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2 - 항우와 유방 - 제국의 붕괴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2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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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권은 내게 무척 파격적인 책이었다. 기존에 만나보지 못했던 진행 형식이 신선해서 매우 매력적이었던 책이었다. 1권의 주인공이 진시황과 이사였다면 2권의 주인공은 항우와 유방이다.

이 시리즈는 기존의 역사 만화들과 달리 '서사'를 가급적 줄이고 장면 장면의 연결로만 이어져 있다. 마치 사진을 느리게 돌려서 만든 영화 같은 느낌? 서사를 줄였기 때문에 초한쟁패의 주요 내용을 전혀 모르는 독자라면 이 책의 묘미는 별로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살이 붙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적 고증에 힘을 써서 당대의 의복과 무기, 관의 형태 등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그것이 작품의 전개에 극적인 힘을 불어넣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하나의 단점이기도 하다. 사실, 이 시대를 그려내면서 기존의 만화 같은 '배경 그림'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고증에 고증을 더한다 할지라도 상당한 양의 상상을 덧붙여야 할 것이니 말이다. 그런 특징들은 저자의 그림 특색과 맞물려서 이렇게 부조 같은 느낌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러니까 이 책을 보면서 그림의 '입체감'을 기대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다. 인물들이 그다지 동양인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저자의 그림 스타일이라고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매 장면에 주석처럼 따라가는 짧은 설명들이 본문에서 부족한 살이 되어준다. 여백은 충분하지만 할 말은 하고 지나가는 셈이랄까.

한신이 귀족 출신이 아니라고 말한 것과, 호해가 단순한 바보는 아닐 거라는 전제 하에 진행시킨 점들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우리에게 지나치게 익숙한 나머지 오히려 '객관화'해서 보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는 머리말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무의식적으로 저자의 지적대로 우리가 흘러가던 경향이 있었으니 말이다.

동아시아의 고대사만 전설이 넘쳐나는 건 아니어서, 헤로도토스나 플루타르코스 등 서양 고대사 역시 예언과 징조로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텍스트를 낯설게 느끼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다. 반면 이미 지나칠 정도로 익숙해져버린 <초한지>를 우리는 충분히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만일 영화나 그림에서 튜더 시대의 판금 갑옷을 입은 한니발이 포병부대를 지휘한다면, 여러분은 짜증을 낼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때의 복장을 한 항우나 유방을 보아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전국시대 말의 유물대로 복식을 고증하면, 그게 더 낯설어 보일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한니발과 항우가 동시대 인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깜빡깜빡 잊는다. 우리 머릿속에서 한니발은 먼 옛날 사람이지만 항우나 유방은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 4쪽

책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에 실린 윤성훈 가회고문서연구소 연구원의 '오랑캐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글도 오래 눈길을 사로잡았다. '夷'라는 글자 하나를 가지고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서 '초'나라와 초 문화를 함께 언급한 것이 좋았다. 얼마 전에 읽은 '춘추전국이야기' 3권에서 매력적인 초나라를 만났는데, 그것을 다시 확인한 기분이 들었다.    

  

초나라 지역은 거대한 장강과 수많은 지류, 안개와 비가 많은 습윤하고 온난한 기후 등의 자연 조건으로 인해 북방처럼 노동 집약적 집단 농업 경제 및 강력한 중앙 집중형 권력이 출현하기 어려웠다. 또한 물의 유연함, 거대한 대자연에 대한 경외가 뿌리 깊었다. 사회 속의 인간관계, 문화와 규율의 법칙성을 중시하는 유교가 북방의 고대 문화를 대표한다면, 인위에 대한 자연의 우위와 기존 질서를 초월한 자유로운 해방을 추구했던 도가 사상은 남방의 사유였다.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가도 장강 유역에서 탄생했다. 유가와 도가 사상은 음양의 관계로 중국 문화의 양대 축을 형성한다. 산수의 아름다움에 대한 침잠과 찬탄이 결여된 중국 예술은 상상하기 어렵다. 남방, 즉 초라는 타자로 인해 중국 문명은 그 거대한 풍요를 획득할 수 있었다. – 212쪽 

 마지막으로 '漢'의 유래와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한쪽으로 정리한 부분이 이 책을 진정으로 정리한 느낌이어서 유독 좋았다. 한이라는 글자가 우리나라를 뜻할 때처럼 '나라 이름 한'이겠거니 무심히 넘겼는데 한수 한이라는 글자라는 것을 제대로 확인했다. 

유방이 세운 제국의 이름인 한(漢)은 원래 지명이다. 한은 한수(漢水)라는 장강의 한 지류를 가리키는 한자인데, 이 한수의 중상류 유역이 한중이다. 유방은 패(沛) 출신이다. 패는 원래 송(宋)나라 땅이었다가 송이 멸망한 뒤 초나라에 편입된다. 또한 거병 후 줄곧 초 항우의 휘하였으므로 그는 엄연히 초나라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 사건을 계기로 유방의 아이덴티티는 극적인 변화를 맞는다.
한중은 유방과 항우의 근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외부로부터 격절된 궁벽한 산골이 아니었다. 험한 길이긴 하여도 관중 및 촉 등 주변 지역과 교통로가 확보되어 있었으며, 한중 분지와 사천 분지는 온난하고 강수량이 풍부하여 농업 생산력도 높았다. 또한 혜문왕 이래로 진(秦)에 속하여 왔던 진나라의 고지(故地)다. 한중의 왕이 된 후 유방 집단의 성격은 크게 변모한다. 한중 시절 유방 집단은 군사 및 행정 부문에서 진나라의 시스템을 적극 도입하였다. 이를 통해 패 지역의 토착적 군사 집단에 불과했던 유방 집단은 전국적 세력으로 급성장하였다. 이에 반해 항우는 군사적 승리를 쟁취하고도 다시 초나라라는 지역성으로 회귀해버렸다. 바로 이 점이 초한쟁패에서 유방과 항우의 운명을 갈랐다. 유방이 한왕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우연한 사건이었으되, 그가 건립한 대제국이 한(漢)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213쪽

이 시리즈가 모두 10권으로 기획된 책인데 출간 속도가 빠른 편이 아니어서 기다리다가 지칠까 봐 다소 염려가 된다. 줄줄줄 줄거리를 다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만 짚으면서 판화로 찍듯 각인을 시켜주는 책인 것이 느린 간격의 출간으로 찾아오는 지루함을 다소 줄일 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2권에선 유막둥이가 패배하는 바람에 항우의 인질이 되어 있었다는 아주 잠깐의 등장뿐이었지만 3권에선 주인공으로 등장할 여태후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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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7-10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락이 제멋대로 이동해서 몇 번을 수정했는지 모른다. 이런 현상이 아주 자주 발견되고 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2011-07-13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과 만화 두 장르가 적절하게 어우려졌다고 생각했던 책입니다.
처음 읽을 때는 한나라에 대한 기본 역사 지식이 얕아 사건 위주로 좇아가기가 조금 버거웠는데,
두 번째 읽으면서는 복식과 각주까지 꼼꼼하게 읽게 되면서 책을 더 즐길 수 있었습니다.
김태권 작가가 완성해가는 인문만화는 진행형이겠지만, 콘텐츠에 대한 작가의 책임감은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4권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지요..

마노아 2011-07-13 20:55   좋아요 0 | URL
확실히 1권 읽을 때 좀처럼 만나지 못한 파격성에 한참 흥분했던 기억이 나요.
여타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된 특성이 있지요.
기대하는 작가분인데 벌려놓은 일이 많으셔서 다음 권은 늘 오매불망 기다려야 해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