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이야기 2 - 영웅의 탄생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2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구판절판


라틴어의 ‘영웅(vir)'은 수컷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어의 ’영웅(Hero)'에는 신의 힘을 가진 자라는 뜻이 있다. 영웅이라는 말은 그래서 남성의 감성을 물씬 풍긴다. 그러니 누구를 영웅이라 하는가? 영웅은 반드시 수컷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수컷의 자질 중에는 지략(英)과 용맹(雄)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서 영웅은 힘을 뿜어내는 존재로 묘사된다.

-10쪽

영웅이 어떻게 권력을 버릴 수 있는가? 독수리가 어떻게 먹이를 측은하게 여길 수 있는가? 권력은 바로 힘이다. 영웅은 힘을 가진 사람이다. 영웅은 권력을 버릴 수 없지만, 성인은 버릴 수 있다. 또 영웅이 어떻게 뭇 사람들의 칭송을 거부할 수 있는가? 영웅은 힘을 뿜어내고 뭇 사람들의 시선을 즐긴다. 그러나 성인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는다.

-11쪽

성인의 개성은 독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의 개성은 남성보다는 여성에 가깝다. 성인은 커다란 어머니다. 성인은 오직 부계사회가 고착화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은 모계사회의 잔영이 남아 있는 곳에서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웅은 다르다. 권력을 어떻게 남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영웅은 다만 사람을 모으고 적절히 쓸 뿐이다. 수컷들이 역사를 차지한 이후 ‘성인’들은 사라졌다. 그렇지 않다면 공자가 기린이 잡혔다고 한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관중과 환공은 영웅과 성인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12쪽

공자는 제 환공이 비록 힘을 쓰는 패자였지만 바른 이라고 평한다. 또 비록 흠결이 있지만 무력을 쓰지 않고 천하를 다스린 관중을 착한 이라고 단정한다. 영웅이 바른 이인가? 영웅이 착한 이인가? 영웅은 바르게 보이는 사람이며 착하게 보이는 사람이지만, 꼭 착하고 바른 이는 아니다. 영웅을 만들어내는 상황이 그를 바르게도 만들고 굽게도 만든다. 『삼국지』의 영웅 조조를 보라. 동양에서는 영웅 하면 조조, 조조 하면 영웅이다. 그가 바로 ‘치세에는 능신이요, 난세에는 간웅’이라는 평을 받은 사람이다. 시대가 그의 도덕적인 능력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고, 또 시대가 그의 ‘부도덕한’ 야망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다.
-13쪽

『군주론』에서 "덕을 지키라. 그러나 권력을 잃을 정도로 지키지는 말라."(15장) "잔인하라. 그러나 관대하다는 평판은 들으라."(19장) 이런 이야기가 바로 마키아벨리가 그의 영웅인 군주에게 보내는 조언이다.
공자는 문공이 가지고 있는 성격의 이면을 그대로 파악했다. 문공 속에는 마키아벨리가 들어 있다. 물론 문공은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처럼 천박하지는 않다. 그는 이탈리아의 조그만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군주’가 아니라, 수많은 국가가 난립한 춘추의 질서를 잡은 ‘패자’였기 때문이다.
-13쪽

환공과 관중의 이야기는 왠지 보통 사람이 모방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다. 단번에 인재를 알아본 후 끝까지 중용하고, 도덕과 원칙을 이익보다 앞에 두고, 우두머리들은 직접 대결을 피하고 내공으로 힘을 겨룬다. 그러나 문공은 다르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패업을 이룬 사람으로 현실 정치의 쓴맛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14쪽

문공의 처절하면서도 굴곡진 인생은 관중 사후 춘추시대 중원의 확고부동한 패자로 부상하는 진(晉)나라의 운명과도 비슷하다. 진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서로는 태생이 무사인 진(秦)나라 사람들을 맞아야 하고, 북으로는 이름 자체에 ‘싸움을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융(戎)과 적(狄)을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시작부터 이들과의 난타전을 통해 성장했고, 때로는 비굴함도 감수할 만큼 정치적이었다. 이렇게 주변의 강인한 족속들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한 진은 강골이었다. 그들에게 관중의 인(仁)한 정치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껍데기를 버리고 서서히 군국주의적인 본색을 드러냈다. 관중은 적이 비도덕적일 때 쳤지만 이들은 적이 약해지면 쳤다.
-15쪽

딱히 다른 나라들보다 인구가 많지도 않았던 진이 강해진 것은 변화하는 정세를 재빨리 간파하고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준비했기 때문이다. 진은 군제, 전제, 행정체제 면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꾀했다. 관중이 일관되게 외교관계를 통해 국제체제의 현상을 유지하려고 했다면, 진 문공과 그의 후계자들은 자국을 실질적으로 강하게 하는 현실적인 체제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들은 자국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국시대에도 삼진(진이 분열되어 만들어진 한, 위, 조)의 인사들은 흔히 권모술수에 능하다고 평가받았는데, 그 선배 격이 바로 문공의 총신들이다.

