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이야기 1 - 최초의 경제학자 관중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1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구판절판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황하를 비롯한 큰 물줄기들 주위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들이 탄생했다. 또 노예를 대신하여 일반 백성들이 생산을 담당하는 농업국가의 틀과 왕조의 조세체계와 상비군이 만들어졌다. 전국시대 말기에 마침내 진이 경쟁자인 6국을 겸병하고 최초로 통일제국을 이루었고, 한이 이를 계승하여 오늘날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것의 몸체가 탄생했다. 그래서 춘추전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뼈대가 탄생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뼈대 위에 육체와 정신이 덧붙여져 오늘날의 중국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15쪽

중국 문명은 세계사적으로 보아서는 후발주자다. 연대를 확정할 수 있는 최초의 중국 왕조인 상(商)은 기원전 1600년 무렵에야 출현한다. 그러나 이 후발주자의 뒷심이 만만치 않았다. 춘추전국시대가 되면 중국은 오리엔트의 제국들과 버금이 되고, 급기야 기원전 3세기 무렵 진이 중국을 통일할 무렵이 되면 이미 세계의 서쪽에는 중국 제국과 비견할 제국이 없었다.
진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 신흥 강국인 로마는 아직도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힘겹게 제2차 포에니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25쪽

중국의 상나라(기원전 17세기~기원전 11세기)시기, 서아시아에서는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히타이트 네 제국이 경합하고 있었다. 기원전 9세기경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차지하는 제국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진정한 제국은 아시리아를 이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기원전 691~기원전330)다. 이 제국은 그 영역과 인구의 방대함, 문화의 복합성, 통치제도의 정교함 등 모든 방면에서 최초의 세계 제국이라 할 만하다.

-26쪽

크기 면에서 현대 중국의 약 1/3에 해당하는 춘추전국의 무대는 페르시아 제국의 반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인구는 대체로 몇 세기 후 로마 제국이 인구와 맞먹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3,500만 명에서 7,000만 명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제국은 인구 면에서도 확실히 춘추전국의 두 배 정도는 되는 듯하다. 이처럼 거대한 세계 제국을 이룬 페르시아도 기원전 4세기 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어이없이 멸망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페르시아 제국이 이루어놓은 성과를 잠시 약탈했을 뿐이고, 제국의 구성요소들은 이후에도 그대로 존속되었다. 나라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제국의 핵심은 그대로였다.

전국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비하면 페르시아 시대와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벌어진 서아시아의 전쟁은 낭만적일 정도다.
-29쪽

페르시아는 부유한 대제국이었지만 전국시대의 중국 각국들과 같은 무시무시한 군국주의 국가는 분명 아니었다. 또 몇 세기 후에 등장하는 로마 제국만큼의 철저한 호전성도 없었다. 제국에 속해 있는 민족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페르시아는 이들에게 세금을 낼 의무를 제외하고는 다른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충분한 금은 용병을 쓰기에 적절했고, 그 용병이 인도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그 민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특별히 건드리지 않는다면 조그마한 그리스 세계는 큰 위협이 되지 못하는 듯했고, 유목민으로 바뀌고 있던 스키타이가 남하할 이유도 크지 않았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 말 항상 하수로 보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의 중장보병이 서쪽에서 몰려와 불과 10년 만에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장악했다. 세계 최대 제국의 운명치고는 싱거웠다.

-31쪽

수도 페르세폴리스는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그때 왕궁에는 12만 탈렌트의 황금을 포함한 어마어마한 보물들이 있었는데, 이 금은 당시 5세기 아테네 제국의 300년 치 국민소득에 해당된다고 한다. 최소한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 페르시아는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동시대 중국의 나라들과 같은 제국 내부의 극렬한 투쟁을 겪지 않았다. 춘추 말기와 전국시대의 무대는 페르시아의 무대보다 크기는 작지만 그 투쟁의 강도는 몇 배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33쪽

영토의 크기만으로 보면 로마를 거대 제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성기 로마가 지중해 전체를 다 장악했다고 하더라도, 지중해라는 바다는 황하와 장강 유역의 육지보다 작다. 그리고 그들은 고대의 아시리아나 페르시아 같은 고대 문명의 후계자라고 할 수도 없는 문화적인 변방인들이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문명은 확실히 동방만큼 화려하지 못했고, 로마의 출발은 분명히 작았다. 그러나 이 후발주자는 페르시아 제국보다 훨씬 호전적이었다.

