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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우리 집 (CD 2장 + 손악보책 1권) - 권정생 노래상자
권정생 시, 백창우 곡 / 보리 / 2010년 5월
평점 :
무척 다정한 책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시에 백창우 아저씨가 노래를 붙였다. 그러니까 이 선물 상자에는 선생님의 예쁜 시와, 아저씨네 고운 노래 시디 2장과 악보까지 함께 담겨 있다. 그야말로 종합 선물이다.
선생님이 쓰신 글은 소설이 되고 동화가 되고 이렇게 시가 되고 또 노래가 되었다.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우리에겐 귀담아 들을 메시지가 되었다.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이런 힘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당신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가고 싶은 곳도 맘껏 못 가보고, 굶주리는 아이들 눈에 밟혀서 먹고 싶은 것 양껏 먹지도 못하고 사셨는데, 그런 당신이 남기고 간 것은 너무 크고 따뜻해서 참 송구하기 짝이 없다.
소1
보릿짚 깔고
보릿짚 덮고
보리처럼 잠을 잔다.
눈 꼭 감고 귀 오그리고
코로 숨 쉬고
엄마 꿈 꾼다.
아버지 꿈 꾼다.
커다란 몸뚱이
굵다란 네 다리
-아버지, 내 어깨가 이만치 튼튼해요.
가슴 쪼가 펴고 자랑하고 싶은데
그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소는 보릿짚 속에서 잠이 깨면
눈에 눈물이 쪼르르 흐른다.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소를 주제로 네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소에 감정을 이입하였지만 정작 부모님 보고 싶은 것은 선생님 마음일 테지... 월요일에는 아마도 가요무대라고 짐작되는데, '어버이 특집'이었단다. 엄마는 가요 무대를 보다가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나서 서둘러 드라마로 채널을 돌리셨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자식들에 손주까지 보더라도 부모님 그리운 마음은 가시지 않을 테지. 5월에만 부모님 생각할 게 아니라 일년 내내 부모님 생각 많이 해야지. 아무리 많이 해도 나중에는 결국 부족하다고 느낄 테니까, 지금 미리 많이 적금 들어놔야지....
소3
소야, 몇 살이니?
그런 것 모른다.
고향은 어디니?
그것도 모른다.
그럼, 아버지 성은?
그런 것 그런 것도 모른다.
니를 낳을 때 어머니는 무슨 꿈 꿨니?
모른다 모른다.
형제는 몇이었니?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
소는 사람처럼 번거롭기가 싫다.
소는 사람처럼 따지는 게 싫다.
소는 사람처럼 등지는 게 싫다.
소는 들판이 사랑스럽고,
소는 하늘이 아름다웁고,
소는 모든 게 평화로웁고.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고 묻지 않았더라면 평이하게 읽고 넘어갔을 것이다. 저 단어가 나오는 순간 덜컥! 마음이 울렁거렸다. 내 전공은 역사인데 때 난데 없이 도덕을 가르치게 된 요즘, 그리하여 맡게 된 범위는 통일과 북한 사회다.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북녘 땅 이야기에 이 시가 내 마음을 한 번 더 건드리고 말았다.
대부분은 선생님의 시를 그대로 가져왔지만 노래로 만들면서 약간의 개사가 이루어지고 때로 제목도 조금 달라지기도 한다. 원제는 고무신2였지만 새 제목은 '달수 고무신'이다. 게다가 노래가 끝나고 나래이션으로 대사가 더 나오는데 그 부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고무신이 얼만지 난 몰라 운동화가 얼만지도 난 몰라
내가 아는 건 그저 세상에서 고무신이 제일 싸다는 것
운동화도 고무신도 학교 가긴 마찬가지지만 그렇지만
모래 장난할 때는 고무신이 최고 송사리를 잡을 때도 고무신이 최고
운동화가 고무신보다 비싸다고 더 오래 신는 것도 아니지
운동화가 고무신보다 멋있다고 냄새가 덜 나는 것도 아니지
우리 집
고향 집 우리 집
초가삼간 집
돌탱자나무가
담 넘겨다보고 있는 집
꿀밤나무 뒷산이
버티고 지켜 주는 집
얘기 잘하는
종구네 할아버지네랑
나란히 동무한 집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집
소나무 같은 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오늘 퇴근하는 길에 아파트 사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냥 빌라라고 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고 하신다. 자신도 빌라에서 내내 살았는데 나에게선 빌라 사는 사람 느낌이 난다는 거였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는데, 어쩐지 나쁜 의미로 말한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내가 꿈보다 해몽을 좋게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시를 읽다가 오늘 받았던 질문이 생각났더랬다.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우리집'이라니, 이렇게 착한 제목도 나올 수가 있구나. 우리집에 대해 그런 이름 붙여본 적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어쩐지 미안해지는 느낌이다. 표지의 그림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바로 이렇게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집을 표현한 것이다. 마음이 따뜻하게 적셔온다.
소낙비
하필이면
새 옷 입은 순이 잔등에
물 엎지른다.
하필이면
엄마 없는 날
다 말려 놓은
보리 멍석 위에
백 미터 선수처럼 내린다.
하필이면
소풀 뜯어 놓고
풀밭에 누워 막 잠들려는데
심술쟁이 기태처럼 놀래케 한다.
하필이면
땅따먹기 편 갈라 놓고
시작하려는데
훼방놓는다.
다 저질러 놓고
실컷 바쁘게 해 놓고
시침데기처럼
멀리 가 버리고
아롱아롱 무지개 뜬다.
모두 모두 속았어도
웃는다.
무지개처럼 웃는다.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지금은 갑작스럽게 우산도 없이 소나기를 만난다면 옷 젖는 것 가방 젖는 것, 짐 많은 것, 차가 막히는 것, 방사능 비와 황사 비, 산성비 등을 걱정하지만, 적어도 중학교 때까지는 여름날 소낙비기 시원하니 반가워서 하교 길 우산 없이도 행복해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자라나는 아이들은 내가 느꼈던 비 맞는 행복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이 순간, 몹시 미안해지고 말았다.
통일이 언제 되니?
우리 나라 한가운데
가시울타리로 갈라 놓았어요.
어떻게 하면 통일이 되니?
가시울타리 이쪽저쪽 총 멘 사람이
총을 놓으면 되지.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그러게 말이다. 그렇게 간단한 것을 60여 년 동안 못하고 있구나. 참으로 죄가 많다.
도모꼬-인간성에 대한 반성문2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2학년인 도모꼬가
1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가 나중에 정생이한데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반세기가 지나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구나. 선생님의 저 착한 얼굴에서도 이런 토라짐이 읽혀지다니, 웃음이 나서 미안타.
선생님께 보내는 마지막 인사들이 예쁘게 달려 있다. 선생님의 생가에 붙어 있는 게 아닐까. 먼 하늘에서도 저 작은 글씨 다 들여다보며 조그마하게 웃으셨을 것 같다. 여전히 따뜻하게, 사랑스럽게......
개인적인 선호도를 묻는다면 먼저 접한 '강아지똥' 쪽이 노래가 더 좋았다. 더 좋았지만, 이 책의 노래들도 예쁜 노랫말들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이런 시에는, 이런 노래가 어울리지. 예쁘다. 참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