-15쪽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고대에도 큰 강과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이 골짜기 분지보다 부유했고, 평원이 산지보다 물산이 풍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춘추시기의 절대 권력은 골짜기에 집중되었다. 춘추시기 초강대국인 진(晉)은 분하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고, 전국시기 초강대국인 진(秦)은 관중의 분지에 자리를 잡았다. 초나 제는 이들보다 훨씬 부유했고 항상 강국의 반열에 들었지만, 이들 국가들만큼 응집력이 없었다. 평원에서는 인민들이 흩어질 수도 있고 모일 수도 있다.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인민들이 흩어지고 모인다. 그래서 이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골짜기는 완전히 다르다. 진과 진은 공히 융과 적이라고 부르는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다.
골짜기에 있는 국가들은 나쁘게 말하면 백성들에 대한 강도 높은 착취가 가능했고, 좋게 말하면 토지를 집약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전국시대의 변법은 사실 백성들의 힘을 최대한 뽑아내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변법이 삼진에서 시작되어 진(秦)에서 완성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변법 하면 떠오르는 상앙은 위나라에서 태어나 진(秦)나라에서 공업을 이루었다.
-27쪽

당이 멸망한 후에야 중국사의 중심은 동쪽으로 이동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분하와 위수의 두 골짜기가 중국사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골짜기의 전략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평원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지평이 훨씬 넓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평원이 중국사의 중심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정적으로 북방의 몽골족이 북경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역사 무대의 동진은 훨씬 더디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황량한 모래바람이 부는 황토 언덕 사이의 골짜기에 불과하지만 고대에는 그곳이 황금이 땅이었다. 최소한 서기 1000년까지 이들 골짜기의 지위는 확고했다.

-30쪽

진은 명목상으로는 하나의 제후국에 불과했지만 처음부터 왕권을 지향한 국가였다. 헌공이 밝혔듯이 왕권은 무력에 기반을 둔 것이고, 자식이라 할지라도 쉽사리 이양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헌공은 과거 경쟁자들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첩을 취해서 낳은 아들 신생은 항상 껄끄럽다. 또 그에게는 제나라의 그림자가 있다. 중이와 이오는 적(狄)족 여인에게서 난 자식들이다. 둘은 모두 총명하고 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진이 앞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과는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다. 적과의 싸움을 앞두고 적의 혈통을 받은 능력 있는 두 아들들도 미덥지 않다. 헌공은 진(晉)의 정체성을 만들고 싶어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작은 부족의 여인이 낳은 아들을 더 사랑했다.
-54쪽

1대나 2대 창업형 군주들이 장성한 아들들의 능력을 시샘한 경우는 흔하다. 당 태종의 아들 중에 남아난 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태자 이승건은 일찌감치 폐위되었다. 역사서에는 이승건이 패악한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그 원인 중 하나는 이승건이 전쟁을 상당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쟁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유목민의 전술을 배우려 했다. 그다음에 세울 사람은 당연히 황후의 둘째 아들인 이태였다. 문제는 이태가 너무 재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신들이 이태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그는 개국공신이자 황후의 오빠인 장손무기의 견제를 받았다. 그도 역모의 죄를 쓰고 죽었다. 그의 죄는 아버지의 명성에 도전한 것이었다. 황후의 아들 중 막내인 이치는 별 특징이 없고 유약했다. 결국 그가 제위를 이으니 당 고종이다. 고종은 자신의 무능을 십분 발휘하여 무측천에게 나라를 넘겨주게 된다.

