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는 러일전쟁이 터지자 일한동맹론을 내세우면서 일본 육군성에 군자금 1만 원을 기부하는 등 일본의 지원하에 정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용구를 통해 국내 구 동학조직을 진보회로 묶어 일본군의 군사활동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용구는 동학농민전쟁 때 맹활약한 동학의 실력자로 최시형이 잡힐 무렵에 함께 잡혀서 사형언도까지 받았지만 탈옥해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1902년 일본으로 망명한 손병희는 반일 반외세노선을 접고 개화노선으로 전향했다. 그리고 동학교단의 젊은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켜 새로운 문물을 배우게 했다.) -74쪽
실제로 개화기에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기록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바로 호기심이다. -95쪽
송우혜 "승자가 패자보다 훨씬 더 막심한 상처를 입었던 이상한 전투, 여순 전투의 승리는 러일전쟁 전체의 승패를 갈랐다. 온 유럽을 떨게 한 저 위력적인 발트함대의 운명에도 막심한 영향을 미쳤다. 전투의 후일담도 유별나다. 여순 전투를 지휘했던 일본군 사령관 노기 장군의 두 아들은 모두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엄청난 사상자를 낸 것도 두고두고 그의 경력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귀국 후 노기는 메이지 천황에게 사죄의 자살을 하겠다고 청했다가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대꾸를 들었는데, 7년 뒤에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노기 부부는 천황의 장례식 날 나란히 할복자살, 여순 전투의 기이한 마침표가 되었다." 여순 전렴 작전에서 러시아군의 사상자 수는 3만여 명이었던 반면, 일본군의 사상자 수는 6만여 명이었다. 사실상 일본 국민이 부른 피였다. -115쪽
러일전쟁에서 내내 일본군을 괴롭힌 건 병사들의 질병이었다. 물로 인한 배탈과 설사로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이때 만들어진 배탈․설사약은 나중에 러시아를 이기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유로 ‘정로환(征露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28쪽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도고가 말은 바로 했다. 도고의 승리는 국가의 지원뿐만 아니라 영국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영국이 당시 그들의 통제 아래 있던 홍해의 수에즈운하 통과를 불허하는 바람에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아프리카 남쪽의 희망봉을 거쳐 지구를 반 바퀴나 도는 에너지․시간 낭비를 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129쪽
1905년 8월 8일,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협상 대표단이 미국 뉴햄프셔 주의 작은 해군기지인 포츠머스에 도착해 1년 넘게 끈 러일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강화회담을 시작했다. 러시아군 사상자 27만 명 중 사망자 5만 명 이상, 일본군 사상자 27만 명 중 사망자 8만 6000명이라는 참혹한 통계수치가 말해주듯 양쪽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일본군 사상자는 68만 9000명이며, 이중 전사자만 14만 5000명이었다는 통계도 있다. 일본이 이 전쟁에서 지출한 직접군사비는 14억 엔으로 청일전쟁의 전비를 6배나 초과하는 비용이었고, 1903년도 군사비의 10배, 국가 예산의 5배 가까운 액수였다. 그렇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139쪽
을사늑약 체결 소식에 조선 백성이 분노에 떨 때 조선 주재 타국 외교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당시 한국 정부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는 모두 11개국이었고 공사를 파견한 나라는 일본․미국․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청국 등 7개국이었다. 이미 공사관이 폐쇄되었거나 철수한 러시아와 일본 이외의 나라들은 미국이 앞장서는 가운데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서양 국가들 중 한국과 가장 먼저 외교 관계를 수립한 미국은 가장 먼저 국교를 단절하는 기록을 세웠다. 알렌의 후임으로 부임했던 당시 미국공사 에드윈 모건은 한국 민중이 보호조약에 반대해 철시를 하고 아우성칠 때 일본공사 하야시와 축배를 들고, 한국 정부에 고별의 인사 한마디 없이 서울을 떠났다. -160쪽
이이화는 손병희에 대한 평가는 포폄이 엇갈려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에 군자금을 댄 일, 한일병합을 주장한 이용구를 상당기간 끌어안은 일, 돈을 민족운동 이외에 마구 쓴 일, 본부인말고도 첩을 둘씩이나 거느린 일 따위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또 최제우․최시형을 신으로 만들고, 자신도 성사와 인황씨로 추앙하게 한 것도 인간 중심의 동학을 신비주의로 변질시켰다는 입길이 따른다. 걸출한 인물에게도 흠집이 있다는 말로 호도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다는 평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194쪽
1905년 10월 경무사 신태휴는 흰옷 대신 검정 등 짙은 색 옷을 입으라는 법령을 발포했다. 강압적이었다. 흰옷 입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을 잡아 염색을 할 수밖에 없게끔 옷을 더럽히는 수법이었다. ‘흰옷금지령’의 이유는 검은 옷이 편리하고 위생적이라는 것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억지였다. 일본에서 수입된 색색의 옷감이 잘 팔리지 않았기에 나온 조치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4쪽
노주석 "지금까지 러시아가 적극 후원한 헤이그 밀사 파견이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의해 무산됐다는 학설과는 달리 헤이그 밀사 사건은 대한제국과 만주, 몽골을 맞바꿔친 러시아의 냉혹한 국제외교의 부산물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유석재는 "훗날 러시아군의 장교가 된 이위종이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볼셰비키 혁명군의 편에 서서 황제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가담한 것은, 이때 입은 배신의 상처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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