-36쪽

로마와 한나라의 규모는 정말 흡사하다. 이를 통해 추론해보면 전국시대 말기에도 중국의 인구는 3천만 명은 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216년 그 유명한 칸나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 군단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때 한니발의 군단은 5만 명, 로마 군단은 8만 5천 명이었다. 이런 정도의 병력 규모는 전국시대의 한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숫자보다 적었다. 그러나 그 후 로마는 급격히 팽창한다. 기원후 2세기 안토니우스 황제 시절 로마는 약 45만 명의 훈련된 군인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로마의 전성기보다 훨씬 이전인 전국시대에는 국민 모두가 군인이었고, 전투에 동원된 규모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런 규모의 전쟁은 세계사에서 오직 중국 땅에서만 펼쳐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구나 면적 면에서 춘추전국의 규모를 넘는 페르시아가 있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의 중원 각 나라들처럼 그렇게 격렬하게 싸우던 세계는 없었다. 단 후대의 로마가 비슷한 수준에 접근했을 뿐이다.
-38쪽

역사의 중심이 북경이나 남경으로 가기 전에 낙양은 명실공히 중원의 중심이었다. 낙양은 유유한 곳이지만 기백이 있는 군주들은 낙양의 축축한 공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주나라가 힘이 약해지자 서안에서 낙양으로 옮겨왔고, 강대한 한 제국이 약해지자 다시 동쪽 낙양으로 옮겨왔다. 낙양의 역사도 서안만큼 강건하지는 못했다.

-46쪽

기원전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 나오는 장면들을 보면 그렇게 화려할 수 없다. 철제 갑옷에 멋진 안장, 등자를 딛고 말 위에 올라 달리며, 오늘은 여기에서 내일은 저기에서 싸우는 무사들, 들판을 수놓은 막사들과, 그 안에서 촛불을 켜고 전략회의를 하는 장군들. 그 멋진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고대에 대한 환상에 빠져들고, 전쟁을 무슨 게임처럼 생각한다. 알다시피 금속 등자는 기원후에 만들어졌다. 천으로 만든 병사들의 막사는? 그런 좋은 막사가 있었다면 동양 최초의 역사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경』에서 병사는 왜 그리 불평이 많았겠나? 새하얀 천으로 만든 천막이란 장군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귀한 것이다. 비나 눈을 만나면 병사들은 얼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최소한 기원전에는 눈비 오는 날은 대체로 싸움을 멈췄다. 또 그런 계절에는 아예 싸움을 피했다. 『손자병법』에서 하늘의 때와 지리를 그토록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고대인들에게 하늘과 땅의 조건은 삶과 죽음의 조건이었다.

-61쪽

서유럽에서 ‘신의 채찍’이라 불리던 훈족의 대침공을 묘사할 때 로마 군단과 대적하는 그들의 강인한 말과 기동력을 열심히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로마와의 대비를 강조하다 보니 급기야는 로마의 적을 거의 완전한 야만인 수준으로 다룬다. 기동력과 야만성이 그들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헝가리 초원이 얼마나 넓기에 10만 이상의 훈족 기병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기병 한 명이 최소한 말 다섯 마리를 보유해야 한다면, 헝가리 초원의 풀은 키가 몇 미터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한의 반 정도 되는 헝가리 초원에 도착한 후 훈족은 실제로는 말 10만 마리 남짓에, 기병 만 몇천 명을 보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훈족은 최소한 다뉴브 강을 건넌 후부터는 ‘보병’이었다.
-62쪽

그렇다면 그들은 야만적인 유목민의 강인함으로 로마를 제압했을까? 로마군이 동맹군이듯 그들도 동맹군을 이끌고 싸웠다. 훈족의 수령 아틸라의 동맹에는 동고트족을 비롯한 온갖 민족들이 섞여 있었다. 남쪽의 로마나 북쪽의 훈족이나 모두 온갖 정치적인 힘을 다 동원하여 싸운 것이다. 훈족도 연맹, 조공, 협상, 압박, 전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상대와 대결했고, 이길 때는 용감하고 질 때는 비겁했다. 유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야만적이지 않았고 유달리 초인적이지도 않았다. 이렇듯 전제에 편견이 생기면 사실을 왜곡하게 된다. 그것이 역사 해석의 함정이다.
그래서 역사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곧 팩트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팩트, 기록이나 유물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62쪽

