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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ㅣ 웅진 세계그림책 132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서애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10년 4월
평점 :
금발머리와 곰 세마리 이야기는 노부영으로 먼저 읽었다. 읽고 나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영어책이어서 그런가보다 했다.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이야기인지라 여러 그림책으로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책 역시 곰 세마리와 금발 머리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앤서니 브라운답게 조금 다른 접근이 보인다. 친절하게 작품 안내 글까지 있어서 이제까지보다는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곰 세마리네 예쁜 집이 보인다. 창을 열고 고개를 내민 아빠와 유리창을 닦고 계신 엄마, 그리고 창끝으로 머리만 조금 보이는 아기 곰이 살고 있다. 집 뒤쪽으로 이 예쁜 집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고층 빌딩과 공장의 굴뚝, 철근 골격 등이 보인다. 몹시 도시적인 분위기 안에 전원 주택스러운 곰 가족의 집이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엄마가 만든 죽이 너무 뜨거워서 죽이 식을 동안 공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아빠는 아빠 회사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엄마 회사 이야기를 하고 아기 곰은 딴청을 피웠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한 가족이지만 뭔가 합이 잘 맞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 금발머리 소녀. 엄마와 함께 집에서 나오는데 아이의 금발 머리 외에는 모든 색깔이 전부 흑백 톤이다. 색깔 때문에 두 사람의 분위기는 다운되어 보이고 어둑어둑한 느낌이다. 정육점 앞에서 날아가는 풍선에 마음을 빼앗긴 소녀는 풍선을 따라 달렸다. 낯설고 낯선 동네에서 멈춰선 소녀는 곰 가족의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선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녀는 밝은 색상의 페인트가 칠해진 이 예쁜 집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 안에 차려진 아침 밥상은 소녀를 더욱 두근거리게 했을 것이다. 비록 아빠 곰의 죽은 너무 뜨겁고, 엄마 곰의 죽은 너무 차가웠지만 말이다. 아기 곰의 죽만 적당히 식어서 소녀가 깨끗하게 비웠다. 똑같이 끓였을 죽이 왜 서로 온도가 다른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넘어가자.
배를 채운 소녀는 안락해 보이는 의자에 앉아 보았다. 커다란 아빠 곰의 의자를 너무 딱딱했고, 엄마 곰의 의자는 지나치게 푹신했다. 아기 곰의 의자가 딱 적당했지만 소녀가 앉자 부서지고 말았다. 어이쿠!
2층 침실까지 올라가 본 소녀는 아빠 곰의 침대도 아닌, 엄마 곰의 침대도 아닌, 역시나 아기 곰의 침대에서 편안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곤히 잠든 소녀의 표정은 지치고 쇠락한 중년 부인의 표정으로 보인다. 소녀는 필시 많이 지쳐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곰 가족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빠 곰과 엄마 곰의 죽그릇과 의자는 손을 댄 정도로 끝났지만, 아기 곰의 죽은 깨끗이 비워져 있고 의자는 심지어 망가져 있기까지 했다. 침입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린 일가족은 잔뜩 긴장해 버린다. 먼저 용감하게 2층으로 올라가 보는 것은 엄마 곰. 아빠 곰은 조심해~라는 당부와 함께 한 발 뒤에서 따른다. 역시 남다른 가족이다.
그리고 마침내 목격한 이 집의 침입자 금발 머리 소녀.
잠에서 깨어난 소녀가 보고 있는 모습과, 곰 가족이 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한 화면에 연출했다. 재미있는 설정이다.
곰 가족의 털이 바짝 선 것처럼, 잠에서 깬 소녀의 머리카락도 곤두선 것처럼 보인다. 아빠 곰과 엄마 곰은 화가 잔뜩 난 얼굴이지만 아기 곰은 그보다 호기심과 놀람이 앞선 표정이다.
소녀는 서둘러 집을 나가버린다. 달리는 소녀의 머리 위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심지어 눈발도 날린다. 단순히 집으로, 엄마에게로 돌아가는 모습뿐인 것일까? 혹시 소녀는 고난과 역경의 시련을 딛고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중인 것일까? 의미심장한 것은 그 다음 장면이다.
이제껏 소녀의 머리카락 외에 다른 컬러를 허락하지 않던 그림의 톤이 바뀌었다. 그리고 모자가 벗겨질 정도로 달려간 소녀를 품에 안아준 엄마의 안도에 찬 따뜻한 표정이 잠시 보인다. 엄마의 머리카락 역시 소녀처럼 밝고 빛나는 금발. 입은 옷마저도 색깔이 보인다. 안도와 평안이 느껴지는 따뜻한 그림이다.
아기 곰이 걱정한 금발 머리 소녀의 앞날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다. 소녀는 엄마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을 테니까. 그 집은 아기 곰네 집처럼 예쁘거나 따뜻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맛있는 밥이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이를 기다려주고 반갑게 맞아줄 가족이 분명히 있는 공간일 것이다. 나와 너가 만나서 우리를 만들어가는 그런 가족이 있는 집 말이다. 그리고 그 소녀 덕분에 서로 다른 이야기만 하고 공감대가 좀처럼 형성되지 않던 곰 가족네 집에도 공통된 화제가 생겼을 것이다. 그들 가족의 식탁도 좀 더 두런두런 따뜻하고 풍성해질 것이다.
책의 맨 뒤에 붙어 있는 포스터 겸 작품 안내서다. 펼치면 표지 그림이 나오고 뒷면에 앤서니 브라운에 대한 소개와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금발 머리 소녀의 이야기는 대사 없이 진행되고 곰 가족 이야기만 짧은 대사로 이야기를 엮어나간 것이 인상적이다. 글을 줄인 만큼 생각의 여지는 깊어지고 상상의 폭도 넓어진다. 이 책을 읽는 다양한 사람들의 무수한 이야기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