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이야기 3 - 남방의 웅략가 초 장왕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3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12월
구판절판


중국 문화는 여러 개의 발을 가진 솥과 같다. 그 솥발들을 다 없애고 세 개만 남겨놓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단연 초를 남겨둘 것이다. 나머지 둘은 중원, 그리고 진(秦)을 포함한 융적(戎狄)이다. 진이 중원과 다르듯이 초도 중원과 확연히 다르다. 물론 초는 진과도 다르다. 진이 실용성을 강조했다면 초는 거기에 미를 더했다.

-15쪽

초는 왜 자꾸 동쪽으로 나가려고 했을까? 물론 동쪽에 넓은 미개척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구리다. 초 장왕이 초나라의 창의 날만 모아도 주나라의 구정 따위는 만들 수 있다고 한 것은 허풍이 아니었다.

-48쪽

고대에 구리는 실로 금보다 귀중한 자원이었다. 금은 장신구나 만들 수 있었지만 구리로는 병기, 수레, 농기구까지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구리는 고대에 ‘미금(美金)’이라고 불렀다.

-50쪽

애초에 중원보다 물질이나 문화 모든 방면에서 뒤졌던 초나라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초나라 특유의 진취성과 흡수력 때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縣이라는 제도는 초나라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다. 주나라의 봉건제도에 의하면 주나라를 제외한 국가의 수장들이 公이 된다. 그런데 초는 ‘참람히도’ 일개 현의 수장을 공이라고 불렀다. 초는 약한 나라들을 합병한 후 곧장 현을 설치했다. 초는 점령한 영토를 현으로 만들고, 거기에 군사거점을 두면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영토가 크고 또 강을 따라 전차가 이동하는 길들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초나라의 특성상 지방에 군사거점을 두는 것이 편리한 면이 있었다.

-82쪽

초는 중원보다 먼저 현을 만들어 지방거점으로 활용하면서 빠른 속도로 영토를 늘릴 수 있었다. 이것은 제나라를 비롯한 동방의 나라들이 중앙의 도성에 주로 의지하고 확장이나 전진방어를 위한 대책이 거의 없었던 것에 비하면 매우 발전된 행정제도였다. 그리고 북방의 晉과 같이 새로 편입된 지역의 인민들을 압박하고, 공신들에게 실질적인 봉지로 내리는 가혹한 체제에 비해서도 안정성이 있었다. 진이 한.조.위 세 나라로 갈라진 것은 지역에 봉지를 둔 가문들이 중앙권력을 좌지우지하다가 결국은 나라를 분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의 公들은 지방을 진수하는 지방관의 성격에 가깝다. 초는 서방 秦과 같이 강력한 중앙과 그에 예속된 행정구역으로서의 현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지방행정 면에서 초의 제도는 秦과 중원국가들의 절충점에 해당했다.

-83쪽

고대의 구리합금 청동은 글자 그대로 金이었다. 청동은 썩지 않기 때문에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언제든지 다시 녹여도 낭비가 되지 않았다. 춘추시대에도 철기가 있었지만 철의 탄소성분을 조절하고 물성을 개량하기 위해서는 아직 한참 동안 기술의 진보를 기다려야 했다. 또 철은 자연상태에서 쉽게 부패한다. 그러나 청동은 다르다. 청동 솥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이동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청동 솥을 들고 다니면 장거리 군사작전도 가능했다. 청동으로 만든 무기의 중요성은 물론 말할 것도 없다. 묵자는 청동으로 악기를 만드는 것도 반대했고, 그런 보물을 무덤에 묻는 것도 반대했다. 묵자가 활동하던 전국시대 초기에 구리는 금과 같이 귀했다.

