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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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라. 너는 누구보다도 나무를 잘 타는 소녀였어. 나무에 오르면 하늘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었더랬지. 네가 열 살이 되었을 땐 어떤 나무라도 못 올라갈 곳이 없었어. 가지가 몇 개 없는 나무라도 문제 없었지. 네가 열 네살이 되었을 때 너의 마을 사람들은 너를 가리켜 '라 알리 레 하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너희 키체 어(과테말라의 중서 고지대에 사는 마야 인, 키체족이 사용하는 언어)로 '나무소녀(Tree Girl)'라는 뜻이었지. 네게 꼭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었단다.

너는 곧 다가올 킨세아녜라에 입을 특별한 위필(마야 전통 의상인 여성용 블라우스)을 짜고 있었어. 네가 열다섯 살이 되는 성인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너는 참 똑똑한 아이였지.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형제 중 혼자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는데 그 때문에 호르헤 오빠는 몹시 속상해 했지만 동생 앞에서는 의연하게 굴 줄 아는 멋진 사나이였지.

너의 생일날 치러진 성인식은 네게 축복된 날이어야 마땅했단다. 하지만 그날의 축제는 군인들의 출연으로 완전히 망쳐지고 말았어. 군인들은 너를 모욕했고, 거기에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호르헤 오빠를 잡아가고 말았던 거야. 식구들 중에서 가장 게으르던 열세 살 레스테르마저도 분노에 떨며 반군에 들어가겠다고 말을 했지. 반군은 너희 인디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으니까.

오빠가 잡혀간 뒤에도 가브리엘라 너는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어. 너는 두 달 전부터 마누엘 선생님의 조교가 되어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이 막중했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오빠를 찾지는 못했어. 마을에는 전쟁이 일어날 거란 소문이 파다했고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 갔어. 12월이 되자 군인들이 나타나서 마을에서 떠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지. 이 땅이 너희 땅이라는 권리증을 제시하라면서 말이야. 너의 아버지는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왔다가 가는 방문객일 뿐이라고 설명했지만 처음부터 인디오들을 몰아내려고 작정을 한 군인들이 그 지혜로운 말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어. 30일의 유예 기간을 주었고, 너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똘똘 뭉쳐서 그 땅을 떠나지 않기로 결의를 했지. 군인들은 반군이 나타났을 때 알려주는 조건으로 그곳에 남으라고 했어. 군인들은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강제로 입대시키곤 했고 파다한 소문과 불신이 마을을 더 흉흉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그 와중에 네 어머니는 병에 걸려 돌아가시고 말았지.

엄마가 돌아가시고 1년이 채 되지도 않은 때에 전쟁 소식이 들려왔어. 너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관심도 없어 하는데 군인들은 반군들이 공산주의자라며, 반군을 돕는 사람도 공산주의자라며 너희를 자꾸 몰아붙이고 있었어. 마침내 군인들은 야외 수업 중이던 마누엘 선생님을 어린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때려죽이기까지 했지. 너는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도망쳤지만 여섯 명의 아이들은 군인들의 총에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어. 마지막까지 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네가 그 중 가장 큰 여자 아이였기 때문일 거야. 너를 살려두려던 게 아니라 다른 볼 일이 더 있었던 거였겠지. 네가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네가 나무 소녀인 까닭이었어. 숲으로 도망친 네가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숨은 것을 군인들은 발견하지 못했던 거야.

너는 살아남았지만 긴장과 초조로 범벅된 시간을 살아야 했어. 아빠를 제외하곤 집에서 네가 가장 큰 어른이 되고 말았으니까. 너는 하루 종일 동생들을 돌봐야 했어. 막내 알리시아는 너를 엄마라 부르며 따랐지만 너는 그것을 굳이 수정해주지 않았어. 모든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너는 아빠가 거두어들인 옥수수와 커피를 읍내 장에 가져가서 팔곤 했어. 동이 트기 두 시간 전에 일어나 세 시간 동안이나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던 시장에서 커피를 판돈으로 생필품을 사왔지. 고되었어도 커피를 판 날은 견딜 만 했어. 커피를 팔지 못하고 다시 들고 돌아오는 길은 짐이 더 무거워서 발걸음도 천근만근이었기 때문이야.

날이 갈수록 마을 전체가 불에 타고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소문이 번졌지만 정부군과 반군은 서로 상대 짓이라고 발뺌을 하고 있었어. 하지만 너는 그렇게 잔인한 이들은 군인일 거라고 믿고 있었지. 너의 두 눈으로 그들의 잔인함을 똑똑히 목격했으니까 말이야.