-54쪽

또 청나라의 강희제는 태자 윤잉을 폐했다. 역시 도덕적인 자질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진나라 헌공처럼 너무 오래 자리를 유지한 아버지의 의심이 문제였다. 그 다음은 만주족의 풍습상 무공을 세운 14자 윤제가 유력했다. 윤제는 몽골 초원과 티베트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윤제의 공이 너무 크고 노회한 장수들이 그를 지지하자 강희제는 결단을 보류했다. 그래서 결국 가장 무난하고 무력과는 거리가 먼 옹정제가 즉위하게 된다.
당 태종은 돌궐의 지지를 받아서 초원을 평정했지만 아들이 돌궐인을 닮는 것에는 기겁을 했고, 자신은 무력으로 왕권을 차지했지만 무력을 갖춘 아들은 멀리했다. 강희제도 마찬가지다. 그도 너무 오래 집권한 나머지 아들들과 경쟁했다. 나이가 들자 의심이 많아졌다.
헌공은 당 태종이나 강희제와 같은 인품은 없었지만 마키아벨리적인 정치감각은 오히려 그들보다 나았다. 그러니 장성한 데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아버지의 위신을 위협하는 아들, 혹은 어머니의 배경이 강한 데다 개성이 뚜렷한 아들들이 기꺼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55쪽

동방의 노나라와 제나라가 종주국인 주의 예법을 가져갔다면 진(秦)은 주의 생존과 발전 전략을 고스란히 가져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몸종으로 있으면서 정치를 배웠다. 몸종은 예절을 가지고 있지만 예절을 내면화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절의 이면에 들어 있는 권력의 속성들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요토미는 주인의 뒤를 이어 전국의 패자가 되지만 주인과는 확연히 다른 품격을 가지게 된다. 도요토미는 오다의 대범함 속에 숨어 있는 속임수들을 배워 확연힌 실리주의자로 성장한다. 진나라가 바로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진은 주의 허식이 아니라 실리를 철저하게 모방했다.

-83쪽

바퀴의 발견은 인류사적 관점에서 거의 불의 발견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바퀴가 생김으로써 인간은 동물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게 되었다. 현대문명은 사실상 바퀴문명이다. 회전력을 빼면 기계문명이 존재할 수 없다. 심지어 날아가는 비행기도 엔진의 회전운동으로 움직인다. (...) 여러 정황으로 봐서 전차는 초원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중국은 최초의 발명자는 아니더라도 받아들인 것을 최대한 발전시켜 활용한다. 춘추시대가 되면 전차는 여러 국가의 주력 전쟁 무기로 진화한다.

-104쪽

춘추시대 전기는 전차전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전투에서 양편이 회전하는 장소는 대체로 양편의 전차가 움직일 수 있는 장소였다. 전쟁의 목적이 적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곳에 모여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경제적이었다. 또 국가는 기본적으로 몇 개의 성읍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투할 장소도 거의 정해져 있었다. 요새 점령이 목적이라면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쉽게 주둔하고 방어망을 펼치는 보병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숫자가 제한된 전문적인 군인들이 전투를 했으므로 야전에서 상대방 주둔군에게서 불의의 습격을 받을 염려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무기의 관통력이 아직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114쪽

춘추시대의 전쟁은 비유하자면 무리의 대표들끼리 정해진 장소에서 1대1 대결을 벌이는 것과 유사하다. 이들 전사들은 직업군이었고 그 수도 제한되어 있었다. ‘야인’들은 이들을 부양할 의무는 있었지만 싸움에 끼어들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가 되면 싸움은 점점 더 전면전으로 바뀐다. 한 무리 전체가 다른 무리 전체와 싸움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싸움의 기본은 숫자를 우위로 한 포위나 지형을 이용한 장기전이다. 전차가 들어설 공간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최수한 춘추중기까지 전차는 전술의 기본이었다.

-115쪽

전차에는 세 명이 탄다. 전차의 주장은 왼쪽에 타고 활을 잡는다. 그래서 차의 왼쪽에 탄다고 하여 거좌라고 한다. 가운데는 전차를 모는 거어가 탄다. 그 오른쪽에는 거우가 타는데 그는 방패를 잡고 극이나 창을 휘두른다. 사서에 ‘누구의 전차’라고 하면, 그 전차의 왼쪽에 탄 사람이 바로 주인이다. 군주나 중군의 수장의 전차를 모는 사람은 알려진 무장이어야 하고, 오른쪽에 타는 무사는 용력이 가장 뛰어난 무사여야 한다. 그래서 전투에 앞서서는 대개 점을 쳐서 거어와 거우를 결정한다. 거어와 거우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평시에는 국사에 참여하는 거물들이다.

