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52 호/2011-05-23
“제발, 그만해, 그만! 알았다고!!”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니며 친구들 험담을 늘어놓는 태연에게 아빠는 완전 질린 표정이다.
“아냐, 아빠가 몰라서 그래요. 엊그제 운동회 때 말자가 순자한테 모래 뿌려서 넘어졌었잖아요. 말자가 원래 O형이라서 승부욕이 엄청나거든요. 한마디로 물불을 안 가려요. 그런데 순자는 진짜 A형답게 이러면 되고, 저러면 안 되고 또박 또박 바른 멘트를 날리는 거예요. 그러고선 온종일 숨어서 홀짝홀짝 울었어요. 더 기가 막힌 건 B형 경잔데, 순자가 우는데도 신경 하나도 안 쓰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말하고 행동하고 그러더라고요.”
지난 달 머릿니 사건을 극복이라도 하려는 듯, 태연은 혈액형에 관한 온갖 지식을 습득하고는 하루 종일 혈액형으로 친구들 분류하는데 정신이 팔려있다.
“그래서, AB형인 넌 뭘 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우아하게 관조의 자세를 유지했죠. AB형은 원래 자신이 다른 이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거든요.”
“태연아, 아빠가 혈액형별 성격 구분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 물론
A, B, O, AB형 혈액형 분류가 성별, 인종, 나이 등을 초월한 인류 최초의 생물학적 분류체계인 건 맞아. 하지만 이제 그건 구식이라고.”
“네에? 저 혈액형 공부한지 한 달 밖에 안됐는데 벌써 구식이면 어떡하란 말이에욧!”
“이제
몸속에 사는 박테리아의 종류에 따라서 사람을 분류할 수 있게 됐거든.”
“엥? 박테리아라면 사람의 장이나 위에서 주로 사는 그 단세포 미생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인간의 몸속에는 약 100조개의 박테리아가 살고 있단다. 인간 세포가 10조개 정도인 것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지. 그래서 그동안 몸속의 박테리아를 전면적으로 조사하는 건 엄두조차 내기 힘든 일이었어. 그런데 얼마 전
독일의 유럽분자생물학연구소 연구팀이 그 엄청난 일을 해냈단다.
덴마크, 일본, 미국 등 6개 나라 39명의 몸 안에 사는 1,151종의 박테리아 유전자를 분석한 거야. 그 결과
몸 안에서 지배적으로 발견되는 박테리아가 박테로이데스, 프레보텔라, 루미노코쿠스 이렇게 세 가지라는 것을 밝혀낸 거지.”
“에이, 겨우 39명 분석한 걸 가지고 어떻게 인류 전체를 분류했다고 그러세요. 암튼 킹왕짱 뻥이시라니깐!”
“아이고, 너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370명을 더 실험에 참가시켰는데도 결과는 똑같이 나왔어. 그리고는 지배적 박테리아를 기준으로 한 체질 분류에 ‘장형(腸型·enterotypes)’이란 이름을 붙였지. 이제 어떤 사람에게 어떤 박테리아가 많은가를 가지고 인간을 분류할 수 있는 세상이 드디어 온 거란다.”
“그럼 혹시 혈액형처럼 박테리아 종류별로 수혈을 따로 해야 된다던가, 성격이 다르다던가 뭐 그런 것도 있나요?”
“그건 아니지만
장형별로 체질을 알 수는 있단다. ‘박테로이데스’ 유형에서는 ‘비오틴’이라는 비타민이 많이 만들어지고 ‘프레보텔라’ 유형에서는 ‘티아민’이라는 비타민이 많이 생성된다는 식으로 말이야. 비오틴은 피부나 머리카락을 건강하게 가꿔주는 아름다움의 비타민이라고 알려져 있어. 티아민은 ‘피로회복 비타민’이라고 불릴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 피곤함이나 집중력 저하 등을 막아주는 비타민이란다.”
“어머, 그럼 난 100% 박테로이데스 유형이겠네? 난 아름다우니깐!!”
[그림 1] 사람의 체질은 장 속 박테리아의 종류에 따라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사진은 프레보텔라 박테리아. 사진 출처 : 룩포다이아그노시스“암튼 다행인 건,
박테리아는 혈액형과는 달리 후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의견이 많아. 태어난 직후 장을 지배하는 박테리아 종류에 따라 장내 생태계가 3가지 유형 중 하나로 발전해간다는 거지. 아무리 거울을 봐도 아빠는 박테로이데스 유형은 아닌 것 같은데…. 너한테 유전이 안 됐으면 하는 게 아빠의 간절한 바람이란다.”
태연, 평소와는 달리 자신을 낮추고 딸을 엄청나게 배려하는 듯한 아빠의 말투에 뭔가 미심쩍은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아빠의 얼굴이 유난히 검고 어두워 보인다.
“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혈액형을 알고 있듯이 머지않아 자신의 장형도 알고 사는 세상이 될 거야. 그러면 대장이나 위에 생긴 병을 치료할 때 어떤 박테리아를 많이 갖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서 그에 맞는 체질별 치료를 할 수 있겠지. 아니면 아예 병원균이 발붙이지 못하는 박테리아 생태계를 인체에 조성시킬 수도 있겠고. 또 대다수의 항생제에 내성을 지닌 이른바 ‘슈퍼박테리아’를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될 가능성도 커졌단다.”
“와, 아픈 사람들이 훨씬 줄어들겠어요. 또 아파도 체질별로 치료를 할 수 있으니까 금방 나을 수 있고. 특히 아빠처럼 평생을 ‘장트러블타’로 살아 온 분들에게 정말 희소식이네요. 그런데 아빠! 지금 저의 뇌수를 미친 듯 흔들고 지나간 이 끔찍한 냄새의 정체는 뭐죠?!”
“아까부터 계속 장이 안 좋아서 말이다. 장트러블타의 결과물들이 어느새 항문을 빠져나와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지 뭐냐. 난 정말 네가 이 아빠의 박테리아 유형을 닮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란단다. 나 혼자 오염시켜도 온 집안에서 퇴비 냄새가 가득한데, 너까지 내 장속 박테리아를 닮아 가스를 분출해댄다면 네 엄마는 정말 방독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건 너희 엄마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잖니?”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