그날은 토요일이었어. 너는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너희 마을이 불타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지. 너는 열심히 뛰었어. 곳곳에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어. 네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너를 맞이했지. 네 가족들도 무사하지 못했어. 아빠와 어린 동생들도 모두 총에 맞고 말았어. 너는 공포와 충격으로 넋이 나갔지만 피범벅이 된 손으로 얕은 무덤을 팠지. 사랑하는 가족들을 엄마의 재를 묻은 신성한 땅에 묻어야 했기 때문이야. 폐허 속에서 네가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엄마의 유품인 빗 하나였어. 소중한 빗을 품안에 갈무리한 채 너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어. 또 다른 보병 정찰대가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으니 말이야. 너는 멕시코 국경을 향해 걷기로 결심했어. 기억 말고는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네가 장에 지고 간 어떤 짐보다도 더 무겁게 네 마음을 짓눌렀지. 너의 등 뒤에는 죽음의 재가 깔려 있었고, 네 앞길에는 부연 구름이 뒤덮여 있었어. 그토록 위험한 나라에 집도 미래도 없이 홀로 남은 어린 여자 아이, 그게 너를 설명하는 가장 객관적인 단어였던 거야.

하늘도 무심하지 않으셨는지 숲에서 너의 동생 알리시아와 안토니오를 만날 수 있었어. 하지만 안토니오는 이미 깊은 총상을 입은 터였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 이제 네 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은 충격으로 말을 잃은 어린 알리시아 뿐이었던 거야. 온통 망가진 발을 억지로 끌며 북으로, 북으로 향하기만 했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리고 그 여정에서 해산의 순간을 맞닥뜨린 산모를 만나고 말았지. 한 번도 아이 낳는 것을 본 적도 없는 네가 갓 태어난 아이의 탯줄을 끊고 아이를 거두고 말았지. 군인들이 오고 있었고 너는 산모를 남겨둔 채 서둘러 그 자리를 뜨고 말았어. 신의 가호가 있기를 원했지만, 아마도 그 산모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거야. 네가 아는 온 세상이 전쟁으로 물들어, 네 곁의 소중한 이들 대부분이 떠나간 그 시점에서도 새로운 생명은 그렇게 여지없이 태어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

침착하고 현명한 가브리엘라. 너는 아기에게 먹일 염소젖을 구하기 위해 장으로 달려갔어. 네가 알고 있는 에스파냐 어도 통하지 않고, 너의 부족어 키체 어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너는 간절한 몸짓과 눈빛으로 염소젖을 구해내고 말았어. 브라보 가브리엘라! 하지만 그 안도의 순간에 가장 극적인 비극이 닥치고 말았던 거야. 군인들이 장터에서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거든. 너는 본능처럼 나무 위로 올라갔고 그 위에서 꼬박 이틀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강간을 당하고 학살을 당하는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어. 그게 네 영혼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처를 입히고 말았지. 너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너를 죄책감으로 덮고 말았지. 그때 너는 결심했던 거야. 두 번 다시 나무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네게 구원이 되어주던 나무가 너를 다시 죄책감에 싸이게 만드는 대상이 되어버리다니, 참으로 서럽고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어.

네가 표정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그때였어. 알리시아가 아가를 데리고 기다리고 있던 장소에 가보았지만 알리시아는 거기에 없었지. 그 아이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서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너는 더 이상 받을 상처도 없을 만큼 충분히 망가져 있었어. 갈증과 굶주림, 그리고 피곤에 절어서 국경을 향해 걷던 너는 철저히 무심해지고 말았지.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을 때에도 너는 외면했어. 네가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벚나무의 버찌를 따달라는 노인들의 요구도 거절했고, 네가 저장해둔 음식을 향해 구걸의 손을 내밀기라도 하면 매섭게 거절하는 법도 익히고 말았지. 네가 나빴던 것은 아니야. 전쟁은 사람의 영혼을 그토록 메마르게 하고 몸과 마음을 모두 파괴해 버리는 힘을 지녔으니까. 그럼에도 지켜보면서 참 아팠단다. 가엾은 가브리엘라...

겨우 국경을 넘어 난민 수용소에 도착한 뒤에도 희망은 여전히 멀기만 했어. 햇볕 한줌과 한 모금의 비를 피할 한 뼘의 공간도 없었고, 물 한 방울 빵 한조각도 구하기 힘들었던 그곳 난민 수용소는 지옥을 방불케 했거든. 구호품을 실은 트럭이 나타나면 몸싸움도 불사해야 했어. 네가 밀친 노인 두 명과 어린 남자 아이를 보는 순간 너는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몰라 했지. 너의 부모님이 너의 그 모습을 보기라도 했다면 몹시 슬퍼하셨을 테니까. 결국 너는 너보다 더 방수막을 필요로 하는 할머니 두 분께 천막을 양보했고, 그 분들은 너와 함께 지내기를 원하셨지. 그렇게 세 사람이 한 공간에서 지내게 되었던 거야. 너는 기억이 너를 자극하지 않도록, 미래에 대한 불안이 너를 잠식하지 않도록 오로지 식량을 구하는 일에만 전념했어. 그 와중에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 너는 극적으로 알리시아를 만날 수가 있었지. 네가 떠나갔던 그 장터 근처 숲에서 마리아 아줌마께 구조된 알리시아와 아기 모두 만날 수 있었던 거야. 함께 지내던 카르멘 할머니는 갑자기 군식구가 셋이나 늘어나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리셨지. 네가 이해해줬으면 해. 살아남는 일이 보통 힘겨운 일이 아님을 서로가 온 몸으로 알고 지냈던 때잖아.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생존을 향한 본능이 사람을 그렇게 팍팍하게 만들어버렸던 거지. 너도 경험했던 일이니 분명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네가 조금 더 기운을 차린 것은 참 다행이었어. 네게 남은 하나의 가족, 그리고 네가 밀라그로(기적이라는 뜻의 에스파냐 어)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기까지 보살피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 했으니까.