-116쪽

전차전에서 양측의 중군은 가장 강하며, 아군의 좌우군이 상대방 좌우군 중 하나를 밀어낼 때까지 버티는 것이 주요 임무다. 중군이 좌우군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상대방 좌우군에게 측면이 노출된다. 그래서 매우 주도면밀한 지휘관들은 좌우군과 중군의 위치를 바꾸어 일부러 중군이 밀리도록 만든다. 실전에서 군대는 승기를 잡으면 무조건 밀고 들어가는 습성이 있으므로 상대가 등을 돌리면 밀고 들어간다. 상대의 중군이 깊이 들어오면 사실상 주력부대인 좌우군이 중군을 포위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이 쓴 반달진 전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쓴 학익진 등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작전을 펼치려면 각 부대는 매우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118쪽

전쟁이란 참혹한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 지배계층의 이해관계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춘추시대의 농민들은 직접적인 위협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당시의 농민들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고서야 아는 경우도 많았다.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세금을 내는 대신 전쟁터에서 죽을 확률은 적었다. 그러나 앞으로 상황은 바뀌게 된다. 농민들도 전쟁에 참여하는 시절이 점차 열리고 있었다.
전쟁의 유일한 순작용은 전쟁에 대한 공포다. 중국을 예로 들면, 기원전 1500년경에 한 부족이 전쟁에서 패했다면 그들은 노예 신분을 감수해야 한다. 춘추시대에 이르면 상황이 좀 좋아지지만, 여전히 전쟁에 패하면 주종관계를 맺고 정책주권을 포기해야 한다. 군대에 차출당할 수도 있고, 노동력을 차출당할 수도 있다. 해마다 바쳐야 하는 공납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138쪽

전쟁의 공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승리하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노력이 종종 사회의 잠재력을 이끌어낸다. 재원을 집중하고, 때로는 구시대의 폐단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세계사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니발이 몰고 온 코끼리 부대와 기병대를 극복하는 와중에 로마는 기병대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술을 배우는 단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의 신분제를 뒤흔들어놓았다. 양반들이 적군 앞에서 무능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노비라도 전공을 세운 사람은 신분 해방의 길이 열렸다. 비록 본격적인 개혁은 실패했지만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기회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개항도 마찬가지다. 객관적인 열세 속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다가 서양화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미국의 독립전쟁에 동원된 민병대, 남북전쟁의 노예해방 등은 모두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 나타난 개혁이다.
-138쪽

춘추시대의 기록들은 기본적으로 귀족의 기록이다. 귀족들은 특권층이다. 그런 귀족의 특권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이 자해와 자살이다. 잘못이 있을 경우 남이 자신을 해치기 전에 스스로를 해치고, 죽음을 당해야 할 상황이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이 특권은 춘추의 귀족들이 매우 귀중하게 생각한 불문율이었다. 한나라가 만들어진 후 가의(賈誼) 등의 유학자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이 바로 대부의 자결권이다.

-144쪽

군주의 첫 번째 자질은 바로 인재등용과 신상필벌이다. 사회가 급격한 기술의 진보다 집단적인 토론에 의해 지탱되지 않던 고대에는 인재집단이 바로 국가였다.

-190쪽

문공의 논공행상은 앞으로도 이어지지만 그 원칙은 깨어지지 않았다. 인의를 밝힌 사람과 나라를 지킨 사람을 앞에 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란 자신을 위해 고생한 사람을 먼저 챙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공은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일정한 공을 돌리고, 패자의 기본 자질을 세워준 사람들을 우대했다. 19년의 망명생활이 허무한 것은 아니었다.

-193쪽

당시 농민 한 명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맹자는 100무로 보았다. 100무를 경작하면 5~9명을 부양할 수 있다고 한다. 농부 한 사람이 수입으로 부양할 수 있는 인구를 평균 7명이라고 하자. 그렇게 보면 군주는 대략 2,240명, 경운 224명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 그러나 춘추 중기 진(晉)나라는 사방 100리가 아니라 사방 500리의 대국이었다. 그 군주는 주나라 천자보다 부유했으니 그 나라의 경의 지위를 알 만하다. 물론 맹자가 말한 수치는 모두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지배층이 과다하게 착취하는 전국시대의 현실을 강력히 비판하는 입장이므로, 춘추 이후에는 지배층이 받는 녹이 그가 말한 것보다 더 늘어났음은 분명하다. 그러니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경이나 대부의 지위에 오른 사람은 최소 수백 명에 달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재산가였음은 분명하다.

