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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회 추억
신영복 지음, 조병은 영역, 김세현 그림 / 돌베개 / 2008년 7월
평점 :
신영복이라는 이름 석자에 드리워진 질곡의 현대사만 생각하고서 이 책을 지레짐작 무겁게 여기면 안 된다. 화사판 표지에서 느껴지듯이 밝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물론, 그 안에 약간의 슬픔이 빠지진 않았지만.
때는 1966년 이른 봄철. 서울대학교 문학회의 초대를 받고 회원 20여 명과 함께 서오릉으로 한나절의 답청 놀이에 섞이게 되었다. 그때 마주친 꼬마 여섯 명! 녀석들도 서오릉으로 봄나들이를 가는 길이었다. 춘궁한 옷차림의 소년들을 흘끔 보던 선생은 꼬마들의 무리에 끼고 싶어서 머리를 굴린다. 어린이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선생은 첫 대화를 성공적으로 끌어내었다.
"이 길이 서오릉 가는 길이 틀림없지?"
상대에 대한 거부감 없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게다가 그들로 하여금 자선의 기회와 긍지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질문이었다. 아이들은 이 길이 맞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였고 자신들도 서오릉 가는 길이라고 덧붙여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꼬마들의 세계에 발을 담근다.
꼬마들의 단체에 이름을 붙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도 했고, 학생들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나중에 사진이 나오면 보내주겠노라 하고 한 아이의 주소를 받아적고, 학교의 교수실 주소도 알려주었다. 한낮의 치기어린 장난 같았고, 순수한 꿈같았던 시간이 흐르고 헤어질 시간, 아이들은 진달래 한묶음을 수줍은 손으로 내밀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갔다. 이 어여쁜 아이들과 헤어지고 약 보름 뒤, 교수실로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이 어느덧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날을 추억하는 아이들의 정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세 녀석이 보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 서로 베끼고 베끼며 보냈을 게 틀림 없다. 그 날의 소중한 시간을 자신이 장난처럼 남겨두었음을 깨달으니 더 이상 가만 있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장충 체육관 앞에서 만나자."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청구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모임이어서 청구회라고 부른 이 모임이.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6시의 모임이. 1968년 7월, 선생이 구속되기 전까지 이어진 인연이다. 아이들은 약속시간보다 꼭 일찍 나타나곤 했고, 그게 신경 쓰여서 더 일찍 나가면 아이들은 더더더 일찍 나가 있어서 6시의 약속은 5시의 모임으로 재현되고는 했다.
그들은 서로 간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10원에 5개씩 주는 아이스케이크를 나누어 먹으며 산책을 했다. 그 만남이 두 세번째로 이어지가 건설적인 합의까지 이루었다. 매달 10원씩의 저금을 하자는 것. 6명이 10원씩을 모으고, 선생이 40원을 보태어 매달 100원씩의 우편저금을 하는 것이다. 1년이면 1,200원. 10년이면 12,000원. 중요한 것은 이때의 10원은 반드시 자기 손으로 번 것이어야 한다는 것! 아이들은 자신들의 노동으로 저금을 하였다. 그 금액이 1968년 7월까지 2,300원이 되리라고 선생은 기억했다. 간혹 사정이 생겨 모이지 못했던 부족액을 원고료에서 충당하기도 했고, 꼬맹이들도 자기의 무슨 수입에서 초과 불입하기도 했다.
1966년 9월에는 청구회 회원 중 2명이 교체되었다. 집이 이사를 갔던 것이다. 2명의 결원을 충당하였는데 아이들의 표현이 재밌다.
"요사이는 좋은 아이가 참 드물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 하지만 마침내 그 좋은 아이들을 구해서 청구회는 다시 7명의 식구를 갖게 되었다.
