였음을 상기해본다면, 추는 청소용 빗자루라기보다는 제례 의식에 앞서 물을 뿌려 제사 장소를 정화하는 용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부‘는 제사에 참여하여 집안을 유지하고 나아가 국가 경영에도 참여하는 왕실과 혼인한 유력 씨족 집단의 여성 대표자를 가리키는 글자로 볼 수 있겠다.

-235쪽

최근에는 가부장제 하의 여성들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억압적이고 굴종적으로 살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자유를 누렸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 성과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자가 생긴 이래 며느리이자 아내인 부(婦), 아니 여성 전체인 여(女)는 언제나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여성의 낮은 지위의 역사적 연원은 깊고 강고하다. 여성이 무릎을 펴고 자신의 두 발로 일어서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역사를 되돌아본다는 것이 항상 유쾌한 일일 수는 없다. 때로 우리는 철저한 단절을 위해, 그 깊은 뿌리를 확인하기 위해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37쪽

왕,후,장,상은 각각 왕, 제후, 장군, 재상을 의미한다. 동아시아에 이 말이 있다면, 서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길쌈할 때 누가 귀족이었겠는가?(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 와트 타일러 봉기(1381) 때 영국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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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7-20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내주신 책 어제 받았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잘 읽을께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마노아 2011-07-20 09:40   좋아요 0 | URL
책이 좀 무겁지요? 재밌게 읽으셔요^^

2011-07-20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0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