-196쪽

한자로 ‘정치’는 정(政)과 치(治)의 결합이다. 정이란 바르다(正)는 듯과 명령(文)이라는 말의 결합이다. 그러니 정이란 군주의 정령을 뜻한다. 치는 다스림이다. 다스림의 주체는 지식을 가진 자이며, 그 꼭대기에는 군주가 있다. 이것이 대체로 통일제국 이전의 정치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념이다. 정치의 주체는 명백히 군주다. 군주는 하루도 없을 수가 없으며, 군주의 존재는 문명의 조건이다. 정치의 주체는 누구인가?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주권자인 인민이다. 그러나 군주에게 그 권리가 양도된 상태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군주’가 ‘법’을 통해 ‘국가’를 장악하고 통치한다. 그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을 쓰는’ 것이다.

-206쪽

관중이 만들고자 한 제나라는 부유한 나라였고, 문공이 만들고자 한 진나라는 근검절약하는 나라였다. 부채탕감과 부세경감은 구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신진세력들이 흔히 쓰는 방식이다. 제 환공의 팽창정책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지만 진 문공의 팽창정책은 땅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다. 진-진이 황하를 사이에 두고 강력한 영토분쟁을 벌인 것도 모두 이름을 다투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문공은 서방 진(秦)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서방으로 진출하기는 어려웠으니, 앞으로 동방으로 진출할 것이 명백했다.

-210쪽

공성은 심리전이다. 그래서 성을 공격할 때는 완전히 포위하지 않고 항상 한 면을 열어둔다. 상대의 전투 의지를 꺾기 위한 것이다. 양번과 원을 공략하면서 문공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원을 점령한 후 조최를 두어 다스리게 했고, 온 땅은 호진이 다스리게 했다. 이렇게 문공은 주나라 왕실의 땅을 차지하면서도 신의를 지켰다는 명성을 얻었다. 남방의 초나라로서는 이제 제나라보다 훨씬 호전적인 상대를 만난 것이다.

-225쪽

대규모 전쟁은 심리전이다. 쌍방의 실력이 비등할 때, 명분을 가진 군대가 이기는 것은 별로 예외가 없는 규칙이다.

-244쪽

고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의 절반은 사실 전쟁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행위의 이면을 들추다 보면 고대사를 결정하는 요인, 심지어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힘까지 볼 수 있다. 중국은 전쟁사의 보고다. 전쟁의 강렬한 유혹과 그 참혹한 결과를 목도한 많은 철학자들은 전쟁이라는 무서운 괴물을 통제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마련해왔다. 춘추 말기의 위대한 사상들은 모두 전쟁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적극적으로 전쟁을 없애기 위한 이론도 있었고, 침략전만 배제하자는 이론도 있었으며,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극복하자는 이론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론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쟁의 목적, 수단, 정의 등 모든 방면에서 서양의 어떤 이론도 중국의 이론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249쪽

고대 마야 문명을 구성하던 부족들은 거의 수백 년 동안 대규모 전쟁 없이 공존해왔다. 체계적인 약탈의 필요성이 매우 적은 지리적인 조건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체계적인 약탈을 위한 전쟁기술들이 계속 발달했다. 중국이나 중근동이나 지중해 세계는 거의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근래 서양 국가들이 자행한 식민지 쟁탈전은 체계적인 약탈전쟁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체계적인 약탈전의 시대에 들어오자 전쟁 행위를 전쟁 수행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생겨났다. 또 전쟁에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계급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바로 지배계급이다. 이제 전쟁에서 이기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의 성과를 분배하는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251쪽

지도자란 전쟁의 의미를 설명하는 사람이었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와 전쟁을 수행할 때 그가 끌어들인 이유들을 보라. 본질적으로는 상나라의 지배를 주나라의 지배로 바꾸기 위해서지만, 그는 이때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적은 무도하고, 인민들을 착취한다. 우리는 그 착취를 끝내기 위해 전쟁을 한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부족들을 끌어들여 상나라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이때부터 전쟁은 급격히 이념적인 것이 되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국가를 만들고 여론을 형성했다. 이제 전쟁은 여론의 지배를 받게 된다. 여론을 끌어들이는 명분이 없이는 전쟁은 불가능했다. 이 명분을 세우는 일이 바로 고대의 정치였다.
-251쪽

오기는 전쟁의 발발 원인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는 명분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둘째는 이익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셋째는 증오심이 쌓였기 때문이다.
넷째는 내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기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255쪽

문공의 원칙은 명백했다. 벌줄 자는 단호하게 벌주고, 상을 줄 자는 확실하게 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과 전투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았다. 또 전쟁을 통치에 연결하는 방식도 알고 있었다. 전투에서 이기는 것은 하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중이요, 정치에서 이기는 것이 상이라는 것이다.

