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무선)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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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안 계신다고 했지? 그래도 돌아갈 곳은 마련해 두고 다녀야 해. 기다릴 사람이 없으면 집이라도 기다리게 해야지. 그래야 어딜 가도 든든하다우."-73쪽

참 이상하지? 근사하게 생긴 사람도 아닌데, 가진 게 많아서 듬뿍듬뿍 퍼 주는 사람도 아닌데, 사람들은 건널목 씨를 좋아 했어. 많은 사람들 사이에 건널목 씨 한 사람 더 와서 사는 건데 아리랑아파트 분위기가 달라졌다니까. 이웃끼리 인사도 더 자연스럽게 했고 더 상냥해졌지. 좋은 사람이란 그런 거야. 가만히 있어도 좋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 내가 이걸 해 주면 저 사람도 그걸 해 주겠지? 하는 계산된 친절이나, 나 이 정도로 잘해 주는 사람이야, 하는 과시용 친절도 아닌 그냥 당연하게 남을 배려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건널목 씨야. 그런 사람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참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77쪽

노인이 흘리는 눈물은 농이 짙은 눈물이다. 살아온 세월 동안 물기는 날아가고 진액만 남아 버린 눈물. 내게도 그것과 비슷한, 어릴 적 꾹 참아 버린 눈물이 몸에 남아 있다. 그 눈물이 아직도 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112쪽

사람들은 지하가 지상보다 더 시원하다는데, 그 집은 미치도록 더웠어. 여름에는 땀띠가 두드러기처럼 온몸에 돋았다니까. 그래도 태석이와 태희는 창문을 열지 못했어. 창문으로 보이는 발들이 너무 무서웠거든. 저벅저벅 걸음 소리, 끼익! 오토바이 멈추는 소리...... 아빠가 돌아가신 것보다, 엄마가 떠난 것보다, 창밖에서 들리는 그런 소리들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어.-130쪽

"거지 거지 땅거지! 또랑 건너는 쥐새끼. 한 푼 줍쇼!"
그랬어. 태석이와 태희는 한 번도 구걸한 적이 없는데, 아이들은 그렇게 노래를 불렀어. 아이들은 알고 있었지. 놀리고 놀려도 달려와 혼내 줄 부모가 없다는 걸. 태석이와 태희도 알고 있었어. 같이 싸워도 혼나는 건 늘 자신들이라는 걸. 아이들이 잔인하게 놀리고 괴롭혀서 싸웠는데, 태석이 얼굴도 까지고 퉁퉁 부었는데, 부모들은 태석이만 혼냈어. 태석이한테 동네 깡패라는 거야. 그건 혼낸 게 아니야. 어른들까지 찾아와서 괴롭힌 거지. 그래서 태석이는 엄마를 기다렸어. 처음에는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기다렸는데, 언제부턴가는 나서서 싸워 줄 엄마를 기다린 거야. 어른이 따지러 오면 어른이 나가 주는 집, 그런 집에서 살고 싶었지. 무조건 자식 편인 부모가 있는 집, 그런 집 말이야.-145쪽

건널목 씨는 세상에 덩그러니 놓인 태석이와 태희한테 건널목 같은 어른이었어. 건너라는 소리와 반짝거리는 신호등은 없어도, 조심해서 건너면 된다고 다독여 주는 건널목 같은 어른 말이야. 만약에 건널목 씨가 없었더라면...... 태석이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어.-163쪽

(작가의 말)
때로는 힘들고 지쳐 주저않고 싶을 때도 있을 테지요. 어른들도 부족한 게 많이 번쩍 안고 원하는 곳으로 옮겨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덜 힘들게 덜 아프게 덜 무섭게 그 시기를 건널 수 있도록 건널목이 되어 줄 수는 있습니다. 친구라도 좋고 이웃이라도 좋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도 괜찮고, 누군가 먼저 내민 손을 잡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그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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