1950년대 장사 오리패의 전국시대 무덤에서 뿔로 만든 활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그러니 최소한 전국시대에는 각궁을 사용한 셈이다. 왜 각궁을 말하는가? 각궁의 사정거리는 엄청나기 때문이다. 만약 「고공기」의 내용대로 활을 만든다면 최대 사거리가 거의 300m에 달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병사들이 이런 활을 갖지는 못했겠지만, 당시의 활도 사거리 몇십 미터에 불과한 기원전 유럽 등지의 활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했던 것이 틀림없다. 주로 타림 분지의 사막이나 초원에서 뿔 재질의 활이 많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이 각궁 제조기술은 변방에서 중국으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74쪽

『사기』는 주족이 동방에서 기원했다고 한 뒤 그 계보를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사기를 무조건 믿지 않을 필요도 없지만 다 믿을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족은 관중 일대의 융(戎)족과 결합한 연합세력으로 이들의 문화는 동쪽 중원의 문화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융’이라는 말은 갑옷과 창을 결합하여 만든 것으로 무기, 갑옷, 전차, 병력 등의 의미로 파생된다. 중원인들이 보기에 융은 군사적으로 강한 이민족이라는 의미가 있다. 주족은 이 융과 연합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원을 압도할 수 있었다. 후대의 진(秦)나라도 역시 융의 땅에서 흥성했고, 융을 모두 제압했다. 융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진은 강해진 것이다. 주나라도 마찬가지다.

-95쪽

필자는 두 가지로 상나라와 주나라가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서주시대부터 비로소 신의 세계를 벗어난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인간’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서주에 이르러 진정한 ‘정치’가 탄생한 것이다. 주나라는 전쟁에 더하여 소프트 파워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 정점은 봉건제다. 필자는 역사상 주가 이룩한 두 가지 업적을 ‘조용한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하나는 신과 인간을 분리시킨 인간 혁명, 또 하나는 무력과 이념을 본격적으로 결합시킨 정치혁명이다.

-102쪽

아마도 상나라 말기(기원전 13세기~기원전 11세기)와 비슷한 시기였을 트로이전쟁기. 땅 위에서는 사람들이 싸우고, 그 사람들 위에서는 신들이 대리전을 치른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라는 대서사시를 쓰던 기원전 8세기, 그때 서주시대는 막을 내리고 동주시대가 열렸다. (...)
승패는 목마로 결정되었다. 트로이 사람들은 목마를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그 안에 병사들을 숨겼다. 인식의 차이였다. 사람의 일은 결국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다. 신은 무심했고, 트로이는 멸망했다. 동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103쪽

신화의 세계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세계에는 인간 행위의 결과만 있을 뿐이다.

-104쪽

당시 상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의 인구를 1천만 명 정도로 보는데, 이는 오늘날 서울의 인구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사람이 한 사람 죽을 때 수백 명이 따라 죽고, 제사 한 번 지낼 때 많게는 무려 천 명을 함께 죽인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나 주대에 이르면 사람으로 제사 지내는 일은 거의 사라진다. 순장도 동주시대가 되면 급격히 줄어든다. 사람 희생을 거부하고 순장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주나라의 예를 언급한다.

-106쪽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주례』나 『의례』 따위는 「가정의례준칙」만큼 한심해 보이지만 그것도 역사 발전의 한 과정이었다. 상이나 주는 모두 노예제 국가였음이 분명하지만, 노예에 대한 대우는 질적으로 달랐다. 앞으로 노예가 점차 사람 축에 끼다가 결국은 국가의 재상이 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 시대가 바로 춘추시대다.

-107쪽

힘으로 이길 수 없을 때 다른 수단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국제질서를 만드는 것은 국제정치의 기본이다. 『주례』의 복잡한 체제는 주나라 정치의 섬세함을 말해준다. 이제는 순수한 힘이 아니라 존왕양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외양을 쓴 힘이 등장한다. 오늘날 말하는 소프트 파워다. 주나라의 소프트 파워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했다. 동천으로 이미 유명무실해진 주나라 왕실은 그 후로 500년도 넘게 살아남는다. 주나라 사람들이 만든 제도, 법률, 관념 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깨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힘을 발휘했다. 반면 상나라에는 주에는 있는 ‘정치’가 없었다. 상의 정치 부재는 국내외적으로 전쟁과 폭압으로 드러났다.

