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4권 - 개화기편,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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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부터 1907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시기에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었고, 당연히 신문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꽤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므로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기에 좋을 것이다.  또 러일전쟁의 발발 전부터 전후 문제까지의 과정이 무척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정로환'과 같은 이야기는 잠깐씩 분위기를 바꿔주는 감초 역할을 해준다. 

개화기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공통된 반응으로 '호기심'을 들었는데,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 궁금해하는 정도가 병적이다. 그것이 좋은 에너지로 분출되면 성장의 동력이 되겠지만, 선정적인 언론보도와 함께 연상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얼마 전에 서태지-이지아 사건에 대해서 배철수 씨가 남의 일에 관심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는 걸 들었을 때 참 멋있다고 여겼는데, 호기심에도 제발 분별력이 있었으면 한다.  

순국자결한 민영환의 이야기가 놀라웠다. 혈죽 매화라니. 그것을 100년 간 보존해 온 후손이라니! 몇 해 전에 박물관에서 전시회도 가졌다는데 미리 알았더라면 다녀왔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밖에 유길준과 손병희 등등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인물들이 많았고 전반적으로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데 어째 뒷권으로 갈수록 오타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24쪽
랴오둥수복론수복론이 18세기 말부터 등장했는데 >>>수복론이 두 번 겹침 

39쪽
영일동맹 직후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한반도로 군대를 파견해 일본과 충돌을 빚게 했다. 아직은 자신이 없던 일본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양분해 각각 영향력을 행사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39도선 분단안을 제시해 담판은 결렬되었다.

>>>38도선이 마음에 안 든 러시아가 39도선을 제시했다는 것은 좀 말이 안 된다. 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라 설명이 부족하다. 일본이 38도선을 제시했을 때는 러시아가 부동항에 대한 집착으로 제안을 거부했지만, 다음에 일본의 영향력이 더 강화되자 아쉬운 대로 39도선을 제시한 것인데 위 문장만 보면 기준선이 뒤바뀐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96쪽
의관정재한 한국인이 뉴욕 맨하탄에 나타났을 때 미국인들이 보일 순수한 호기심과 다를 없는 정도의 것이라고 했다.>>문장 어색
 
119쪽 사진 밑 설명  
러시전쟁 와중에서 >>>러일전쟁

130쪽 첫 줄
훗날 발굴된 비밀문서들은 미국과 영국의 일본 지원이 당시 알려진 것도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는 걸 보여주었다.>>>것보다

135쪽
이미 6일 전인 7월 19일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을 맺게 한 루스벨트>>>7월 29일

163쪽
고종의 밀명을 받은 헐버트가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피츠버그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다음날인 11월 17일이었다.
>>>앞쪽에서는 줄곧 11월 18일로 기술되어 있었다. 11월 17일에 가졌던 회의가 자정을 넘어 체결되었기에 18일로 보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여겨도 통념의 17일을 떠나 16일로 기술한 것은 오타로 볼 수밖에 없다.


230쪽
신용하는 “애국계몽운동을 을사조약에 의하여 국권을 박탈당한 후 개화자강파가 중심이 되어 완전한 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전개한 민력 개발과 민족독립역량 양성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정의했다.>>문장 어색

239쪽
『아리랑』은 유인석 부대는 세력이 왕성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면서도 유인석이 평민 장수 출신 김백천을 처형함으로써 파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며....>>>김백선

297쪽
박에스더의 생년을 1877년으로 기술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와 위키백과는 1876년으로, 네이버 백과사전은 1879년 생으로 나온다.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1885년 홀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88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1877년에 태어난 것이 맞다고 할지라도 유학길에 오른 나이와 대학 입학 나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박에스더가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1895년이고,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한 것은 1896년이다.(참고로 1886년은 이화학당 입학한 나이)

317쪽
“고종이 살아있었고 즉위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나타나고 있어 순종을 고종의 뒤를 있는 황제로 보기가 어렵다.”>>잇는

363족
박은식의 검속 사건 이후 신문사 정문에는 ‘일인불가입’까지 방까지 내걸었다. >>>‘일인불가입’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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