-123쪽

초나라의 팽창정책은 매우 실용적이었다. 초나라는 중원의 예법에 크게 구속되지 않았다. 초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 움직였다. 초나라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는 사람이다. 그 다음은 경작지다. 마지막으로 구리광산이다. 특히 구리는 국가만이 관리할 수 있는 품목이다. 국가가 이 독점 품목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국세가 바뀌었다. 특히 초나라는 전통적으로 공업을 관장하는 공윤의 힘이 강했다. 이들은 군수품을 관리했지만, 전투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25쪽

손숙오는 중국사에서 또 하나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바로 무결한 관료다. 관중은 재상 역할을 했지만 그를 관료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는 조력자라기보다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며 기획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역사적인 추세로 왕권이 점점 강화되자 진정한 조력자들이 필요해졌다. 어쩌면 조력자가 되기는 기획자가 되기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권력은 왕에게 있기 때문에 조력자는 왕의 권위를 해쳐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그는 왕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권력은 줄어들고 할 일은 더 많아진 상황에서 조력자는 어떻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바로 청렴이다. 청렴하지 못하면 권력을 이행할 수 없다.

-134쪽

관료 체제가 확립된 후 수많은 뛰어난 재상들이 부패 문제에 걸려 넘어졌다. 명나라를 중흥시킨 명재상 장거정을 보자. 장거정은 옛 초나라의 수도 강릉에서 태어난 명신이다. 그러나 그는 매우 사소한 비리로 죽어서도 오명을 남겼다.

-135쪽

손숙오는 남을 위해 몰래 일하는 사람이다. 손숙오는 무력을 통한 다스림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생산력 증대와 민심의 지지를 통해 초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규율을 강요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방법들을 원용해서 점진적으로 바꾸는 것을 촉구했다.

-137쪽

장왕이 뛰어난 것은 뛰어난 귀족을 등용해서가 아니라 뛰어난 ‘촌뜨기’를 기용했기 때문이다. 제 환공이 뛰어난 것은 귀족이 아니라 처사였던 관중을 기용했기 때문이고, 秦 목공이 뛰어난 것은 노예였던 백리해를 기용했기 때문이고, 晉 문공이 뛰어난 것은 환관에 도둑까지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손숙오는 비인(鄙人)으로서 國人이 아니었다. 비인이란 국도 밖에 사는 농민이나 지방의 소읍민을 가리킨다. 춘추전국 시대는 귀족사회다. 그러니 비인을 중앙정계에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장왕은 비인을 과감하게 등용한 것이다.

-141쪽

손숙오는 원래 제방을 쌓는 토목 기술자였다. 그는 경제적으로 식민지 경영을 시도한 정치가였다. 춘추시기에 하천에 제방을 쌓아 물을 댔다는 기록을 남긴 사람은 손숙오가 첫 번째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재방을 만들고 물을 활용했다. 그러나 당시 손숙오가 한 일은 그저 흐르는 물을 가둔 것이 아니라 물길을 돌리는 거대 공정이었다. 그런 대규모 공사는 기록상으로는 손숙오의 기사피라는 인공호수가 최초다. 이 기사피는 초나라의 동방 진출 교두보가 되었다. 전국시대 중기까지 영토를 가장 크게 넓힌 나라는 초다.

-148쪽

손숙오는 초나라 동쪽 변경에 쌀의 시대를 연 것이다 .회하 일대 사람들이 먹는 것은 "쌀밥에 물고기 국"이라는 『사기』의 기록은 당시 초나라 사람들의 식생활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원래 있는 것이지만 쌀밥은 선조들이 제방을 쌓고 땅을 개간해서 얻은 결과물이다. 손숙오는 들판에 물을 대어 논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초나라의 관할지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백성은 곡식을 하늘로 안다고 했는데, 손숙오가 농경사회에서 추앙받는 것도 당연했다. 그 곡식 중에 단연 중요한 것은 살이다.

-150쪽

오늘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쌀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쌀은 밀보다 두 배 중요한 작물이다. 중국은 전 세계 쌀 생산과 소비의 1/3을 담당한다. 이 위대한 살의 시대의 초석을 초인들, 그중 손숙오라는 사람이 놓았다. 쌀이 없었다면 중국은 그토록 많은 인구를 부양하지 못했을 것이다.
점령지를 부유한 곳으로 바꾸면 반란이 적게 일어난다. 장왕 시대가 되면 초는 급속히 동쪽으로 팽창했지만 새로 점령한 지역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초의 일부가 되었다.
-152쪽

유비는 제갈량을 얻고 물고기가 물을 만났다고 표현했다. 장왕이 손숙오를 얻은 것은 대붕이 날개를 얻은 격이었다.