-108쪽

상은 전쟁을 너무 많이 수행했다. 그리고 그 전쟁을 기본적으로 약탈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상나라가 계속 수도를 옮기는 이유도 잦은 약탈전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좌전』에는 상의 마지막 왕이 동이와의 싸움에서 힘을 다 빼서 나라를 망쳤다고 쓰여 있다. 사면에 강한 적을 두고 싸우면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서주시대와 춘추전국시대 전반에 걸쳐 모든 국제정치의 제1원칙은 절대로 한꺼번에 두 방면의 적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국시대의 강대한 진도 연횡이나 원교근공 등의 외교적인 수단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이익을 관철했다. 그러나 상은 그야말로 무모할 정도로 정면승부를 했다. 적이 약하면 잡아오고, 강하면 전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적을 많이 죽여서 겁을 주려는 정책은 역효과만 냈다.
-111쪽

주나라의 국토운영 전략은 힘의 부족을 인정하는 만큼 현실적이었다. 그러고는 그 현실적인 조치에다 그럴듯한 정치적인 수사를 씌웠다. 주는 상이 남긴 유산을 다 취했다. 그리고 이름만 바꾸어서 주나라의 것으로 했다. 주는 상이 남긴 역법을 건졌고, 제사를 취했다. 상나라의 제사는 주에서 ‘의례’로 더 정교하게 발전했다. 상나라의 중앙관제와 군제도 모두 주나라의 것이 되었다. 특히 왕이 삼군을 통솔하는 전통적인 군대의 편제는 상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중군, 좌군, 우군은 작전 시에는 적을 포위하는 대형으로, 평상시에는 그 수장들이 서로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122쪽

행동철학 방면에서 관중은 약 300년 후에 등장하는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하다. 관중은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관중은 더 나아가 실천하지 못할 일은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말과 행동을 부합하게 하는 것이 관중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관중에게는 플라톤의 이데아도 있었다. 다만 이데아가 형이상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164쪽

관중은 중국 최초로 경제학을 정립한 사람이며, 아마도 세계 최초로 재정학의 핵심을 이해한 사람일 것이다. 경제에 관한 한 공자나 맹자, 순자 모두 관중을 따르고 있다. 관중은 야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관중은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치의 핵심은 경제였다. 그것도 오늘날의 협소한 경제학이 아니라 방대한 스케일의 정치경제학이다.

-170쪽

큰물이 없으면 용은 개미떼도 이기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인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큰 인재는 반드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으로 나온다. 관중에게는 포숙이 있었다.

-208쪽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군주와 신하의 재능을 나눈다. 신하는 군주의 재능을 가질 수가 없으며, 또 군주는 신하의 재능을 다 가질 필요가 없다. 군주는 신하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으면 그만이다. 그 나머지 일들은 신하들이 한다. 군주는 신하들이 최선을 다해서 달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면 된다. 큰 인재와 작은 인재를 구분할 능력이 있으면 어떤 조직이든 다스릴 수 있다. 술을 좋아해도 술의 폐해를 알고 있으면 인재를 쓸 수 있다. 다혈질이라도 남이 제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자신은 허명을 쫓더라도 실속 있는 사람을 옆에 두면 된다. 제나라 환공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210쪽

후대의 법가 사상가들은 이들 농민들을 강력한 수탈체제의 대상으로만 삼았다. 변법을 통해 강력해진 진나라가 이런 수탈을 기반으로 전국을 통일했지만, 진나라는 성취와 동시에 몰락했다. 바로 관중의 방법은 있었지만 그의 철학이 없었던 것이다. 관중은 지배층의 욕망을 억누르자고 했고, 후대의 법가 사상가들은 피지배층의 욕망을 억누르자고 했다.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였다.

-240쪽

관중은 관료의 책임을 크게 두 가지로 보았다. 바로 사람농사와 곡식농사를 잘하는 것이다. 관중은 사람농사, 곧 인재 양성을 관리의 책임으로 보았다. 인재를 국가의 요체로 보았다는 점이 관중과 제 환공이 다른 주자들보다 먼저 출발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다.

-243쪽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백옥처럼 희기는 참 어렵다. 정치란 근본적으로 갈등을 조절하는 것인데, 백옥처럼 흰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러운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 이러면 갈등을 조절하기 어렵다. 그래서 관중이 임종 시에 후계자로 포숙은 안 된다고 한 것이다. 포숙은 악한 사람을 지나치게 미워하기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정치인은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에 약점이 있다. 그 약점을 가지고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바로 기(掎)라고 한다. 그 수단이 바로 법이다! 법이란 권력의 수단인지라 타락하기 시작하면 천하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다. 그러나 관중이 법으로 정치를 한다고 말할 때 법은 법을 이용하여 뒤통수를 친다는 말이 아니다. 관중은 법을 관문에 걸어둔다고 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둔다는 말이다. 관중이 보기에 그 법은 누구나 알아보기 쉬워야 한다. 법을 몰라서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는 법의 잘못이지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관중의 정치는 명명백백하다.

