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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향한 탑 ㅣ 그림책은 내 친구 23
콜린 톰슨 지음, 이유림 옮김 / 논장 / 2010년 4월
평점 :
태양을 향한 탑이라고 해서 언뜻 '바벨탑'을 상상했다. 오만과 금기와 도전의 상징이었던 그 탑을 얘기하나 싶었는데 무척 다른 이야기였다.
달에서 보이는 지구의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유일하다고, 나도 언젠가 들었었다. 만리장성이 세워지기 시작한 이래로 그렇게 2천 년간 달은 지구의 장성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 책은 거기서 다시 100년이 지난 시점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100년 뒤라고 상상해 보자. 지구가 멀쩡히 돌아가고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많은 몸살을 앓은 지구가 지금만큼 청명한 하늘을 보여줄 거라고는, 미안해서도 장담 못하겠다. 이 책에서도 그랬다.
온통 노란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여 태양이 보이지 않는 지구.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조차도 태양을 바라본지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그가 손자처럼 어린 나이였을 때는 파란 하늘과 밝은 태양을 보았더랬는데, 이제 손자는 사진 속에서만 그 하늘을 확인할 수가 있다. 남자는 지금도 구름 너머의 하늘이 그렇게 새파란지 보고 싶지만, 알 도리가 없다. 이제 지구에는 연료가 얼마 남지 않아서 구름을 뚫고 날아가는 여행보다 더 중요한 일에 써야 했기 때문이다.
도시는 생명력이 없어 보이고, 이렇게 망가진 지구에서도 여전히 활개를 치고 다니는 바퀴벌레만이 당당해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는 태양을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부유한 그를 위해서도 비행기는 더 이상 날지 않았다.
손자는 기구를 만들어서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아이디어를 냈다. 지금껏 세상에 없던 커다란 기구를 만들었지만, 사흘을 올라간 뒤 기구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마치 더러운 솜으로 싸인 것처럼 노란 구름 속에 턱 걸려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바람 한 점 없는 정적 속에서 사흘을 더 버티다가 결국은 기구 꼭지를 열고 지구로 돌아왔다. 픽사의 아름다운 애니메이션 'UP'처럼 맘껏 날아오르지 못한 게 유감이다.
손자는 다시 의견을 냈다. "탑을 세워요. 태양을 향한 탑요."
역시 어린 친구인지라 상상력과 도전 정신이 남다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노인은 마음을 고쳐 먹었다. 꿈을 이루는 데 쓰지 않는다면 그 많은 돈을 뭐에 쓸 것인가!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바위 위에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동우너해서 하늘을 향한 도시를 짓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바벨탑과 비슷해진다. 저 커다란 바위는 호주의 그 유명한 암석을 떠올리게 하는데, 역시나 작가가 호주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고 한다.
십년 동안 일을 해서 탑을 쌓았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는 더 늙었고, 손자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그 후 이십 년을 더 일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는 아주 늙었고, 손자는 자기 아이들을 낳았다. 그렇지만 태양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손자는 초조해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태양에 닿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 세상에 없던 커다란 기계를 만들었다. 기계는 집만큼이나 커다란 바퀴로 세상 곳곳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굳센 팔로 건물을 통째로 들고 왔다. 모든 대륙에서 굉장한 건물들을 들고 와서 높이, 더 높이 쌓아 올렸다. 이글루도 보이고 이스터 섬의 모아이도 보이고 심지어 피사의 사탑까지도 보인다.
그렇게 하늘 높이 쌓고 또 쌓아서 마침내 구름 너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새파란 하늘과 찬란히 빛나는 영광스런 태양을 말이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던 노인은, 세월을 견뎌 낸 팔에 증손자를 안고 탑의 꼭대기에 앉았다. 생명의 따뜻함이, 젊은 시절에 그랬듯, 살갗 위에 내리쬐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해낸 것이다. 그도 대단하지만 손자가 더 대단해 보인다.
그날부터 날마다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태양을 볼 때까지 끝도 없이 줄을 서서 탑을 향해 올라갔다.그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숙박이나 수송 수단 등등, 복잡한 질문들은 거두어 들이자. 평생 한 번 보지 못한 태양이 저 위에 있다면 누구라도 그곳을 향해 긴 여정을 꾸리고 싶지 않을까. 그곳은 그 자체로 성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태양도 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환경에서 피사의 사탑이 여태 멀쩡했냐는, 그런 질문도 필요 없다. 그저 꿈꾸었던 것을 향해 묵묵히 도전하고, 마침내 그것을 이루어낸 사람의 환희를 상상해보면 족하겠다. 무엇보다 그림 보는 재미가 아주 탁월하다. 색채도 생생하게 살아있지만, 탑을 쌓는 과정 중간중간 숨은그림찾기 하듯 온갖 다양한 물건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표지 그림에는 에펠탑도 보이고, 유명한 다리, 불상, 풍차, 신전, 심지어 만리장성과 피라미드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까지도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을 꼼꼼히 찾아보고 즐기면 더욱 즐거울 그림책이다. 이렇게 대단한 그림을 그린 사람이 사실은 색맹이라고 하니 놀랍고 충격적이다. 이 작품이 나올 때 함께 출간된 '영원히 사는 법'을 얼른 읽어야겠다. 몹시나 궁금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