-154쪽

보통 원정군이 나설 때는 농민들은 잡역을 맡고, 공인들이 따라와 물품을 만들며, 상인들은 사전에 전투 물자를 유통시킨다. 그러나 초나라 원정군은 달랐다. 졸들이 스스로 수레를 끌고, 풀을 베어 잘 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이 군대가 장기전을 위한 자급자족형 군대임을 의미한다. 당시 초나라 군대는 장기전을 수행하는 매우 훈련된 군대임을 알 수 있다.

-178쪽

전투 대형은 사냥 대형과 같기 때문에 양군이 마주칠 때 중간에 짐승들이 갇히는 것은 당연했다.

-191쪽

"응당 승리의 군영을 만들고 적의 시체를 모아 경관을 만드시지요. 듣건대 적을 물리치고는 반드시 자손에게 고해 무공을 잊지 않게 한다고 하더이다."
그러나 장왕의 생각은 달랐다.
"이는 그대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대저 武라는 글자는 ‘창을 멈춘다(止+戈)는 뜻이다."
이것이 유명한 창을 멈추는 무, 곧 ‘止戈之武’라는 고사의 기원이다. 후대에 지과지무는 무인들의 이상이 되었는데 우리나라 충무공 이순신의 칼에도 ‘지과’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203쪽

‘해는 일식이 있고 달은 월식이 있다(日月之食)’는 말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은 의미로 이용된다.

-206쪽

손숙오는 장기전이 가능한 군대의 편제를 만들었는데, 신숙시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둔전을 만들어 초가 장기전으로 적을 지치게 하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니 최소한 기록상으로 전쟁과 경작을 결합한 것은 초나라가 처음이다. 송나라 사람들은 아예 집을 짓고 씨를 뿌리는 초나라 군인들의 행동에 버틸 의지를 잃어버렸다.

-224쪽

결과적으로 초 장왕의 북벌은 중국사의 지평을 크게 확장시켰다. ‘오랑캐 군주’가 중원의 군주보다 낫다? 오랑캐의 우월을 인정해야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즉각 화하인 특유의 민첩성이 발휘되었다. 물론 중원이 오랑캐보다 못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초의 오랑캐라는 꼬리표를 떼면 될 것 아닌가? 장왕 이래 초는 중국사에서 더 이상 오랑캐 나라가 아니었다. 그리고 전국시대가 되면 초는 대국이자 문명국으로서 위상을 떨친다. 이후 북방에서 유가와 법가 철학이 무르익고 있을 때 남방에서는 기술학과 노장 철학이 만개하게 된다. 남북의 우열 시대는 끝난 것이다.

-227쪽

믿음의 군주 환공을 ‘유가적 군주’, 엄격한 상벌을 중시한 문공을 ‘법가적 군주’라고 한다면, 무모한 듯하면서도 멈추고 하는 일이 없는 듯하면서도 성취하는 장왕은 분명 도가적이다. 특히 장왕이 도가적인 것은 그가 어떤 때 멈춰야 하는지 갈파했기 때문이다.

-230쪽

결론부터 말하면 ‘노자’는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책 이름으로 보는 것이 옳다. 사마천이 『사기』의 열전을 쓸 당시에 ‘노자’는 이미 대중적인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실존인물로 여겨졌고 그의 책인 『노자』나 『도덕경』은 지식인이라면 거의 아는 책이었다. 사마천이 열전을 쓸 당시에도 노자가 누구인지는 정설이 없었다. 그래서 용의주도한 사마천은 자신이 여러 사서를 참조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231쪽

춘추시대 미증유의 대승을 거두고 슬퍼한 사람은 이제껏 장왕밖에 없다. 진나라 문공은 항상 싸움에서 이기면 승리를 과시했다. 그러나 장왕은 무력을 미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상례로 전쟁을 마무리했다. 물론 장왕이 평화를 사랑한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중원을 대신하여 동쪽으로 무자비하게 국토를 확장했다. 그는 현실의 군주일 뿐 ‘노자’와 같은 심오한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북쪽으로는 명성을 얻으면서 사실은 동쪽에서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그가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잔혹한 방법만 썼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비록 침략자지만 그는 자신의 사람과 남의 사람을 최대한 살린다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장왕은 武라는 이름을 가진 형이며, 노자는 文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이다.