청구회는 독서에 힘을 쏟았다. 선생은 매월 책 한 권씩을 회의 도서로 기증하였고, 회원 각자도 책을 한 권씩 모았다. 그리고 청구회 모임에서 낭동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문학소녀도 아니고 청소년도 아니고 문학 소년들이 등장한 것이다. 아직 초등학생의 나이에! 아이들은 동네의 골목을 청소하거나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서 미끄러운 비탈길을 고쳐놓는 등, 스스로를 뿌듯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서 하곤 했다.
이들 사이의 각별했던 사연이 있었다. 바로 선생이 담낭절제수술을 받고 입원했을 때의 일이다. 모임에 참석할 수 없노라는 사연을 간단히 엽서로 전하며 병원으로 문병오지 않도록 당부를 했던 것이다. 다행히 아이들은 문병을 오지 않았는데, 사실은 왔었지만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두 번이나 찾아왔다가 위병소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
게다가 아이들은 삶은 계란까지 싸가지고 왔다는 말에 마음이 짠하게 울렸다. 소풍 날에도 좀처럼 먹을 수 없었던 귀한 양식을 선생의 문병을 위해서 장만했다니 말이다.
그 밖에도 재미나고 애틋한 사연이 몇 차례 더 소개된다. 크리스마스에 얽힌 이야기, 이화여대 학생들과 육사생도들과의 청구회 연합 봄소풍 등등.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생의 구속으로 모임은 끝날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청구회'의 정체와 회원 명단을 대라며 추궁을 하였고, 아이들과 함께 지은 노래는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의 의미로 둔갑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그렇게 정치적 탄압으로 새까맣게 짓밟히던 순간이었다.
말도 안 되게 사형선고를 받았고, 마지막일 수도 있는 시간을 선생은 정리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종이로 된 휴지에, 항소이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빌린 볼펜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록보다는 회상에 가까운 글이었다. 글을 적고 있는 동안은 그 까만 옥방이 화사한 진달래꽃으로 덮였을 것이다. 선생의 참담함을 달래주었던 유일한 구원이 아니었을까.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되고 민간 교도소로 이송을 기다리던 즈음에 이 글묶음을 압수당할까 봐 선생은 근무 헌병에가 다급한 부탁을 전했다. 집에 전달해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당신이 가져도 좋다며 맡겼던 글들. 그 글들을 출소 후 집에서 다시 찾은 것이다. 그리하여 1993년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영인본을 만들면서 '청구회 추억'을 실었다.
그 후 천구회 어린이-이제는 어린이가 아니지만-와 다시 연결이 되기는 했다. 출소 후 3년 쯤 즈음에 청구회 어린이 중 하나가 전화를 했던 것이다. 어느 친구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또 어떤 친구는 의정부 부근의 헬스클럽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가난한 달동네의 어린이들은 그때까지 만남을 유지하지 못했다. 많은 사연과 사정이 그 시간을 가득 메웠을 것이다. 그리고 전화를 주었던 그 이와도 연락이 끊겼다. 추억만 아스라이 남긴 채...
선생은 자신이 청구회 어린이들과 만날 수 있었던 계기가 이 그림 덕분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의 작품 '전장의 아이들'. 출소 후에 다시 마주치고서야 이 그림 속에서 청구회 어린이들을 찾아낸 것이다.
다시 연락하지 못하더라도, 어디선가 분명히 그때의 그 꼬마 아이들은 선생을 생각하며 이 책과 함께 추억을 곱씹지 않았을까. 그들에게도 선생과 마찬가지로 진달래 향이 가득한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감히 짐작해 본다.
책이 참 예쁘다. 영역도 같이 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은 영어 문장으로도 감상이 가능하겠다. 무엇보다 그림이 참 마음에 들었다. 김세현 작가의 그림인데 내가 읽은 책의 그림도 많이 담당했다. 모랫말 아이들, 만년샤쓰, 준치가시, 엄마 까투리를 그리신 분이다. 정감 어리다.
책에는 부록으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20주년 기념 오디오북이 실렸다. 13개의 트랙은 성우분이, 그리고 세 편은 저자의 육성으로 녹음되었다. 기꺼이 추천하고픈 책이다.