-262쪽

환공이 위험에 처하자 관중이 중간에 재빨리 끼어드는 모습을 보라. 관중은 뭔가 보여줘야 할 때 보여준다. 환공이 위협을 받아 맹서당하는 것을 관중은 ‘허락하는’ 모양새로 바꾸었다. 관중은 어그러진 일을 단숨에 정리할 줄 알았다.

-273쪽

누가 관중이 힘으로 천하를 제패했다고 말하는가? 관중은 정치로 제패했다. 관중은 어제 한 말을 오늘에 뒤집는 사람이 아니다. 관중이 오직 힘만 썼다면 제나라 혼자의 국력으로 강력한 초나라와 서방의 나라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관중은 국제관계를 이했고, 정치를 통해서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았다. 정치의 제1원칙은 신뢰다. 위협당했더라도 허락하지 않았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허락했다면 목숨 때문에 약속을 버린다는 말밖에 더 되겠는가? 관중의 패업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땅이야 다시 얻을 수 있다.

-275쪽

관중의 선택은 언제나 차선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차선은 항상 현실성을 인정받았다. 관중은 포숙에게 미안해하면서도 그에게 기댔다. 그러자 사람들은 포숙을 높이 샀고, 관중은 포숙의 선행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다. 관중은 소홀에게는 미안하지만 따라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새 군주에게 최선을 다함으로써 소홀의 의를 빛내고 자신은 충성스럽다는 말을 들었다. 관중은 착하지만 당하며 사는 사람보다는 강하지만 덜 괴롭히는 사람을 목표로 삼았다. 국제관계에서 그는 민족 간의 평등이 아니라 존왕양이를 주창했다. 그러자 공자는 "관중이 없었으면 중국이 다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차선을 행하면서도 이렇게 칭찬받는 것이 관중의 특징이다.

-279쪽

17세기 청나라 강희제 시기에도 장거리 원정은 최대 100일이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보급 문제 때문이었다. 진이나 초를 공격하려면 전투병보다 더 많은 보급인력이 투입되어야 할 것이다. 불감당이다.
물리적인 한계는 사회경제적인 한계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전국시대에 공성전이 벌어진 것은 춘추시기에 ‘야인’으로서 전쟁에 동원되지 않던 농민들이 모두 무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국시대에는 곡식의 비축이 활발해져서 장기간의 원정을 지원할 수 있었다. 일단 성을 둘러싸면 성 내부의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자면 일군의 부대가 계절을 넘겨도 보급물자가 끊기면 안 되었다. 관중시기에 농민들을 무장시키려 했다가는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농사시기를 놓치면 처자가 굶주리게 된다. 철제 농기기구가 농사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전의 농업생산력으로는 대규모의 저장도 어려웠다. 또 도로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곡물을 운반하기도 어려웠다. 관중의 방법은 연합군을 결성해서 힘도 약하고 도덕적으로도 타락한 상대의 틈을 노리는 것이었다.
-287쪽

춘추시대 제후들 사이의 의리는 약간 낭만적인 면이 있었다. 관중이 설령 전국을 제패할 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관중의 법률은 제후국의 군주가 스스로 ‘윗사람을 범하지 않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국내의 백성들의 반란을 막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제후들끼리도 서로 일정한 한계를 넘지 않았다. 전투에서 상대편 군주를 잡는다 해도 죽이지는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또 전투에서 장수가 상대편 군주에게 예를 올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원수를 친다 해도 그 자손 한 명은 남겨두는 것이 춘추의 예법이었다. 종법질서에서 상대의 핏줄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가장 무서운 패륜이었다.

-291쪽

춘추시대는 일종의 과점체제에 비교할 수 있다. 국인(士)들과 귀족들은 싸움을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꼭 전쟁에서 목숨을 걸 의무는 없다. 국인들은 농민들이 생산하는 것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면 굳이 목숨을 걸고 겸병전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야인들의 입장에서 무도한 군주가 아니라면 나라 이름이 제나라든지 진나라든지 기본적으로 상관이 없었다. 당시 귀족들은 문제가 생기면 종종 망명했다. 다시 말해 나라와 상관없이 귀족은 귀족들끼리 연대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망명객은 이유를 불문하고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귀족들 간의 불문율이었다.