-261쪽

융은 서쪽에 있는 민족이고(서융), 적은 북쪽에 있는 민족(북적)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융이나 적은 범칭이며 특정한 민족을 지칭하지도 않았다. 대체로 태행산맥 동단과 북부의 사람들을 적이라고 고정적으로 불렀지만, 태행산맥 남단의 사람들은 융이나 적으로 뒤섞어서 불렀다. 어떤 때는 융, 어떤 때는 적이라 부르고, 융적이라고 붙여서 부르기도 했다.

-297쪽

전국시대가 시작되면 중원의 여러 세력들은 기존의 이민족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상대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수레를 타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달렸다. 더 무서운 것은 말 위에서 활을 쏘아댔다. 이들은 전차와 보병을 무력화시키는 무서운 적이었다. 전국시대 말기에 진, 조, 연 등 북방에 위치한 나라들은 ‘흉노’라는 기마궁사들을 상대해야 했다. 이들은 전국칠웅으로 대표되는 중원국들의 대척점에 있었다. 그래서 많은 오해가 생겨났다. 문헌 근거에 의해 전근대 시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흉노를 융족의 계승자로 보았다. 그들은 원래 중원에서 기인했으나 북방으로 옮겨가서 기마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304쪽

융과 호(흉노)는 다르다. 호는 완전한 유목민이며 기본적으로 기마궁수들이었다. 중국 북방의 여러 민족들(융적)이 역학관계에 따라 호에 속하게 되거나 화하에 속하게 되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기원전 4세기 오르도스와 산서성 북부에 출현한 흉노라는 집단은 문화적으로는 기존의 융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기존의 융족들은 이들의 문화를 매우 빠르게 배워갔다. (...) 여러 융적들은 화하나 흉노의 문화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니 흉노는 하나의 집합적인 정치체제였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진 목공이 평정한 융은 아직 흉노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308쪽

관중은 인간적으로는 훌륭하나 욕망을 통제하는 능력이 부족한 환공을 변함없이 보좌한다. 이런 관계는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관중 사후에 제나라의 패권이 급격히 무너진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반면 진(晉)의 체제는 달랐다. 문공이 죽었으나 패권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는 문공이 좀 더 현실적인 체제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많은 인재들을 남겨 뒤를 받치게 하는 점에서는 진문공이 제 환공이나 관중보다 나았다. 다시 말해 진 문공이 더 현실적이었다.

-321쪽

진 문공은 고생이 몸에 밴 인물이다. 보통 사람은 고생이 끝나면 방탕해지기 쉽다. 그러나 그는 그 고생을 간직했다. 그래서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했고, 이는 진나라의 기풍을 세우는 데 일조했다. 아마도 그가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영유하던 적족의 풍속을 간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족인 호언은 문공에게 항상 가장 실질적인 길을 가르쳐주었다. 사치하고 화려한 제나라의 방식으로 물자가 부족한 진을 다스릴 수는 없었다. 문공은 스스로의 핏줄 속에서 중원과 북방의 장점을 받아들인 것이다.

-324쪽

춘추전국은 서북방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춘추무대에서는 가장 북방에 있는 진(晉)이 줄곧 맹주 자리를 유지했고, 전국시대를 통일한 이는 가장 서쪽의 진(秦)이다. 그러나 현재 이들 지역은 동남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낙후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웅장한 유적들도 방치된다. 그러나 동남방의 풍부함, 유려함만 보면 전체 중국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 청나라 말기의 극도로 화려한 궁정 문화는 서방의 침략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무굴 제국의 화려한 궁정에 비하면 영국의 왕궁은 장난감 수준이지만, 그 무굴 제국의 화려함도 영국인들의 화력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화려함과 섬세함, 혹은 풍부함은 문명의 한 일면이지 전체가 아니다. 문명이 간결한 원시성을 상실할수록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비어간다.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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