-242쪽

남방에서 한바탕 광풍을 몰고 온 장왕은 패업을 이루자마자 죽었다.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초가 잠시 주춤한 틈을 타서 晉은 다시 군사력을 키웠다. 둘째, 제나라가 진나라의 패자 지위에 의문을 품고 도전했다. 그 배후에는 물론 초가 있었다. 그래서 진-제 양국은 규모로는 필의 싸움에 버금가는 대군이 동원되는 국제전을 벌인다. 셋째, 서방의 秦은 晉-초, 晉-제 간의 알력이 있을 때마다 晉의 후방을 노렸다. 급기야 晉-秦은 결별의 수순을 밟게 된다. 마지막으로 동쪽에서 신흥 강호 吳가 등장한다. 초의 동진은 오에게 위협이었다. 그러자 晉은 오를 이용해 초를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하게 횐다. 이리하여 초는 오와의 기나긴 싸움에 돌입하게 되고 북방에 힘을 쓸 겨를이 없었다.

-256쪽

대저 전쟁이란 국가의 존망을 건 대사이기에 이기고도 불안하다. 역사상 전쟁에 이기고 나라를 잃은 군주도 수없이 많다. 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등 패자라고 불린 사람들은 한결같이 전쟁을 신중하게 했다. 전쟁은 감정으로 할 수 없고, 전쟁은 싸우기 전에 이미 이기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군주는 승산이 없으면 절대로 나서지 않는다.

-290쪽

군대가 진을 칠 때는 일반적으로 그믐날을 꺼린다. 원래는 어두워서 진을 치다가 야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일 테지만 점차 관습으로 굳어졌다.

-303쪽

‘영(靈)’이란 공업을 이루기 위해 힘쓰지 않은 군주를 칭하고, 포학한 군주에게는 ‘여(厲)’라는 시호를 붙인다. 공왕이 언릉의 패배 이후 얼마나 뼈저리게 반성하고 살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일화다.

-310쪽

싸움의 이면을 이론적으로 살펴볼 때가 왔다. 두 가지 관점, 곧 국가의 ‘팽창 관성’과 토지와 권력을 둘러싼 ‘군주와 경대부들의 구조적인 갈등’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자. 먼저 초나라의 입장을 보자. 장왕 대의 팽창은 일종의 관성을 만들어냈다. 마치 후대의 한족들이 만리장성을 심리적인 경계로 삼았듯이 초나라는 황하를 잠재적인 국경으로 만들고 싶었다. 황하 이남에 적대국들을 두는 것은 불안했다. 진나라 입장에서 보면 전쟁은 내정의 연장이었다. 군주도 욕심이 있었고 경대부들도 욕심이 있었다. 전쟁은 그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되었다. 전쟁에서 지면 누가 책임질 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고, 이기면 누구의 공인지를 두고 알력이 생겼다.

-314쪽

중원과 오랑캐의 제도 중에 무엇이 더 야만적인가? 중국에 속하지 않는 나라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그 사람들을 노예로 쓰는 사회가 야만적인가, 아니면 자신과 다른 종족들을 포용하고 장점을 흡수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회가 야만적인가? 낡은 중원의 사상으로는 팽창하는 세계를 담지할 수 없었다. 아마도 초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팽창은 거기에서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생산의 주체로 인간을 대하는 관념 면에서 초는 제하 국가들보다 선진적이었다. 동방의 수많은 나라들이 초나라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초나라로 흡수되었다. 그래서 초는 급격히 영토를 늘려나갈 수 있었다.