-292쪽

국인과 야인이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해를 같이할 때 살벌한 투지가 발생한다. 전국시대가 그런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는 국인, 야인의 구분이 없이 모두 군현의 백성이었고, 모두 군인이었다. 이기면 이익이 있고 지면 손해를 입었다. 또 마음대로 망명을 할 수도 없었다. 또 그때는 국가와 애국심이라는 관념이 자라나고 있었다.

-293쪽

실제로 제나라는 도덕적인 이유들을 들어 약소국들을 공격했고, 이것은 향후 중국사에서 국제적 문제에 개입하는 대원칙이 되었다. 당나라가 연개소문을 공격할 때도 왕을 시해했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들었다. 이런 전통의 원칙도 관중이 세웠다는 것을 알면 전율할 것이다.

-299쪽

관중과 환공은 먼저 동쪽을 제패하고, 남쪽으로 초나라를 눌렀으며, 북쪽 융적의 동남진을 막았다. 말년에는 중원과 서방의 문제까지 끼어들어 혜공을 세우고 융을 공격하여 진(晉)의 명맥을 이었고, 진(秦)의 동쪽을 두드려 겁을 주고 제나라의 패권을 인정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과연 동서남북에서 ‘일광천하’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관중이 환공을 보좌하여 한 일이다. 춘추시기의 환경에서 이 정도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관중과 환공의 조합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관중은 영걸이지만 세상을 모두 한 손에 놓고 주무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역사가 할 일이었다.

-337쪽

관중은 환공의 욕망을 긍정했다. 공적인 일만 잘하면 사적인 욕망들은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이 관중의 태도였다. 만약 관중이 활달한 환공의 모든 욕망을 다 막았다면 환공도 평범한 사람에 그치거나 다른 길로 빠졌을 것이다. 실력으로는 관중에 버금가는 명나라 시절의 대정치가 장거정. 그는 군주의 모든 욕망을 막았다. 그러나 자신은 은근히 욕망을 즐겼다. 막상 장거정이 죽자 세상에서 가장 탐욕적이며 가장 게으른 ‘괴물’ 황제가 탄생했다. 바로 신종 만력제다.

-367쪽

"과인은 사냥을 너무 좋아합니다. 밤낮으로 사냥을 하고 안 돌아오니, 백관과 일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돌아가지도 못할 지경입니다."
"나쁘긴 나쁩니다만, 당장 큰일 날 일은 아닙니다."
"과인은 밤낮으로 술을 마십니다."
"나쁘긴 하지만, 이도 당장 큰일 날 일은 아닙니다."
"과인은 음란한 버릇이 있어, 불행히 여색을 너무 좋아합니다."
"나쁘긴 하지만, 역시 당장 큰일 날 일은 아닙니다."
"이런 게 다 괜찮으면 도대체 나쁜 행동은 뭡니까?"
"군주는 결단력이 없고(優) 행동이 굼뜨면(不敏) 안 됩니다. 결단력이 없으면 백성을 망하게 하고, 행동이 굼뜨면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관자』「소광」
사생활이야 개인의 영역이니 군주도 사생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군주는 공적인 생활에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관중의 생각이다. 군주는 따르는 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군주 본연의 임무를 방기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368쪽

사실 관중은 춘추시대의 경제체제, 행정, 군사, 법률, 외교 등 모든 방면의 질서를 세운 사람이다. 사농공상의 분업, 시장의 활성화, 국제무역, 농지개간, 세제개혁, 중앙과 지방 행정체제 확립, 삼군제도의 정비, 법령의 집행 방식 확립, 존왕양이와 회맹질서의 수립, 그 모든 것이 관중의 손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질서는 후대로 계속 이어졌다.

-369쪽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기는 하지만 모두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면 사회가 각박해지고 난폭해진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무한의 노력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관중이 말하는 원칙이다. 지도자는 열심히 뛰어야 한다. 그러나 열심히 뛰지 않는 추종자들에게 채찍을 들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의 인간관이며, 또 관중의 인간관이다.

-371쪽

남들의 욕망을 긍정하라. 욕망이 심하게 억눌리면 ‘변태’로 바뀐다. 특히 먹는 욕망이 억눌리면 사람은 무엇이 되는가? 아무리 착한 사람도 폭도가 될 수 있다. 남들의 자기보존 욕구에서 나오는 건강한 욕망을 긍정하라. 이것이 바로 관중의 생각이다. ‘사람들을 법으로 다스리려 하지 말고 그들의 본성이 원하는 것을 주어라.’ 이것은 제나라의 창시자인 강태공이 만든 불문율이다.
-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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