네가 그곳 난민 수용소의 아이들을 위해서 공놀이를 제안한 것은 정말 멋진 생각이었어. 아이들이 다시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선 놀 줄 알아야 한다는 네 말은 절대적으로 진리야. 요즘 대한민국의 초등학생들은 너무 바빠서 통 놀 시간이 없거든. 게다가 놀 때도 혼자서 게임을 하지 친구들과 더불어 노는 것을 잘 몰라서 여러모로 걱정이 된단다. 너는 구호 요원에게 공 구하는 것을 좀 더 신경 써달라고 재촉하기도 했지. 아이들은 오늘 행복해져야 한다고, 내일이면 늦는다고 말한 너의 애원은 내 마음까지도 뭉클하게 했단다. 바로 그 말이 정답이야. 내일이 아닌 오늘, 바로 지금 행복해져야 마땅해. 우리 모두 말이야.

너의 공놀이는 아이들과 어른을 대상으로 한 학교로까지 번져 갔어. 너와 뜻을 같이 한 마리오 아저씨는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갖는 환상을 깨고 똑바로 현실을 볼 것을 요구하신 분이기도 했지. 정부군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그들을 훈련시킨 게 바로 미국 정부였거든. 칠판도 책상도 없는 교실에서 무얼 배운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때 수용소의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버리는 것보다 더 무섭고 힘든 일은 없었거든.

마리오 아저씨의 아버지와 형은 라티노 농장에서 면화 따는 일을 했었는데 농장주가 한마디 경고도 없이 비행기로 밭에 농약을 뿌리고 말았대. 농약을 온통 뒤집어 쓴 형님은 고통에 시달리다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지. 마리오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셨어. 농장주가 자기 개들한테라면 그렇게 농약을 뿌렸겠냐고... 나는 문득 남의 나라 산하에 고엽제를 잔뜩 뿌리고 또 묻은 미군의 행태를 떠올렸지. 그렇게 자기만 소중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은 먼지만도 못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 흥분해서 미안. 너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지.

가브리엘라. 너는 용감한 아이였지만 아직은 보호가 필요한 어린 소녀였어. 마리오가 반군에 지원하겠다며 떠났을 때 너도 알리시아의 손을 잡고 그곳 수용소를 벗어나려고 했어. 너에게서 힘을 얻고 희망을 찾아가던 사람들 따위는 모두 버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았겠지. 하지만 난 네가 가지 못할 거라고 짐작했어.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아이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네가 너 자신과 화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진심으로 고마웠어. 그리하여서 네가 다시 나무 소녀가 될 수 있게 된 것도 축복이라고 생각해. 네가 살아남은 것이 비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라도 깨달아 주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이제 너에게는 새로운 가족들이 생겼어. 지금 네가 희망을 심고 물을 주며 열심히 키워내고 있는 그 나무가 있는 곳이 바로 너의 집이란다. 거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기억나니? 나무에 오르는 것은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무 소녀 가브리엘라,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올라가던 용감한 소녀. 네가 태어난 아름다운 마을엔 오래도록 전쟁이 이어졌고 그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어. 너도 많은 상처를 입고 말았지. 너의 전쟁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어. 네가 살아가는 동안에 맞닥뜨릴 전쟁은 앞으로도 많이 있을 거야. 너는 여자이기 때문에 마주치는 부당함과도 싸워야 하고, 네가 인디오이기 때문에 당하는 멸시와도 싸워서 이겨야 해. 강하다는 것이 옳은 게 아님에도, 강하기 때문에 제 행동을 모두 정당화시키는 거대한 세상에 너는 작고도 작은 존재. 그렇지만 너와 같은 사람들의 작은 용기가 모여서 이 세상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 작은 불씨의 하나인 너를 끝까지 응원할게.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말이야.

그러니까 나무 소녀 가브리엘라. 우리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지 말자. 더 열심히 사모하고 더 열심히 꿈을 꾸자. 네가 꿈을 이루면, 너의 꿈은 곧 다른 사람의 꿈이 되고 말 거야. 그 꿈, 우리 함께 이뤄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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