-331쪽

가장 많은 ‘오랑캐’ 민족들을 가장 빠른 시간에 아우른 이들 역시 ‘오랑캐’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초는 오랑캐의 힘을 보여주었다. 이후 이 오랑캐들은 문화적인 면에서도 중원을 앞지른다. 이제 우리는 오랑캐의 정의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노자』에 "골짜기는 낮은 곳에 처하기에 물을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초는 화하가 아닌 2류 민족이었기에 그 많은 민족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초가 없었으면 화하는 황하를 벗어나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332쪽

현재의 중국은 한때 중원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종족으로 여긴 초인들이 살던 땅까지 차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춘추시대에는 정체도 알지 못하던 곳들까지 버젓이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히말라야 북쪽의 고원지대, 타림 분지 일대의 사막지대도 모두 ‘중국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땅들은 모두 처음에는 중국인들이 적대시하던 민족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에서는 어떤 민족의 근원을 따지는 일은 늘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다. 56개의 민족이 ‘화합하여’ 중국을 만들었기 때문에, 민족의 근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은 항상 경계의 눈초리를 받는다.
-336쪽

오직 현재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사라진 사람들은 "후손들의 무지막지한 저평가"에 시달리기도 한다. 중국의 고대 중원인들이 한자로 남긴 기록의 위력을 목도하고 나면, "현재"와 "후손"을 '기록’으로 바꾸어 말해도 좋을 것이다. 최소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는 ‘기록과 사실의 대결’이며, ‘기록은 사실을 무자비하게 저평가한다.’ 기록에 의하면 북쪽에 사는 사람은 북쪽 오랑캐(북적), 동쪽에 사는 사람은 동쪽 오랑캐(동이)다. 기록의 힘은 거침이 없다. 언젠가 중원이 초를 압도한 이후부터 중원인들 중심의 기록에 의해 초는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초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저평가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민족들의 연원에 대한 고대의 한자 기록들은 최소한 5할은 허구다.
-336쪽

오늘날에는 ‘성’과 ‘씨’가 구별 없이 사용되지만 고대 중국에서 성과 씨의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원래 한자로 姓은 여자(女)가 낳은(生) 자녀들이라는 듯으로 모계 씨족사회에서 동일한 모계 혈족을 구분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래서 ‘姬’, ‘姜’, ‘영瀛’ 등 초기의 성들에는 계집 녀 자가 포함된 것이 많다. 그런데 사회가 점차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성이 부계 혈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어 사회가 발달하면서 종족의 인구가 늘고 거주 지역이 확산되자, 하나의 성에서 갈라진 지파가 생겨나고, 이들은 새로운 거주지나 조상의 이름 등을 따서 자신들을 구별할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나의 성에서 갈라진 계통을 구별하기 위해 氏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이다. 예를 들어 초나라 왕들은 대대로 웅씨熊氏가 계승했지만, 성은 미羋였다.
-341쪽

이러한 성과 씨의 구별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당시 귀족들이 분봉받은 채읍의 지명이나 관직, 조상의 字나 시호, 작위, 거처 등을 씨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부자 사이에도 성은 같지만 씨가 다른 경우가 생겼고, 성은 다른데 씨가 같은 경우도 나타났다. 이러한 성과 씨의 구별은 종법질서가 무너진 춘추전국 시대를 거쳐 진한 대에 이르러 점차 그 차이를 잃고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341쪽

상나라와 주나라 시조설화는 비슷한 시기에 생겼다. 주인들은 상인들을 극복했기 때문에 상인들보다 우월한 조상을 원했다. 그래서 주나라 시조의 어머니(제곡의 첫째 부인)는 상나라 시조의 어머니(제곡의 둘째 부인)보다 순위가 앞서고, 성을 받은 사람도 순임금보다 한 대 위인 요임금이다. 진나라 시조 설화는 상나라와 주나라 시조설화보다 늦게 만들어졌다. 진인들도 주인들보다 우월한 조상을 만들기 위해 제곡보다 순위가 앞서는 전욱을 끌어들였다.

-342쪽

유비의 삼고초려, 제갈량에게 "유선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재능이 없으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라"는 유언도 모두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관우가 조조의 막하에 기식할 때 장요가 넌지시 투항을 권유했을 때, "나는 유장군께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했으니 남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것도 기록에 있고, 손권에게 포위당해서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투항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제갈량과 유비는 좋은 친구였고, 관우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리란 의리는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삼국지』와 『자치통감』은 모두 관우가 죽자 유비는 오직 ‘관우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오나라를 정벌했다고 적었다. 이런 무모한 결정은 정상적인 군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조조가 단지 형제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일으킨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나.
-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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